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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dall K Nov 09. 2022

0부터 시작하는 재봉일지

[재봉일지] 01 언박싱과 파우치

  미싱이 도착했다. 10월 중순께의 일이었다. 제주도로 시켰는데도 이렇게 빨리 오다니 역시 쿠X의 힘은 대단했다. 문제는 나의 강의가 11월 첫 번째 토요일에나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박스를 열 수 없었다. 뭔가 부러트리면 어떻게 해? 선생님과 함께 박스를 열기로 하고 고이 봉인하기로 했다. 다행히 약 2주가량은 정말 공사다망해서 눈코 뜰 새가 없었던 터라, 첫 수업일은 금방 찾아왔다.


 아침 10시 수업인데 차로 30여분 거리였기 때문에 늦잠의 지평선을 넘어버린 내게는 경황이 없었다. 일단 박스째로 차에 싣고 달렸다. 달릴 땐 나름 안전히 달렸다. 귀한 파트너 재봉틀님이 타고 계시니까.


드디어 드러난 나의 가정용 미싱

 박스를 열고 포장을 뜯으니 작고 사랑스러운 나의 미싱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제법 튼튼한 듯 가볍고, 있을 건 다 있어 보였다. 위풍당당 나의 미싱!이었지만 감탄할 시간은 없었다.


 어머님의 교회 친우인 필 권사님은 90년대부터 문화센터 등에서 한 반에 열명씩 재봉틀을 가르치던 분이시라고 들었다. 지금은 취미로만 하시는데, 앤 언니와 나를 위해 오래 쓰던 재봉틀을 다시 꺼내 드셨다고.


 다만 필 권사님이 전문 공업용 재봉틀로 일을 하시기 때문에 간소화된 신식 가정용 재봉틀은 권사님으로서도  다소 낯선 물건이었다. 그래도 기본 구조는 비슷했기 때문에 언박싱을 하자마자 우리는 설명서를 같이 보며 전원을 연결하고, 작은 페달까지는 연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필 권사님은 생각보다 스파르타에 자립심을 중시하는 선생님이었다. 갑자기 이제 윗실과 밑실을 끼워보라고 하셨다. 나는 윗실과 밑실이 뭐가 다른지 아직은 모르지만, 맛보기로 몇 개 시청한 유튜브 영상과 사용설명서가 있었기 때문에 체감 20분에 걸쳐 실을 혼자 끼워낼 수 있었다.


- 선생님 저 실 다 끼웠어요!


 뿌듯하게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바로 실전에 나를 던져놓았다. 모든 재봉은 시작하기에 앞서 노루발을 내린다. 돌림 바퀴를 앞으로(만) 돌려 바늘을 꽂는다. 매듭을 짓기 위해 전진, 후진, 다시 전진을 짧게 반복한 후 직선으로 박는다.


 나는 네모난 솜 원단을 좌우상하로 돌려가며 똑바로 직선 박기를 시작했다. 수없는 상상 속에선 엇박으로 비뚤게 나가는 손이었지만 실제론 노루발이 천을 잡아줘서 생각보다 수월하게 직선 모양을 잡아갔다. 나는 특히 이미 관심과 의욕이 가득이었기 때문에 다라라락 돌아가는 재봉틀과의 호흡이 무척 재밌었다. 옆자리 앤 언니도 이미 재봉틀의 마력에 푹 빠진 듯했다. 눈이 마주친 우리는 공감했다. 재봉틀은 필시 힐링이 되는 활동이다. 마음이 평온해졌다.


 사실 이날 수업 후에는 육지에 올라갈 요량으로 이른 오후 비행기를 발권해 놨었다. 열두 시에 수업을 마치면 조금 빠듯할 것 같아서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려고 했는데, 양해를 구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재봉틀이 기대 이상으로 재밌기도 했고, 우리가 직선 박기에 익숙해졌다는 걸 필 권사님이 바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첫 번째 작품 만들기에 돌입했다. 필 권사님은 화려한 오버로크 기술로 솜 원단을 몇 초만에 손질해 주셨다. 우리는 그 천을 하나씩 잡고 끄트머리를 곱게 접어, 1시간 이내에 손에 익힌 직선 박기를 시작했다. 똑바르지 않거나 폭이 부적절해 두어 번 다시 뜯는 과정을 거쳤지만, 쪽가위로 박음질을 뜯는 과정조차 재밌게 느껴졌다.


 양 끄트머리를 박고 원단을 반으로 접어 박으면 얼추 주머니 비슷한 모양이 된다. 필 권사님은 우리의 첫 작품이 볼품 있어 보이도록 주머니에 바닥을 만드는 법도 알려주셨다. 이마저도 몇 번 뜯고 다시 박아야 했지만.


 큰 핀에 끈을 연결해 우리가 맨 처음에 만들어둔 끈 자리에 쏙 하고 넣으면, 나는 돈 주고도 살 만하다고 여기는 파우치가 완성된다! 끈 끝에는 마찬 가지로 재봉틀과 약간의 솜, 손 바느질을 보태 꽃망울도 하나 달아 주었다.


나는 돈 주고도 살 만하다고 여기는 파우치


 배운 당일 불과 2시간 만에 파우치를 만들 수 있다니! 재봉틀은 실로 혁명적인 기술이었다. 나는 결국 비행기 시간을 감안해 파우치를 완성하자마자 뛰쳐나와야 했지만, 품에는 소중한 내 작품이 안겨 있었다.


 필 권사님의 교육방법이 다소 서바이벌 프로그램 같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빨리 감을 익힐 수 있었단 생각이 든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재봉틀 수업이 되겠다. 제법 귀엽고 예술적이기까지 한 파우치를 들고 귀가하는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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