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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무위자연

비틀즈의 <렛 잇 비(Let it be)>

by 철학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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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가 ‘배철수의 음악 캠프’의 오프닝에서 배철수 씨가 물었다.

“시대가 변해도 대중들은 왜 비틀즈의 음악을 좋아할까요?”

시그널 음악이 페이드아웃 되면서 이어진 배철수 씨의 대답.

“그냥…, 좋아서겠죠.”


모든 예술이 그러하겠지만, 음악 역시 미학적 이해보다는 감동의 맹목적 의지가 선행하는 영역. 이론과 논리로 채울 수 없는 여백에 좋음과 좋지 않음을 결정하는 차이가 놓여 있기도 할 것이다.


유행과 사조, 그리고 시간을 넘어서 사랑받고 있는 비틀즈의 모든 음악이 훌륭하겠지만, 예술성으로 대변되는 존 레넌이 작사를 하고, 대중성으로 대변되는 폴 매카트니가 작곡을 한 <Let it be>는, 가장 완벽한 비틀즈의 ‘그냥 좋음’ 아니었나 싶은 개인적인 소견이다.


너무 절정을 구가하고 있던 탓일까? 완벽은 비틀즈가 각자의 길을 가게 되는 변곡점이 되고 마는 음악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빌보드의 정상에 섰지만, 멤버 모두가 개인 활동에 바빴던 탓에 앨범 자체는 비틀즈에게서 방치가 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Let it be> 그 자체였던 ‘Let it be’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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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 교수가 노자의 무위자연을 비틀즈의 ‘Let it be’로 설명하는 부분은 자못 인상적이었다. 그런 감흥을 나만 느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강의에도 저작권이 있다면, 아마 도올 교수에게 로열티를 지불해야 할 인문학 강사들이 많을 것이다.


팝송백과사전에 적혀 있던 ‘순리에 맡겨라’라는 해석을 기억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김용옥 교수의 ‘그냥 내버려 두어라’라는 해석은 노자보다도 존 레넌을 이해하게 된 계기가 되어주었다. 대중적 멜로디를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 탓에 존 레넌의 예술성은 내겐 조금 어려웠다. 단지 이 한 곡만으로 그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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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 같던 일이 난관에 부딪히면서 생각은 복잡해진다. 하지만 실상 한 가지 생각만을 계속하다 지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난관에 부딪히는 순간에도 전부터 지속해온 방법론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 방법론으로 인해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 역시 지속하고 있는 방법론 때문이기도 하다. 차라리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시간엔 이런 저런 노력으로 방법론에 대한 다양성이라도 고양되지만, 이미 어느 정도 재미를 본 효과 앞에서 그 바깥으로의 탈주는 고민하지 못한다. 이미 나도 모르게 암기된 풀이의 패턴이 창조적인 문제해결을 방해한다. 아무리 다르게 생각을 해봐도 아까 그 코드를 벗어나지 못하고, 아무리 다르게 쓸려고 해도 아까 썼던 그 문장이다.


세상의 위대한 발명, 발견은 엉뚱한 곳을 지나치고 있던 우연 속에 자리하고 있던 경우들이 많았다. 지금 여기에 반드시 필요한 그것도 엉뚱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나의 미련함에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아가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어 보자! 잠시 그것에게서 멀어지면 오히려 그것의 보이지 않던 부분이 보일 것이다. 내게서 멀어지면 비로소 내가 보이듯이 말이다. 그냥 내버려 두어라! 엉뚱한 곳에서 해답을 얻기도 하고, 풀이의 패턴을 잊어먹고 다시 문제 앞에 다가선 순간 다른 풀이 방법이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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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in my hour of darkness.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아프고 슬픈 감정을 무조건 짓누르는 것도 무위자연은 아닐 터, 승화의 방략을 찾던가, 그도 아니면 아픈 대로 슬픈 대로 떠내려가 보던가. 떠내려가는 와중에 날로 달로 무뎌지거나, 크고 넓은 바다에 닿아 희석되거나. 그런데 이건 무위자연일까? 체념일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시간만큼 좋은 해법도 없다. 어느새 상처는 아물고, 어둠은 사라지고, 폭풍우는 그치고, 추위는 지나가고, 분노는 사그라들고, 미움은 잊혀지고….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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