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생산활동 없이 정신 건강에 치중하며 소비만 하는 생활에 여기저기서 받았던 돈은 빠르게 줄어 결국 150만 원가량 남았다.
별 중압감은 없었다.
남들에게는 허송세월 보내는 한량으로 보일지언정 다시 살 작정으로 꾸준히 내재 가치를 키워 갔으며, 당장 작은 일로 연명하기보다 미래의 큰일을 계획하고 실현하기 위한 준비를 공고히 하는 날들에 충분한 보람을 느꼈기 때문이다.
일상의 루틴이 아닌 자기만족의 루틴을 유지하고 싶었다.
약제와 꾸준한 운동을 통해 몸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여러 분야의 공부와 글쓰기로부터 사건·사물의 현상과 작용에 관한 논리적 사고에 예전만큼 익숙해졌으며, 대인기피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다시금 관계의 폭을 넓혀 갔다.
붕괴된 기억을 완벽히 재건하는데까지 이르지 못했지만, 새로 저장한 정보를 동여매어 두는 기능은 원활했다.
재활을 넘어 발전으로 향하는 그 걸음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걸려 온 전화 그리고 달콤한 제안.
잘 나가는 토목회사 대표, C 사장님이었다.
"너 아직 거기서 그러고 있어?"
"네"
"그럴 거면 여기로 와. 가끔 같이 밥 먹고 일도 도우면서 아르바이트하면 되잖아."
그의 회사는 안양에 있었다. 지금 내가 지내는 곳의 열악한 상황을 따지자면 비교우위.
그동안 간간이 그의 해외 현장 관련 영문 번역이나 요약 등의 소일거리를 해주며 적절한 용돈을 받아 왔기에 그와 가까운 곳에서 지낸다면 더 많은 생산활동이 있을 거라 기대했다.
숙소를 정하기 위해 그의 회사가 위치한 평촌역 부근 숙박업소를 검색하는데 나오는 것이라고는 한숨뿐.
야놀자는 그야말로 노는 자들을 위한 앱. 꿈꾸는 자를 위해서는 아무 도움 되지 않았다.
계속 눈을 낮춤에 따라 시내를 벗어나 외곽으로 향하고, 교통비를 감안하자니 별반 차이 없었다.
그러다 잘못 클릭해서 넘어간 사이트, OO 고시텔.
2008년 처음 마닐라에 와서 십수 년을 살며 호텔에서 지냈던 기간을 합치면 7, 8년가량이었다.
그중 마지막 1년 이상 지냈던 마닐라 5성급 호텔과 비교하자면 고시텔은 스머프 하우스.
한 달 이용료는 50만 원으로 저렴했다.
그런데 막상 고시텔도 평가대상에 올려 놓고 보니 이젠 비용이 아닌 경험과 학습의 고려가 우선이었다.
"그래 한 번 가보자."
흥미진진하게 살고 싶어졌다.
잘 벌던 시절, 하물며 앵벌이들도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니는 마당에 그들의 재산상 대척에 있던 나는 굳이 명품을 사 입으려 하지 않았다.
갑자기 뭔가 먹고 싶다던지 이발을 해야하는 등 인근 쇼핑몰 갈 일이 생기면 겸사겸사 ZARA나 Calvin klein 같은 브랜드에 들러 어울리는 옷가지 대충 사 입거나, 후배들이 가끔 선물하는 명품 옷들을 거칠게 다뤄 몇 번 입지 못하고 버리는 무성의였다.
나를 거쳐 간 여러 손목시계의 평균 체류 기간은 고작 며칠. 그따위 감가상각의 사치품에 욕심 갖지 않았으며 차라리 그것으로 남에게 인심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차도 마찬가지. 이미 20대 후반부터 당대 최고의 국산 대형 세단을 몰아 봐서 별다른 호기심 없었고, 대중교통이 편리한 대한민국에서 굳이 불편하게 주차 장소를 찾아 헤매는 고생을 사서 하고 싶지 않아 지하철, 택시 조합을 선호했다. 물론 한국에서 지내는 날이 많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문제는 숙소였다.
최소한 지내는 곳만큼은 편해야 했다. 그래서 고른 게 호텔이었다.
청소와 빨래할 필요 없는 곳, 먹고 싶을 때 언제든 시켜 먹을 수 있는 곳에서 오랜 기간 살았던 부유의 타성.
한국에 돌아와 그나마 격을 낮춰 모텔 생활을 했지만, 이제는 그 욕심마저 버려야 했다.
새로운 삶을 경험하며 맞이하는 생활의 작은 긴장, 설렘을 느끼고 싶기도 했다.
