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네디 Aug 11. 2023

위기 안에 위기, 터널 시야

빌런들의 성공철학 2

Episode 1


1995년 학교 정문 앞,

남학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당구장이었다.

특히 공대 남학생들은 더했다.

여학생 보기 힘든 거친 인상의 토목공학과 내에서도 가장 억센 녀석들로 구성된 우리 뱀파 또한 두 시간 이상의 공강시간이나 하교 길에는 늘 당구장에 들렀다.


뱀파


나를 포함한 학과 내 인천 출신 거친 녀석 몇이 '인천파'로 불린 이후 서울과 제주 출신의 잡기술 인재들을 포섭하며 세를 확장했고, 단합 대회를 명목으로 인천 주안역에 모여 밤새 술 마시자며 오른 1번 마을버스에서 기사님의 선곡, 가수 김혜연 님의 '뱀이다(참아주세요)'에 열광해 인천 가는 내내 지하철 안에서 흥얼거린 사건을 유래로 뱀파가 됐다.

편법과 잔머리에 능한 녀석들로 언변과 유머 감각도 뛰어났다.

다만 몸에 밴 거친 말과 행동 탓에 수십 차례 이르는 미팅과 여대 조인트 엠티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열 명의 멤버.

끈끈한 우정으로 늘 뭉쳐 다녔던 뱀파였지만, 당구장에서 만큼은 예외로 빈틈이 보이면 언제라도 서로를 물기 위해 혀를 날름 거리는 각자도생 뱀이었다.

꼴찌가 게임비를 내는 승부에서 누구 하나 뒤처진다 싶으면 소위 '말 겐세이'라 해서 칠 준비하는 친구에게 정신적 혼란을 야기하는 조롱, 언어폭력을 가했으며, 두세 명을 팀으로 하는 단체전에서는 통일된 퍼포먼스로 상대팀 전원을 대상으로 공략하고 개인기를 바탕으로 한 각개전투로 상대의 멘털을 흔들며 기선을 잡으려 했다.

그중 가장 숨 막히는 승부, 두 명이 짝을 이뤄 세 팀이 겨루는 2:2:2.

꼴찌가 돼 두 명이 게임비를 나눠 낸다고 해도 6명이 치는 그룹 경기에서는 부담이 만만치 않았으니 서로를 향한 방해 전략은 더욱 치밀하고 치열했다.


1. 성적, 외모 비하

2. 초크(삑사리 나지 않기 위해 큐팁에 문지르는 작은 큐브)를 미리 숨기고 차례가 된 친구가 초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면 '뭐 하는 거야! 빨리 쳐!', '일부러 시간 끌고 있네. 야! 백 원 내고 쳐.' 등으로 겁박하며 조바심 초래

3. 당구장을 돌며 김밥 파시는 할머니에게 김밥 살 때 받은 소금을 몰래 커피에 듬뿍 넣어 미각의 고통 야기

4. 상대가 강한 스트로크를 하기 직전 일부러 헛기침해서 삑사리 유도

5. 선배가 벼르고 있다는 등의 가짜 뉴스 살포로 경기력 위축 조장

6. 깊숙이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테이블 중앙에 짙게 뿜어 동선 예측 방해

7. 마타도어로 상대팀 분열 초래


나날이 고도화하는 전략에 대응하며 내성을 키워왔던 터라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았던 강한 정신력, 더러운 스포맨쉽의 뱀파는 각종 체육대회 경기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치러지는 모든 승부를 멘털 싸움으로 승화시켜 늘 좋은 성과를 이끌어냈다.

다른 동기생들에게 실체가 드러나 게임을 거부당하는 일이 잦아지고, 드디어 뱀파 내의 결전이 이뤄지던 어느 날,

둘 씩 짝을 이뤄 세 팀이 겨루는 2:2:2 경기에서 관중이 녀석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팀을 우승권으로 이끌고 있었다.

3연 전 그 첫 경기에서 꼴찌의 비운을 맞이해 이번 2차전에서 무조건 1등으로 안정된 승점을 확보하고, 여유롭게 세 번째 경기를 치르고자 했던 우리 팀에게는 위기상황이었다.

평소보다 더욱 강도 높은 방해 전략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분위기로 흐르며 2차전 중반임에도 이미 2시간을 넘긴 난전.

관중이의 흐름을 끊고 1등으로 치고 나가기 위한 뭔가 획기적인 전략이 필요했다.

