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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철학 - 합리론과 경험론의 종합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by 철학으로의 초대

맨 처음 원근법을 사용해 그린 벽화를 보고, 사람들은 그림 속에 실제로 공간이 있는 줄 알고 벽을 더듬거렸다고 한다. 시각장애인들이 시력을 되찾게 되어도, 곧바로 일반인과 같은 원근감과 입체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갓 태어난 아기였던 때에도 지금과 같은 시력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늘 허공으로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만지려했던 것이다. 기관의 소유 그 자체가 곧 시력이고 시각인 것은 아니다. 세상의 이것저것을 둘러보고, 바라보고, 지켜보고, 살펴보는 경험을 통해 계발이 이루어진 결과다.

서양철학사에 있어서 칸트의 위상은 경험론과 합리론의 종합이라는 수식으로 대리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라이프니츠와 흄의 절충이다. 경험만으로 사유가 이루어질 수는 없으며, 경험 없이는 사유도 불가능하다. 사고와 관찰, 그 모두가 구비되어야 비로소 통찰이란 게 가능할 수 있다. 바람개비를 비유로 들자면 바람은 경험이고, 바람개비 자체는 지력이다. 바람이 불어와야 바람개비가 돌 수 있지만, 바람개비 자신도 이미 바람에 의해 돌아갈 수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현상은 이미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선험적인 메커니즘으로 인식된다. 최초의 경험은 우리에게서 어떻게 경험으로 남겠는가 말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경험보다 앞선 생각의 기제가 존재해야 하다. 이로써 흄의 회의론을 비판한다. 인식의 지평은 경험을 통해 확장과 재구성을 겪는다. 분명 외부 요인의 영향도 있다는 사실을 들어, 라이프니츠의 결정론적 모나드 이론을 비판한다.

“내가 나의 실체를 확신하려면 나를 대상화해야 하고, 그러려면 내가 나의 밖으로 나가야 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니 나는 나의 실체를 증명할 수 없다”


여기서 ‘나의 실체’란, 데카르트적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선험적 전제다. 이것이 곧 ‘순수이성’의 조건이기도 하다. ‘순수이성’이라는 말 자체가 라이프니츠에게서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성으로 모든 것을 다 해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 물론 보편과 객관으로서의 질서를 탐구했던 칸트였지만, 인간이 지닌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정리임을 분명히 한 ‘비판’이다. 그 바깥이 ‘물자체’라는 개념으로, 훗날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실재계’ 개념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런 이성적 체계로 도덕의 영역을 설명하는 경우가 <실천이성비판>이고, 이성 바깥에서 도래하는 열망과 미학의 문제들 중 이성으로 설명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판단력비판>에서 다루고 있다. 즉 그가 겸허로 남겨둔 이성 바깥의 영역에서 니체와 프로이트가 등장한다.

물자체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에게 내재된 선험과 우리가 겪은 경험을 통해 구성되는 해석일 뿐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쪼개진 박을 우리의 목적대로 ‘바가지’로 인식하지만, 그것은 바가지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쪼개져 있는 박의 조각이며, 우리 생활체계 내에서의 습득된 기능적 ‘개념’을 부여하는 것뿐이다. 또한 ‘박’이라는 명칭 자체도 경험의 산물이다. ‘박’이라는 개념 자체도 지우고 나면, 그저 그렇게 생긴 무엇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무엇의 순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거기에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데에는 굳이 경험이 필요하지 않지만, 그것을 개념으로 인식하는 경우엔 최소한의 경험을 매개하기 때문이다. 이 담론에서 단어만 몇 개 바꾸면 불교의 유식론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개념을 던져놓고서 그 개념을 인식한다는...


감각은 선천적으로 갖추어진 기관이지만 경험의 누적 여하에 따라 받아들이는 자극을 달리 해석한다. 이성 역시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선험적 판단력이지만 항상 경험의 영향권에 놓여 있다. 인간의 인식은 최소한의 시간이라도 매개하기 마련이다. 그 시간의 성질에 따라서 인식되는 세계도 달라진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사물의 순수한 본질을 인식할 수 없다. 이 순수 존재 개념을 ‘물자체(物自體)’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 그 자체라는 의미.