미리 전화하고 적힌 주소로 찾아갔다.
고시텔의 텔이 무슨 뜻일까? 내 보기엔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치는 곳들과 다를 바 없는 그냥 고시원.
방을 정한 뒤 고시원 실장이 설명을 마치고 나가자마자 참았던 웃음이 터졌다.
"성냥갑 만 하긴 한데 있을 건 다 있어요"라는 실장의 표현에 과거 여성 로커 도원경 님이 부른 노래 제목 '성냥갑 속 내 젊음아'가 떠올라서였다.
그러다 잠시 후,
그로부터 의미 있는 의식의 흐름이 이어졌다.
'이 작은 공간은 성냥갑. 나는 이곳에 둥지를 튼 외로운 성냥 한 개비. 작은 시작이나마 여기서 지식의 불을 지펴 보자.'
잠시 후 C 사장님이 건물 앞이라며 내려오라 전화하고, 그를 만나 전기냄비, 옥수수 10개, 이마트 5만 원 상품권, 방울토마토, 참외, 먹어도 안 죽는다는 유통기한 지난 라면 열 개를 받아왔다.
당장 배고파서 끓여 먹어 봤다. 그리고 정말 안 죽었다.
참외는 칼이 없어서 껍질째 먹었고, 옥수수는 물에 넣어 끓인 뒤 물기를 닦고 먹었다.
전기냄비와 함께 하는 생활은 정말이지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시도하는 일들 하나하나에 터지는 웃음.
자기 연민, 우울함, 패배감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동선을 그려 열심히 걷다가 이제는 구간별 달리기도 섞어 보고, 책상과 판때기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녀석에 DIY 작업을 가해 인체공학적 다용도 테이블로 환생시킨 후 식사와 공부를 병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성장하고 있었다.
두 달이 되어 가던 날,
C 사장님이 셔틀 해주던 생필품과 식자재 등으로 비용을 아껴왔고, 드라이브 삼아 그의 강릉 현장을 따라가 산속 깊은 곳에서 뜻밖의 반나절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도 벌었지만, 다음 달 고시원비를 내면 고작 3만 원 남는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를 비참하게 여기지 않았다.
직업 소개 앱들을 뒤지며 우선 나의 객관적 가치를 인식하고 싶었다.
별의별 과장, 허위 모집 요강들을 구별하여 몇 곳에 지원하니 다음날부터 바쁘게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바라던 조건은 월급 300만 원, 주 평균 45시간, 가급적 원하는 시간에 업무 등이었다.
돈을 따지니 또 여유롭던 시절이 떠오른다.
필리핀에서 입던, 앞뒤 주머니 모두 헐거웠던 내 바지들.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비싼 술집을 드나들었으며, 늘 천 페소짜리 백 장, 10만 페소 이상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기 때문이다.
당시 10만 페소면 270만 원 이상의 금액.
과거 하루 술값이 이제는 한 달 목표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나를 비참하게 여기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게 도움 되는 일에 대입하며 걸려오는 전화의 회사, 업무를 따져봤지만 딱히 마음 가는 곳이 없었다.
현명한 결정은 여유로움에서 나온다는 나만의 믿음으로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래서 우선 임시로 결정한 일이 도보 배달이었다.
밥값 정도는 벌 수 있을 것 같았고, 걸을 수 있었으며, 근무시간이라는 얽매임이 없어 공부와 글쓰기를 해 나가기 충분했다.
사실, 결정적 이유는 '몸으로 하는 일'이었다.
SOUND BODY SOUND MIND를 철저히 신뢰했던 터였다.
돈으로 보자면 쿠팡 물류센터 일일 아르바이트였지만, 정해진 공간에서 종일 반복해야 하는 단순 육체노동은 정신적 창조 활동에 해를 끼치지 싶었다.
결정 뒤 후련하고 뿌듯한 기분으로 제일 싼 1리터 커피를 사 마시러 나가는 길에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형님! 어디 계세요?"
"안양 평촌역 고시원이다."
"거기서 뭐 하시는데요?"
"열심히 고시공부한다. 이놈아"
"참나, 하여간 이상한 양반이라니까. 내일 낮에 오토바이 타고 갈 테니까 드시고 싶은 거 정해 놓으세요."
나에게 몇 차례 고충을 안겼던 녀석이다.
금전사고를 포함한 크고 작은 피해를 끼쳤지만, 나름의 양심으로 여건이 허락하는 만큼 갚으려 했던 후배.