선거전에서 남 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더 위에 오르려 하기보다 남을 깎아내려 그 위에 서려는 네거티브 전략과도 같이 내가 하나 더 치고 못 치고 문제가 아닌 관중이를 혼란에 빠뜨려 평타를 줄이게 만드는 부의 요소를 고민하는 중 당구장 안에 울려 퍼지는 소리


"호출! OOOO번 호출!"


주인아저씨 목소리였다.

영어로는 pager, 과거 우리나라에서 삐삐라 부르던 무선 호출기를 써 본 세대는 익히 떠올릴 수 있는 장면 즉, 요즘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듯 과거에는 호출기를 들고 다녔고, 업소에 비치된 공중전화로 상대의 호출기 번호에 걸어 업소 전화번호를 남기면 상대가 자신의 호출기에 찍힌 번호로 전화 걸어 통화하는 방식.


'바로 이거다!'


불현듯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라 당구장 입구 옆에 놓인 공중전화로 갔다.

다행히 우리 테이블은 그 반대편 끝. 게다가 테이블 모두 학생들로 가득 차 쉽게 눈에 띄지 않을 테니 재차 범행이 가능한 묘수.

공중전화 옆 돌출된 벽 틈에는 주인아저씨가 적어 놓으신 여러 업체 전화번호 그리고 열쇠, 언 수도 녹임 등과 같은 작은 스티커들이 붙어 있었다.

빠르게 훑어 내리며 그들 중 하나를 신중히 선택, 관중이 호출기에 연락 번호로 찍고 잽싸게 자리에서 떴다.

연락한 사람의 기다림을 크게 개의치 않는 성향, 연락한 사람 기다리게 하는 걸 죄로 여기고 바로 답하는 성향. 관중이는 후자에 속했다.

뚱뚱하고 느렸지만 호출기 회신만큼은 민첩했던 관중이.

즉시 반응하리라는 확신과 함께 관중이를 주시하며 테이블로 돌아가는데, 역시 관중이는 관중이었다.

바로 호출기 확인. 자기 차례가 되자 전과 같은 신중함 없이 대충 치고 공중전화로 달려간다.

그 자체 만으로도 집중력 분산의 효과가 있겠지만 그건 고작 예고편에 불과, 아직 블록버스터급 본 편이 남아있었다.

저 멀리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관중이.

남들 보기에는 뭔가 심각한 대화가 오가는 듯 보였으리라.

통화를 마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테이블로 돌아오는 관중이를 공격하는 상대 팀.


"빨리 와! 장난하냐?"

"야! 뭐 해! 빨리 쳐! 계속 기다렸잖아!"


관중이를 향한 욕설난무의 현장, 뜻밖의 부수 효과.

호출에 의한 혼란과 상대 팀의 비난에 관중이의 컨디션을 걱정하는 파트너가 물었다.


"호출 어디서 온 거야?"

"무슨 가스배달이래"

"가스배달하는 집에서 너한테 왜 연락해?"

"몰라. 내 번호로 호출한 사람 없다고 해서 이름까지 알려 줬는데도 없데."


그렇다.

1차 공격에 사용한 미사일은 가스배달이었다.

벌써 크게 흔들리는 관중이.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이번에는 미리 봐둔 철물점 번호를 남겼다.

2차 공격도 깔끔하게 성공.

1차 가스배달 공격에 혼란스러워했고, 2차 철물점 공격에 주눅 들었다.

철물점 아저씨한테 혼난 모양이다.

확실한 게임 체인저가 필요한 시점. 이번에는 당구장 주인아저씨가 아닌 아줌마 글씨로 적힌 방앗간 미사일을 선택했다.

떡 찧는 소리, 기름 짜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로 시끄러운 방앗간.

소음 탓에 통화감도 좋지 않을 테고, 호출한 사람 찾는데도 장애가 있으리라는 예상이 적중한다.

떡방앗간 내부자와의 긴 통화로 인한 혼란은 핵폭발에 의한 1차 충격 피해였고, 이미 수차례 자리 비우며 반복해서 게임을 지연시킨 것에 분노한 상대팀 그리고 파트너에게까지 욕을 들어 생긴 내상은 2차 방사능 피해였다.

그렇게 관중이는 처절하게 무너졌다.

