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차라투스트라, 헤세의 아브락사스
남매는 하늘에서 내려 준 동아줄을 붙잡고 올라가 해와 달이 되었지만, 호랑이는 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올라가다 줄이 끊어져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 설화에서 해와 달 그리고 호랑이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정신분석의 한 방법론이 이런 문화인류학적 접근으로 무의식을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설화나 민담 속에서 호랑이는, 신령스럽거나 공포스럽거나이다. 옛 선인들에게서는 우는 아이를 잡아가는, 그래 봐야 곶감에게 밀리는 심판자였다. 융의 집단무의식으로 한국의 민담을 해석하는 이나미 교수에 따르면, 호랑이는 미분화되지 않은 원형질로서의 욕망을 상징한다. 이를테면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겠다던 녀석이 이에 해당할지 모르겠다.
혹 호랑이는 자녀를 위해 살아가는 삶에 지친 엄마의 무의식은 아니었을까? 동화 속에 등장하는 계모들은 아이들이 바라보는 엄마의 이면이라는 해석이 있다. 아동의 애착이 강한 대상인 만큼, 한 번 서운함을 느끼면 그 깊이로 파고드는 부정적 감정 너머에 엄마 대신 계모가 서 있다.
엄마 입장에서도 이런 무의식이 있지 않을까? 아이를 너무 사랑하지만서도, 아이로 인해 사라져 버린 듯한 자신의 정체성. 그러나 에고는 그런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저런 설화와 민담이 생성되던 시기에는 엄마에 대한 사회적 미덕을 더 요구했던 시절일 테니, 부정성의 무의식이 맹수의 형상에 투영된 건 아닐까?
그런 미덕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무의식적 욕망은 호랑이의 탈을 쓴다. 호랑이는 가책이 드리워진 이미지이기도 한 것. 엄마가 아닌 한 여자로서의 ‘나’를 허락할 수 없는 사회적 무의식 사이로, 호랑이는 썩은 동아줄을 잡다가 추락하고야 만다.
정신분석은 이 도식으로, 우리의 정신을 문명적 에고와 태초적 이드로 설명하기도 한다. 문명으로의 사회화를 겪으면서 태초의 충동은 억압받는다. ‘하면 안 되는 것’으로 교육받은 규범들. 물론 사회적 존재들이니 그런 사회화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지만, 니체는 필요 이상으로 본능을 ‘나쁜 것’으로 몰아가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바로 내 입에서 나온, 최초의 비도덕주의자의 입에서 나온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내게 질문을 던졌어야 했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페르시아인의 역사상 엄청난 독특성을 이루고 있는 것과 내가 말한 차라투스트라는 바로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의 투쟁에서 사물의 움직임의 본연적인 바퀴를 처음으로 본 사람이며,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즉 힘, 원인, 목적 그 자체로 옮긴 것이 그의 작품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숙명적 액운인 도덕이라는 오류를 창조해 냈으며, 따라서 그는 그 오류를 인식한 최초의 사람이지 않으면 안 된다.
니체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차라투스트라는, 고대 페르시아의 철학자이면서,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다. 한자문화권에 서는 배화교(拜火敎)라고 불리웠던 이 종교는, 선과 악을 가르는 이분법의 단서를 중동의 여러 종교에 흩뿌리는 기원이 된다.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하고 유대인들을 해방시키는 과정에서 미친 영향들이 있단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여러 고전들이 패러디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성서』다. 첫 페이지서부터 그리스도의 행적인 듯한 모습이 연출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자신의 분신으로 등장시켜 도덕의 계보를 묻는 역설을 꾀한 것.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알에서 빠져나오려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설 『데미안』을 대변하는 이 철학적 문구는 헤르만 헤세가 72회의 정신과 치료를 받은 이후에 나온 것이란다.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끝에 완성한 자전적 소설은, 수사의 황금비적 조합이 아닌 몸소 삶으로 이해한 성찰적 함수였다. 깨부수기 위해 꼭 미칠 필요까지는 없으며, 미칠 수 있는 능력도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은 아닐 터. 그러나 미칠 것 같은 번뇌 속에서의 미친 듯한 발버둥의 와중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경계가 허물어진다. 세계를 파괴하고 세계 밖으로 나온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는 천상과 지상을 중계하고 있는, 신이면서도 선인 동시에 악으로 존재하는 하늘이다. 해석하자면 신은 인간세계의 선과 악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상징이다. 헤세의 페르소나이기도 한 주인공 싱클레어는 성장의 어느 순간에 아브락사스를 만나게 된다. 어른들에게 강요받은 도덕의 가치가 과연 진정한 선인가를 따져 묻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어른들로부터 강요된 모든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닫힌 체계로부터 열린 세계로의 도약, 그 상징이 껍질을 깨고 나와 중력을 벗어나는 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