비교하자면 나는 안정적인 자리의 거상이요 그 녀석은 장소를 옮겨 다니는 보부상단이었지만, 같은 나이 직장인의 몇 배 이상 벌 정도로 준수했다.
약속했던 오후 1시에 맞춰 도착한 후배.
평소 겉치레에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던 친구였기에 세련된 디자인의 오토바이를 타고 올 줄 알았건만 막상 눈에 띄는 건 뒷자리의 배달통 그리고 목장갑의 시장점유율을 가뿐히 초월한 동일 목적의 3M 장갑이었다.
"큰 오토바이일 줄 알았는데 좀 작네?"
"아니 무슨 가스배달해요? 요즘은 다 이런 걸로 해요. 스쿠터라고 하지. 스쿠터 헤헤헤"
"크흐흐흐 미친놈."
"뭐 드실지 정하셨어요? 없으면 그냥 소고기 먹으러 가요."
"아니야 아니야. 나 진짜 먹고 싶은 거 있어."
"뭔데요?"
"홍콩반점 탕수육에 간짜장"
매번 그 앞을 지나며 군침 흘리게 한 그 메뉴
"와! 어이없네 진짜"
"왜?"
"천하의 미스터 O가 제일 먹고 싶은 게 고작 탕수육에 짜장이래. 참나"
"미친놈. 네가 알던 과거의 미스터 O는 죽었다."
홍콩 반점에서 음식이 나오자마자 정작 미친놈으로 돌변한 건 나였다.
정말 미친놈처럼 허겁지겁 처먹었다.
"와! 진짜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돼. 아니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거예요?"
입안 가득 음식물을 씹고 맛보고 즐기며 그저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 마시며 후배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했더니 도보는 말리는 눈치.
"형님! 저는 요즘 배민을 주로 하거든요. 가끔 쿠팡도 하는데 도보할 바에는 그냥 배민, 쿠팡같이 등록하고 자전거로 하세요."
말을 끝내며 준비했던 봉투를 내민다.
"이거 뭐냐?"
"50만 원이에요. 이걸로 자전거 하나 사세요."
늘 장난기 가득해서 지극히 가벼운 사람으로 보이는 녀석이었지만 남을 도우려는 결심에는 늘 사려 깊었다.
"와서 밥 사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돈은 무슨 돈이냐?"
"요즘 업체들 배달기사 영입 경쟁하느라 배달비 높아져서 괜찮게 벌고 있어요. 부담 갖지 말고 받으세요."
"그래 고맙다. 형이 받을게. 대신 예전에 남아 있던 계산은 다 잊고, 이 돈하고 성의는 형이 꼭 이자 쳐서 갚으마."
"아이고 형님!.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그걸로 된 거죠."
배달 기사들에게 점심 피크라 불리는 아침 11시부터 오후 1시.
당시 강남 지역 배달비와 그 녀석의 능력을 감안하자면 시간당 5만 원 이상은 능히 벌 수 있는 황금시간대였다.
나를 보러 오기 위해 그리고 50만 원을 쥐여주기 위해 서울 강남에서 안양까지 오가며 반나절 수익을 포기한 것이다.
바뀐 삶을 비관하지 않으며 당당히 살아가는 녀석.
나를 더욱 숙연하게 했다.
녀석을 배웅하고 고시원으로 돌아와 자전거 시세를 알아보고 배달 관련 카페들도 가입했다.
카페 회원들 글은 일반 자전거 보다 전기자전거가 빠르고 편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평지에서는 큰 차이 없지만, 언덕을 만나면 일반 자전거는 끌고 가야 하고, 전기자전거는 알아서 쳐주니 쉽게 오른 다나.
전기자전거 시세를 검색하니 50만 원으로는 턱도 없었다.
애매해졌다.
'운동 삼아 일반 자전거로 해야 하나? 아니면 전기 자전거로 빨리 해치우고 여가를 더 가질까?'
후배의 조언이 필요했다.
"OO아! 형이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일반 자전거는 언덕에서 끌고 올라가야 하고, 어떤 놈은 그러다 넘어져서 음식 다 쏟았다네. 여기 평촌은 언덕이 거의 없긴 한데 일반 자전거 새 걸로 살까 아니면 전기 자전거 중고를 알아볼까?"
"형님! 제가 아까 말씀드리려다 말았는데, 도보보다는 일자가 낫고, 일자보다는 전자가 낫고, 전자보다는 오토바이가 더 나아요."
"형이 지금 오토바이 살 돈이 어딨냐? 너 낮에 나 짜장면, 탕수육 눈 까뒤집고 먹는 거 봤지? 나는 지금 거지다. 거지 그 자체."