우리 팀은 2차 전에서 1등, 3차 전에서 2등으로 꼴찌를 면했고, 관중이 팀은 게임비가 모자라 당구장 주인아저씨의 외상 리스트에 이름이 오르는 불운을 겪어야만 했다.

승리를 자축하며 너스레 떠는 내 파트너


"내가 너 보다 훨씬 많이 쳤지? 내가 잘 쳐서 이긴 거야"


사실 작전의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 파트너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파트너의 볼을 꼬집으며 근엄한 표정과 목소리로,


"건방진 놈. 시야가 좁으니 테이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지?"



Episode 2


바카라(Baccarat)로 큰돈 잃고, '더 이상 테이블에 앉지 말아야겠다'라고 다짐하며 슬롯머신 앞에 앉았다.

바카라 하던 돈에 비하자면 극히 적은 금액으로 슬롯머신을 돌리며 내 안의 도박성을 조금씩 줄여나가려는 노력이었다.

그런 나를 찾아오는 후배들. 그들 대부분 방법을 궁금해하며 물었다.


"형님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일단 천 페소 넣어"


도박으로 많이 잃고 여전히 바카라를 즐겨하던 녀석들이라 그들에게도 슬롯이 대안일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내 게임을 구경하러 왔다가 옆에 앉아 천 페소를 넣었던 선배와 후배 여럿은 괴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베팅을 올리더니 마치 바카라로 승부 보듯 큰돈으로 슬롯을 하게 될 줄이야.

괜히 나까지 군중심리에 말려들까 싶어 슬롯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정찰 보냈던 직원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K사장님 지금 많이 잃고 계십니다."

"얼마나 잃었는데?"

"30만 페소 잃으셨다고 하는데 베팅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불구경, 싸움구경만큼이나 재밌는 게 판돈 큰 게임구경이다.

주머니 안의 돈을 싹 다 비우고 달려 내려가니 상기된 얼굴의 후배와 그 옆에 서서 구경하던 앵벌이가 눈에 들어온다.

후배 모르게 조용히 뒤에 서서 지켜보자니, 몇천 페소 넣을 여력도 없는 앵벌이가 수십만 페소로 게임하는 후배를 코치하는 꼴이 우습다.


"그림이 점점 좋아지고 있어"


그 말에 화답하듯 후배는 베팅 금액을 올리고, 자신의 조언에 즉시 반응하는 흐름에 탄력 받은 앵벌이는 또 다른 견해를 자신 있게 피력한다.


"위기가 곧 기회야. 이렇게 한참 안 나오는 기계가 줄 때 시원시원하게 주거든. 잭팟도 이럴 때 터지더라고"


몇 시간 후,

후배는 시원시원하게 잃었고, 앵벌이는 배 터지도록 욕먹었다.



'위기가 곧 기회'

나는 그 표현이 참 거슬린다.

모두가 함께 겪는 위기이건 나 혼자 처한 위기이건 위기는 위기다.

기회를 찾는 노력보다 일단 그 위기를 벗어나 원래의 상태, 그게 불가능하다면 지금 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상태로 회복하려는 마음이 우선 아니겠는가?

하물며 슬롯으로 많이 잃고 있던 내 후배처럼 극복을 목적으로 했던 방법이 오히려 또 다른 악재를 발생시켜 사태를 더 심각한 방향으로 흐르게 할 수도 있으니, 위기를 기회 삼아 도약을 꿈꾼다는 주장은 확률적으로 더욱 설득력 없어 보인다.

내 경험과 도량에서는 그렇게 느껴진다.

그러니 위기의 최저점에서 다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에 대해서만 얘기하기로 하겠다. 사실 그 마저도 벅차다.


언젠가 나를 화장실에서 한 번, 밖으로 불러내 한 번 구타했던 건달형님이 말씀하셨다.


"일반인들은 싸울 때 시야가 좁아져. 그런데 우리 같은 건달들은 경험을 많이 해서 다 보이지. 그래서 더 잘 싸우는 거야."


전직 이종격투기 선수였던 L후배와 싸우면 이길 수 있는지 묻는 내 질문에 대한 형님의 답은 그랬다.

그 후배를 일반인과 동급으로 봐야 할지 애매했고, 싸운 경험은 후배가 더 많았을 텐데 실제로 붙게 된다면 누구의 시야가 더 좁아질지 궁금했다.

