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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심리학자의 걱정 - 긍정과 절망

니체와 키에르케고르

by 철학으로의 초대

어느 심리학자의 조사 결과, 우리가 하는 걱정의 30%는 이미 지나간 일, 40%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 22%는 별것 아닌 사소한 일, 나머지 8%는 아직 생기지도 않은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심리학자는 무슨 걱정에서 이런 조사를 했던 것일까?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과 별것 아닌 사소한 일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보통 사람들이 지구멸망의 시나리오를 걱정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아니며, 별것 아닌 사소한 원인들이 큰 재앙을 불러들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말이다.


니체는 이런 이유로 연구실에만 들어앉아 연구에만 전념하는 학자들을 싫어했다. 문헌에 대한 해석과 그로부터 얻어지는 평균의 데이터에만 몰두할 뿐, 개개인이 마주하고 살아가는 인문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평균적인 인간의 삶을 척도로, 다른 모든 피조물의 삶을 측정하는’ 그 모든 것이 오류다. 더군다나 이 경우에는 척도의 설정 기준도 모호하다. 그럼에도 여간한 심리학 에세이들이 다 가져다 쓰는 긍정의 전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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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나간 일을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에 대한 걱정이다. 하여 모든 걱정이 ‘아직 생기지 않은 일’의 동어반복이다. 그 걱정들을 동력으로 발전을 거듭해 온 철학, 종교, 문학, 예술의 역사이기도 하다. 걱정 없이 사는 것이 도리어 무지이고 나태일 수도 있거늘, 긍정의 명분으로 걱정의 행위에 그렇게까지 인색하게 굴 필요가 있을까? 걱정해도 된다. 근심해도 된다. 그 모두가 불안 속에서 어떻게든 뭘 해보려고 필사적으로 생각을 거듭하는 과정들일 뿐이다.


삶이 지닌 불확실성과 의외성이 건네는 불안과 걱정은, 살아 있음과 어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관한 각성이기도 한 것이다. 강을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처럼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아닌, 살아 있는 것들이 허무의 물살을 거스르는 역동성이다. 실존철학의 계보들은 차라리 이런 불안 속에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끝에 넓어지는 지평을 긍정한다. 하여 절망도 필요하다. 정말 위험한 것은 그 절망마저 놓아 버리는 평온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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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긍정의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절망의 철학자라는 역설은, 키에르케고르와도 통하는 점이다. 절망은 죽음의 이르는 병이다. 그러나 병일 뿐 그 자체로 죽음이 아니다. 아픔이란 것은 몸이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다. 더 가면 위험하니 거기서 멈추라는…. 아픔이 없다면 도처에 널려 있는 죽음이 다가오도록 그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아픈 와중에 왜 앓게 된 것인지에 대해 알게 되는 성찰도 가능하다. 지금 내 앞에 닥친 현실이 절망이라면, 절망의 의도대로 아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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