"형님 동생 있으시잖아요? 동생한테 빌리고 나중에 벌어서 갚으시면 되죠. 오토바이 432만 원, 거기에 딸통(배달통)하고 핸드폰 거치대, 블루투스, 보험 그런 거 다 합치면 750이면 돼요. 형님 오토바이로 하루에 6시간 배달하면 20만 원은 버실 테니까 한 달에 얼마씩 할부로 갚으시면 되죠."
"중고는?"
"참나, 그냥 새거 사세요. 일단 해보시면 아실 거예요. 제가 왜 이런 말씀드리는지"
"나 오토바이 한 번도 타본 적 없는데"
"아이고 형님! 자전거 탈 줄 아시죠? 2, 3일 연습하면 배달하실 수 있어요"
더 혼란스러워졌다.
다시 카페에 접속해 오토바이 위주로 검색해 본 결과 수도권에서 오토바이로 배달하면 초보는 시간당 평균 2만 원 이상, 상위 10%는 시간당 3~4만 원 이상 무조건 번다고 하는데......
지금껏 살아오며 새로 접한 모든 분야에서 누구보다 빨리 적응했고, 늘 상위 10% 내에 머물렀다.
중학교 시절 반 끄트머리 성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상위 10%로 끌어올린 경험으로부터 내가 거쳤던 모든 사업에서 그랬다.
그런 날 보며 머리가 좋다고들 하던데,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결심한 모든 일에 전력을 다했던 나다. 누구보다 오랜 시간 투자했으며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빠르게 적응해 실력 쌓으면 시간당 3만 원, 하루 7시간이면 한 달 630만 원. 집사람 명의 오피스텔에서 월세 170이 나오니까 생활비는 200만 원 정도 보내고, 내가 좀 불편하게 살면 오토바이 유지비 포함해 월 150만 원. 그래도 280 남으니 700을 빌려 매달 250씩 3개월 이자 얹어 갚으면 30만 원씩 저축도 가능하다."
오토바이 운전에 대한 불안과 위험이 우선 염려되긴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돈이었다.
'동생한테 부탁한다?'
생각만 해도 미안하고, 창피했다.
어린 시절에는 싸움 잘하는 형, 조금 커서는 공부도 잘하는 형, 어른이 돼서는 돈 많이 버는 형.
동생은 언제나 내 그늘에 가려 살았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거쳐 야간 전문대를 졸업하고 공장에 취직해 늦은 밤까지 일하던 동생.
벌면 버는 대로 쓰고, 뜯기고, 날리며 호화롭게 살던 형과는 달리 잔업을 자청하고 씀씀이를 줄이며 꾸준히 돈을 모아 송도에 집까지 분양받은 동생.
언젠가 어머님이 전화 통화로 말씀하신 적 있다.
"막둥이가 나중에 엄마, 아빠 모시겠다고 새집 알아보고 있단다."
바로 동생에게 전화했다.
"야! 너 그냥 편하게 즐기면서 살아 이 XX야. 형이 다 알아서 할라니까"
"나는 나대로 알아서 할 테니까 형은 형대로 해."
건방지게 비아냥거리는 형, 소신으로 살아가는 동생.
동생과의 과거를 떠올리니 창피나 수치심마저 내겐 오만이었으며 감당하기 벅찬 죄책감에 무척 괴로웠다.
밤새 전전반측.
다음날 일찍부터 밖에 나가 땡볕 아래 한참 걸으며 고민했다.
언제나 내게 차가웠던 동생.
죄스러움을 잠시 벗고 그 이유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긴 고민 끝에 결심했다.
그날 저녁 동생에게 전화해서,
"형이야."
"어! 형 잘 지내?"
"아니. OO야! 형 망했다."
"......"
"형이 잘못 살았다. 망하고 나서 남 탓하면서 지냈더니 몸은 심각하게 안 좋아지고 더 괴롭기만 하더라. 형 힘들게 한 번 살아보려고. 오랫동안 편하게 지내서 그런지 많이 건방져졌어. 안 해 본 일하면서 인생 공부한다는 각오로 1년 정도 오토바이 배달해 볼 생각인데......"
진심과 각오를 그대로 전했다. 그리고 동생의 질문을 기다렸다.
뭔가 묻는다면 그에 대해 진심으로 답하려고 했건만,
"알았어. 형"
질문이 아니었다. 의도를 파악하고 1초의 지체 없이 바로 승낙의 답을 주는 동생.
"카드 번호 불러줘야 하나? 아니다. 내가 내일 카드 가지고 갈게. 형 어디야?"