건달형님들의 시야가 더 넓으신지라 지형지물의 파악이 빠르고 그래서 각종 연장을 손쉽게 찾아 각도를 달리하며 찌르고 후리는 것이라 대충 합의하고 대화를 마쳤지만, 시야가 좁아진다는 표현은 전적으로 공감했다.

확실히 위기의 한가운데에서는 시야가 좁아진다.

형님의 고귀한 말씀대로 경험이 없으면 더욱 그렇다.


1. 추켜올린 어깨와 귀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사람이 핸드폰 잃어버렸다며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지는 모습은 망각의 위기 속에 감각의 시야가 좁아진 탓이다.

2. 대출받아 투자했던 주식 종목의 하락에 평단을 낮추고자 미수에 카드론으로 물타기를 시도하지만 오히려 더 큰 낭패를 본 사람은 손실의 위기 속에 선택의 시야가 좁아진 탓이다.

3. 새로 개업한 식당 매상이 오르지 않아 철마다 인테리어를 바꾸고, 여러 광고대행사를 통해 홍보해도 적자를 면치 못하는 까닭은 착각이 만든 위기 속에 분별의 시야가 좁아진 탓이다.

4. 매번 꼴찌로 게임비를 내야 했던 당구 부진아 관중이의 눈부신 활약은 예상 밖의 일이요, 경험하지 못했던 위기였다. 평소 별다른 전략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무너졌기에 별도의 맞춤 전략을 사전에 준비하지 않았던 친구들은 당황했으며 시야는 더욱 좁아졌다. 급조한 문구로 조롱하고, 기침하고, 담배 연기도 뿜어 댔지만 일찌감치 뱀파 내의 메인 타깃으로 욕 바기지로 먹어가며 이를 극복하는데 잔뼈가 굵은, 강한 내성의 관중이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 위기감은 커지고 시야는 더더욱 좁아졌다.


이와 비슷한 경향의 모든 심리 작용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의학용어가 있다.

바로 터널시야(Tunnel vision)다.

터널에 진입한 후 빛이 들어오는 터널 출구 방향에 시야가 몰림에 따라 어두워진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파악하는 능력이 저하되고, 이러한 생리적 특성이 위기 극복을 위한 판단에 영향을 미쳐 다각적인 분석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이는 카지노를 빈번히 드나드는 도박중독자들의 두드러지는 증상이자 오류로, 카지노에서 잃은 재산을 만회하기 위해 카지노에서 승부를 이어 나가며 위기에 위기를 더하는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습성으로 자리 잡았다.


핸드폰을 분실했다고 착각한 사람은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 매몰돼 평소 물건을 찾을 때 주로 이용하던 시각과 손발 촉각에 우선 의존했다. 즉, 분실의 터널에 진입한 이후 찾아야 한다는 출구의 빛만 주시한 체 시각과 손발촉각에 신경을 집중했다.

대출받아 주식에 투자했던 사람은 손실의 터널에 진입해 투자 종목 상승의 빛을 주시하며 해당 종목 물타기를 시도했고,

식당에 투자한 사람은 적자의 터널에 진입해 화려한 인테리어, 효율적인 광고를 통한 매출 신장의 빛을 주시하며 추가비용을 지출했다.

관중이 팀과 겨뤘던 4명의 뱀파 일당도 같은 처지

모두 위기의 터널에 진입한 이후 터널시야에 의한 단편적 판단의 희생자로 전락해 극복을 위한 실마리를 찾는데 실패했다.


다수가 겪는 이 심리적 증상을 위한 전문가들의 치료법은 간단했다.


'터널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독단에서 벗어나 긍정적인 사고를 지향하고, 판단을 유보하거나, 타인의 의견을 수렴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한다.'


말의 이해는 수월하나 막상 시도를 위한 계획을 세우자면 막막할 듯싶다.

이 책을 쓰게 된 의도에 맞게 과거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이 처했던 위기와 극복 사례를 통해 좀 더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숙지해야 할 지침부터 소개하면,


- 범위 확장과 접목

- 수단 변경

- 지역 변경

- 자체 신분제 폐지

- 내·외부인과 상의

- 대안책 모색 후 수치 비교

- 시뮬레이션 이후 업종, 업태, 시간 변경

- 출구전략


아래 내용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극복 사례에는 둘 이상의 지침이 복합적으로 사용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당구장에서 뱀파 간 방해 전략은 모두 테이블 주변 반경 2미터 내에서 이뤄졌다.

