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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學, 배움의 노마드 - <논어>의 첫 구절

들뢰즈, 차이와 반복

by 철학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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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개념은 타자의 담론에 매몰되지 않으려 끊임없이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다. 차이는 타자와 변별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이다. 그리고 ‘차이’를 유지하기 위해 반복을 거듭하는 행위가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부식되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 공자를 대변할 수 있는 그 차이와 반복의 덕목이 바로 學이다. 흔히들 공자의 표상을 仁과 禮로 알고 있지만, 정작 공자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단어는 學이었다. <논어>의 첫 구절부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던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에 맞게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무언가를 배우는 일은, 모름과 앎 사이의 ‘차이’에 끌리는 반복이기도 하다. 학문적 배움만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내게 없는 무언가를 새로이 소유하게 되는 모든 경험들을 아우른다. 노는 것도 놀 줄 알아야 재미가 되는 법, 야구도 자신이 웬만큼 야구를 할 줄 알아야 재미를 느끼고, 식도락도 어느 정도 맛에 대해 아는 사람이나 누릴 수 있는 호사이다. 취미도 그것이 취미로 자리 잡기 전까지는 배움의 과정이 필요하다. 사랑도 이별의 시행착오를 거쳐 그 참된 의미를 배워가는 과정이 아니던가. 그래서 어른들이 그렇게도 배움을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술이라도 배워!’라며….


‘차이와 반복’는 다양한 해석으로 분열되는 키워드이다. 들뢰즈의 또 다른 키워드인 ‘노마드(nomad)’ 역시 차이와 반복으로 해석되는 개념이다. 늘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떠나는 유목민들의 삶처럼, 새로운 발견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은, 지금 여기에는 부재한 저기의 ‘차이’에 이끌려 가는 본능이다. 그리고 차이의 가치가 인정된 태도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반복 속에 또 다른 차이가 발견되고, 차이는 또 다시 반복을 낳는다.


공자에게 배움이란 그런 노마드적 가치다. 자신이 아는 것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항상 새로운 앎을 향해 가는 창조와 생성을 긍정한다. 공자에게 있어 배움은 모름을 향해가는 즐거움이지, 앎에 대한 강박이 아니다. 그래서 배울 수 있는 일이라면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不恥下問, 불치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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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허를 미덕으로 생각했던 공자가, 이것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음을 피력했던 好學의 태도다.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열 가구의 마을에도 반드시 나 정도로 충직하고 신실한 사람이야 있겠지만, 나만큼 배우길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앎을 향해 가는 여정은 호기심을 동력으로 한다. 그 동력의 계기가 되어 주는 것은 모름이다. 문제는 모름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을 때 호기심도 작동을 한다는 점이다. 결국엔 무언가를 알아야, 모르는 무언가도 알게 되는 역설. 하여 배움을 좋아했던 공자는 역설적으로 항상 無知를 자처했다.


대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는 무지는, 좀처럼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로 그 대답을 모두 얻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자신이 아는 것으로 모르는 것에까지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기도 하다. 당연히 배움보다는 가르침에 대한 욕망이 더 크다. <맹자>에는 이런 성향을 인간의 일반적인 심리로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 있다.


人之患 在好爲人師,

사람의 병은 남의 선생이 되는 것을 좋아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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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알라’의 경구는 그 저작권이 소크라테스에게 있지 않다. 차라리 소크라테스의 표상으로 거론할 수 있는 어록은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일 것이다. 공자도 비슷한 어록을 남겼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앎이란 게 단지 지식의 범주만을 의미하겠는가. 그의 일관된 주제는 아는 것과 사는 것의 상관이다. ‘모름’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수 있는 자에게만 발견되는 ‘덕목’이다. 그러나 결국엔 더 많은 것을 알 준비가 되어 있는 지평에 대한 겸손의 표현이기도 하다. 고지식으로 굳어지지 않은 사고의 유연성도 그런 무지의 성찰로부터 가능한 ‘차이’이다. 또한 그런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열린 체계’를 유지하는 ‘반복’인 것이다. 그렇듯 어떤 가치를 반복하느냐의 차이가 당신이 소유할 수 있는 앎과 삶을 결정(結晶)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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