정언과 가언


"우주의 법칙이 정신에 알려져 있는 까닭은 그것들이 정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칸트의 어록대로라면 우주의 법칙과 우리의 정신은 동일 모델이다. 여기서 ‘우주의 법칙’은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理)에 해당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그 理가 인간의 정신 상태로 존재하는 덕목이 성(性)이다.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이성 개념을 디테일하게 설명하자면 성리학의 性과 다르지 않다. 자연과 공명하는 선천적인 지력이며, 도덕적 가치를 포합하는 범주이다.


<순수이성비판>이 인식의 원천으로서의 이성에 대해 묻고 있다면, <실천이성비판>은 우리의 의지를 규정하는 근거로서의 이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자연의 섭리가 심화(心化)된 이성이 의지의 근거로 작용할 때, 즉 동기의 순수성이 우리의 자율적 의지일 때, 그것은 무조건적으로 보편타당한 정언(定言)의 명법이다. 그에 비해 가언(假言)의 명법은 특정 상황 하에서 타당한 조건부의 격률이다.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도덕이라고 할 수 없다. 순수하지 못한 동기를 둘러싸고 있는 그 상황이란 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아주 유명한 칸트의 명제, 나에게 정의인 것이 너에게도 정의일 때, 그것이 도덕이다. 굳이 나와 너를 따지지 않는 순수한 동기로서의 정언이 도덕이다. 그러나 칸트는 반드시 정언만을 행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충분히 정언에 의거할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 가언을 들먹이는 인간의 부조리를 성토하고 있었던 것.

숭고


미학이 하나의 분과로 독립할 수 있었던 건, 칸트와 헤겔의 공로이다. 그 초석이라 할 수 있는 <판단력 비판>에서부터, 美가 대상에 존재하는 것이냐, 나의 인식 체계가 인식하는 것이냐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물론 그도 美라는 것이 인식론적 범주 바깥에서의 감흥적 성격이란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어떤 그림의 아름다움도 그것이 그림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전제 위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아예 무관한 감상이 아니라는 것. 하여 공통 감각이란 개념으로 미가 지닌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증명하려 한, 니체가 그토록 비판했던 칸트의 지병.


칸트는 美를 味와 결부시킨다. 맛의 취향은 서로 다르나, 혀가 이미 맛에 대한 공통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논리. ‘숭고’의 챕터로 넘어가면 이건 거의 신앙의 성격이다. 너무도 경이로운 광경 앞에서 우리는 내면에 잠재해 있는 경건함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 이렇듯 인식 체계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미적 감흥이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과 연결된다.


그야말로 너무도 숭고한 이상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상 우리가 이런 미적 도덕을 겪는 순간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한없이 착해져야 할 것 같은 경건함과 이 사람을 소유하고 싶은 정념이 갈마드는 순간들.

니체는 칸트를 ‘쾨니히스베르크의 중국인’이라고 불렀다. 칸트는 평생 거의 그 지역을 떠난 적이 없는 지역 유지였단다. ‘중국인’이란 은유는 보편적 도덕을 표방하는 유가를 의미한다. 이미 라이프니츠서부터가 유럽으로 유입된 중국 철학서들의 영향을 받은 제네레이션이다. 라이프니츠와도 친분이 있었던 스피노자는 생존을 위한 생명들의 본능을 선도 악도 아닌 것으로 말한다. <도덕경>을 빌리자면 천지불인(天地不仁), 자연은 인자하지 않다. 생존을 위해 어린 양을 잡아먹는 어른 늑대가 부도덕인 것이 아니다. 니체는 늑대를 악으로 양을 선으로 묘사하는 인간중심적 사고를 비판하며, 도덕 그 자체가 누구에 의해서 도덕으로 권력화 되었는가를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선악의 저편에 존재하는 무의식적 열망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에 앞서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되도록 니체의 책을 읽지 않으려고 했단다. 자기는 연구를 통해 겨우겨우 얻은 결론이거늘, 니체에게선 철학적 직관으로 가능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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