관중이게도 같은 방법을 적용했지만 워낙 무디고 무덤 한 녀석이라 통하지 않았다.

다행히 전략 범위를 확장하고 수단을 변경해 관중이의 멘털을 무너뜨린 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 유학원을 운영하며 유학 관련 카페들, 타 유학원들과 치열한 경쟁에 매출이 줄고 있을 때도 그랬다.

상담, 수속 대행, 정보 제공 업무와 같이 남들 다하는 똑같은 일에 아무리 오랜 시간을 쏟는다 한들 매출 하락을 멈추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업무 분야의 범위를 확장해 방문한 학생들을 위한 레벨테스트와 무료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첫 상담에 레벨테스트를 접목해 학생의 영어 각 분야별 실력을 인지시키고, 보완·발전에 필요한 과정과 그에 특화된 학원을 자연스럽게 추천하며 구체적인 상담을 유도했다. 부족한 분야를 수업으로 채워 학생들의 출국 전 불안을 해소하니 단순 수속 업무를 넘어 어학연수 전반을 아우르는 준비체계에 등록 학생의 수는 늘었고, 매출도 월등히 성장했다.


관찰 범위를 확장해 넓은 시야에 들어오는 새로운 수단을 찾고 기존의 방법과 유기적으로 접목한 결과다.


3. 오랜만에 만난 선배를 모시고 작은 동네에서 술집 하던 친구를 찾아갔다. 안주로 나오는 요리들이 맛있어서인지 유동인구 얼마 되지 않는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직장인 평균 월급 정도의 수입은 유지하는 친구였다. 세 아이가 커감에 따라 생활비는 늘고, 지금 버는 수준으로 감당할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염려했지만, 정작 뾰족한 대안을 강구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머물러 성장을 모색하고 있던 차에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주류유통업을 하던 선배와의 대화에서 희망을 찾는다. 음식 솜씨와 운영 능력, 성실한 자세가 통제변인이라면 유동인구 대비 손님 수를 따졌을 때 타 지역으로 이동이 더 나아 보인다는 조언. 직접 주류 배달차에 올라 거래처를 도는 일이 잦아 지리에 익숙했던 선배는 적당한 지역을 물색 후 추천해 주었고, 이를 대안으로 현재 운영 중인 가게와 각종 수치 비교를 거쳐 보증금에 대출을 더해 이전한 친구는 새 공간에서 영업을 재개하며 높아진 월세와 이자를 내고도 두 배 이상의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인사와 가벼운 대화 정도에 그쳤을 만남에서 친구의 상담 신청은 '이유 있는 지역 이동'이라는 선배의 조언을 낳았고, 미래의 치명적 위기를 사전에 타개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4. 도로 곳곳이 무릎 이상 잠기고, 일부 구간은 차로 이동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빌려준 돈을 회수한 후 영업시간 전까지 은행에 입금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 후배, 충직한 두 필리핀 여직원과 함께 백팩을 메고 회수한 현찰을 나눠 담은 뒤 함께 은행으로 가기로 했고, 여직원들이 아직 식사 중이어서 어쩔 수 없이 후배와 먼저 길을 나섰다. 로비로 내려가니 여전히 물바다. 높은 지대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에게도 재차 전화해 여부를 물었지만 이동불가하다는 답만 반복됐다. '신발을 벗을까 아니면 신고 갈까', '바지를 걷을까 아니면 그대로 걸을까'. 일의 중요성에 비하자면 지극히 하찮은 그 고민에 긴 시간 낭비한 뒤 물길을 헤치며 출발.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15분 이상 걸으며 온몸이 젖어 지쳐갈 무렵 뒤늦게 출발해 페디캡(pedicap)을 타고 이동하던 직원이 저 멀리서 우리를 부른다.



지프니와 더불어 필리핀 현지인들만 타는 교통수단, 후진국 교통수단 그리고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페디캡.

일방통행으로 복잡하게 얽힌 마닐라 시내 중심에서 집중호우로 한산해진 도로 위를 신호고 자시고, 일방이고 자시고 시원하게 누비는 페디캡 그리고 뽀송뽀송한 모습으로 우리를 향해 손 흔들던 두 필리핀 여직원. 돈 많으면 왕이라는 나 스스로의 신분제를 철폐하고, 도보에서 페디캡으로 수단을 바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매년 우기에도 난 뽀송뽀송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자존, 자만, 자부심에 의해 좁아진 시야.

작은 규모로 이사하고, 비싼 차 팔고, 팔 걷어 부쳐 직접 하며, 눈을 낮춰 살피면 방법이 보일 수도 있다.

쪽팔리다? 안 해서 망하면 제일 먼저 후회할 일. 망해보면 안다.


5. 같은 분야 사업자로서는 경쟁 상대였지만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원수였던 업체가 있었다. 사건 하나하나 늘어놓으며 각자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던 게 은연중에 험담이 섞였고, 그것이 돌고 돌아 상대의 귀에 흘러 들어가는 악화일로가 지속됐다. 불경기였던 시기에 더욱 격해진 감정. 그 무렵 대기업 교육 관련 계열사와 산업인력공단이 공동 주관하는 국비지원연수프로그램 입찰 소식이 전해졌고, 진행 업체 선정에 우리와 원수 업체가 우선 대상으로 올랐다. 서로 으르렁거리던 호랑이 두 마리 사이에 고기 덩어리가 놓인 격이었다. 뒤에서는 격하게 싸우다 대기업 담당자들 앞에서는 착한 척, 잘하는 척. 혈투와 고생 끝에 마침내 우리가 선정됐다. 대기업담당자들에게 고개 조아리며 상당 시간 소비했고, 캐나다 학교 관계자에게 어마어마한 접대비를 쓰며 재정 관리에도 소홀했던 터라 결과에 따라 사활까지는 아니어도 약간의 성장 혹은 빈곤으로 갈리는 기로에 선 입장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모집 인원은 배로 늘고, 1인당 수수료도 줄어 객단가 높은 본업을 제쳐두고 프로그램에 올인해야 하는 처지. 원수와 싸워 이기는 데에 집착한 나머지 산으로 가는 뱃머리를 돌리지 못했고, 그마저 물이 새 가라앉고 있는 실정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때마침 학생들 시험기간이 끝나 이제 막 상담이 몰리는 시기. 직원을 더 뽑아야 할지 아니면 알바를 구해야 할지, 항공권·유학생보험에 단체 할인을 요구해 수익을 늘려야 할지, 캐나다 학교 관계자 술 한 잔 더 먹여 커미션 인상을 부탁할지. 직원들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만 결국 제자리걸음. 답답한 마음에 친구를 불러 술 마시며 전후 사정 모두 토로하니 별거 아닌 일로 고민하고 있다는 듯 툭 내뱉는 친구. 


"처음에 말한 걔네랑 하면 되겠네"


그 한 문장에 답이 있었다. 좋지 않은 대인관계는 돈, 시간, 감정의 소비를 일으켜 위기를 키울 뿐.

증오의 불빛에 집중하는 싸움의 터널에서 벗어나니 절약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연락해서 만나 화해했고, 나눴으며, 차후 프로그램도 두 업체 주도로 사이좋게 진행할 수 있었다.


내부인과 외부인의 시각차, 그 중간 어딘가에 해법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고민의 어두운 교도소에서 벗어나 햇살 아래 외부인들을 만나자.


6. 1981년 부모님은 술장사를 하셨다. 아가씨 술집 혹은 방석집. 지금처럼 화려하게 치장한 룸살롱이 아니었다. 벌건 조명에 테이블 몇 개 있는 홀과 룸 2개. 손님이 차지하고 있는 동안은 room, 영업을 마치면 우리 가족 6명이 나뉘어 자는 안방, 작은방이었다. 인천 용현시장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던 우리 가게 그리고 우리와 비슷한 가게 몇 개. 시장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고, 그 영향 때문인지 더 이상 술장사로 별 재미 볼 수 없는 분위기로 흘렀다. 우리 가족에게는 위기. 어머니는 영업 전 한가한 시간에 도매상에서 토마토를 떼다 파셨다. 지극히 가부장적이셨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사를 포기하지 않으셨던 어머니. 아버지는 남자로서 체면을 지키려 하셨고, 어머니는 여자로서 새끼들 먹일 걱정으로 고집하셨음이 분명하다. 그를 닮아 내가 그랬고 서른 초반의 아버지가 그러셨으니. 그나마 작은 돗자리 크기만도 못한 길바닥 장사였던지라 리스크는 없었고, 가게 영업에 지장을 주는 일도 없다는 안도감에 부담 없이 시도하셨으리라. 점점 커지고 있는 시장 그리고 입구 부근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는지 토마토는 잘 팔렸고, 눈치 보고 계시던 아버지도 팔 걷어붙여 돕기를 작정하셨다. 사과, 배, 참외 등 품목을 늘리며 이른 아침 도매시장에 나가 물건을 봐야 했고, 이제는 토마토 한 대야 팔아 남는 금액에 불가한 술장사 매상은 외면한 채 두 분 모두 과일 장사에 전력을 다하셨다. 술집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아시고, 술집 업주들과 친분도 두터웠기에 작은 규모의 술집들 뿐만 아니라 카바레, 스탠드바라는 대형 무도 유흥주점들에까지 영업망을 확대, 네 명의 자식을 넉넉히 건사하셨고 이른 연세에 노후준비의 기틀을 마련하셨다.


본업에서 성과가 미진하다 하여 전격적인 변화를 모색하기보다 작게나마 시뮬레이션을 거치고 살피는 신중함이 필요할 때도 있다. 작은 지출이나 변화로 가능한 연관, 파생, 종속의 방편들을 우선 추구해 봄이 어떨지? 전체의 유연함은 작은 몸짓의 적응에서 비롯하니.


7. 주식단타로 하루 벌어 하루 먹던 친구가 있었다. 온라인 교육과 제약주 상당수 종목들이 그럴싸한 이유로 상승 중이던 코로나 초기. 하필 인기 있는 테마주 중 메인이 아닌 변두리 종목에 투자해 수익은커녕 연일 맥 못 추는 약보합에 살점 뜯겨 나가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10년 이상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운 후 아내에게 구걸해 얻은 천만 원 남짓의 자금으로 공부 삼아 시도한 주식에서 매일 1~20만 원 사이의 수익을 올려 키득거리며 인증하던 갓 태어난 작은 개미. 1~2%씩 떨어지는 약보합의 손실에 갓 태어난 작은 개미는 괴로워했다. 아내 몰래 돈 빌려 물타기를 시도했다가 '떨어지면 더 큰 손해'라는 두려움에 접고, 빼자니 오를 것 같아 그냥 뒀더니 더 하락. 채팅으로 대화를 주고받다 답답했는지 전화해서 묻는다.


"미치겠다. 어떻게 해야 되냐?"

"목표가 뭐야?"

"일단 본전 근처라도 가야지"

"그러다가 크게 떨어지면?"

"그러게. 어떡하지?"

"그냥 100만 원씩 여러 차례에 걸쳐 빼"


카지노에서 슬롯머신으로 돈 잃는 사람들의 시간대 별 심정에 빗대 설명하며 제시한 출구 전략이었다.

돈 따겠다고 달려든 슬롯에 한 장, 두 장 넣으며 손실은 점점 커지고, 빨리 만회하려는 조급함에 베팅금액을 올리며 본전, 아니 터지면 딸 수도 있다는 헛된 기대. 사업도 마찬가지다. 벌겠다고 차렸는데 적자는 복리로 커져 가고, 줄이기는 커녕 억지로 자금을 투입해 손실을 자가복제로 키우는 악순환의 고리. 터지라는 슬롯이나 매상은 터지지 않고 속만 터지더라.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시기를 앞당기고 손실을 줄이면 반 보 후퇴만으로도 2보 전진을 기약할 수 있다.




무협 판타지 영화, 게임이 끼친 영향 때문일까?

비책이 담긴 비단주머니를 얻어 극복하고 성공하려는 이들이 많다.

위인이나 재벌들은 그들만의 뭔가 다른 위기 대처 능력이 있을 거라 믿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 역시 손발로 움직이는 동물이요, 뇌로 사고하는 인간이다.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일상을 보내고, 우리가 그렇듯 생각하고 행동한다.

좀 더 생각하고 좀 더 행동하면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자기가 파서 들어갔 건, 남이 파서 밀어 넣었 건, 위기의 구덩이 안에서 좌정관천 시야로 허우적대 봐야 몸만 피곤하고 열패감은 커지기 마련.

다행히 생각과 목소리는 무형의 것이요 공간을 초월하니, 바깥을 떠올리고 바깥과 대화하자.

나를 구할 수 있는 동아줄과 사다리는 바깥에서 내려올 테니.






작가의 이전글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그 따위 디지털 품앗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