참 다행히도 인간의 눈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 눈물은 감출 수 있었지만 목멘 소리는 감당하기 힘들다.
전화기 종료 버튼을 누르고, 심호흡 몇 번에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른 뒤 다시 전화했다.
"형이 잘못 눌러서 끊겼어."
"그래. 내일 어디로 가면 돼?"
"여기 안양 평촌역이야."
"잘 됐네. 우리 공장 시흥이니까 가까울 거야. 내일 끝나고 갈게."
다음날 동생이 왔다.
동생은 채권자의 거만한 태도도, 가르치려는 선생의 위상도 아니었다.
유치원에서 놀이동산으로 소풍 갔을 때 아이들 앞에서 만화영화 천년 여왕 주제곡을 불렀다던 어린 시절 동생, 내게 예전 그대로인 내 동생 모습이었다.
꼭 갚으라는, 열심히 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날 걱정하는 말뿐이었다.
"형, 다치지만 말고"
"그래. 형이 조심히 탈게."
"자! 이거 받아"
오만 원짜리 뭉치였다.
"아니야. 엊그제 후배가 찾아와서 50만 원 줬어. 당분간 이걸로 살면 돼"
한참을 실랑이했다.
"알았어. 혹시 나중에 필요하면 얘기해. 내가 계좌로 보내줄게"
"그래. 그럴게."
"갈게 형!"
"그래 조심히 가!"
동생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그러면 당장이라도 울컥 올라올 것 같아서.
방으로 돌아와 멍한 채로 한동안 보냈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제부터는 모든 감정이 사치다. 결심한 대로 그냥 열심히, 재미있게 살아보자.'
다음날 후배가 소개한 서울 언주역 인근 오토바이센터로 갔다.
"안녕하세요. OO 선배 OOO라고 합니다."
"아! 그분이시구나. 얘기 많이 들었어요. 술값으로 수십억 쓰고, 대학원도 나오고, 외국어도 잘하시고, 대단하신 분이라고."
잊어야 하는 어리석은 과거, 이제 내게 아무 가치 없는 이력.
어차피 헬멧 쓰고, 배달통 달린 오토바이에 앉으면 one of 딸배일 뿐.
대답 없이 그냥 웃고 말았다.
값을 치르고 며칠 후 센터에 오토바이가 도착했다.
사장님 지도를 받으며 센터 주변을 몇 바퀴 돌고, 어느 정도 적응했다 싶어 혼자 넓게 돌기를 반복했다.
코너를 돌 때마다 위태롭긴 했지만 이 역시 금세 극복했다.
한 시간가량 돌고 계기판을 보니 어느새 주유 등이 들어와 좀 전에 지났던 큰길 우측의 주유소로 가기 위해 골목을 돌았다.
다시 큰길을 따라 살짝 경사진 주유소 입구를 지나고 미끄러운 바닥에 오르는 순간 뭔가 불안하다 싶더니 핸들이 틀리며 균형을 잃었다.
찰나 스치는 생각,
'동생이 사준 새 오토바이에 작은 흠집이라도 생기면 안 된다.'
바닥에 닿기 직전 왼손으로 땅을 짚고, 쓰러지는 오토바이를 몸으로 막았다.
고스란히 느껴지는 130kg의 무게.
급히 달려온 주유소 직원과 함께 오토바이를 일으켜 세우고 넘어진 면의 각 부위를 살폈다.
아무런 흠집이 발견되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직원이 소리친다.
"어! 사장님! 피 많이 흐르는데요?"
피가 나는 게 아니라 피가 흐른다고 했다.
고개를 숙여 몸을 훑으니 왼쪽 팔꿈치에서 흐르는 엄청난 양의 피. 그제야 가치 비교에 밀려 무의식에 머물러 있던 온몸의 큰 고통이 몰려왔다.
많이 아팠다.
내 인생에 손꼽히는 고통. 까짓것 괜찮았다. 어쨌든 오토바이는 무사했으니.
내가 바라는 목표의 실현을 위해 발생하는 기회비용, 기회손실 따위에 늘 담담했던 사업가 아니었는가?
과거의 습성을 버려야 하는 실패자로 전락했다 한들 내 성공의 기반 요소들은 살리고 지켜 나가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법.
주유하는 동안 직원이 준 휴지로 피를 닦고, 경각심을 잃지 않기 위해 고이 접어 시트 밑에 보관했다.
센터에 돌아가니 상처를 본 사장님과 부장님이 놀라며,
"괜찮아요? 어쩌다 그런 거예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면 절대 안 돼요. 사고 나거나 넘어진다 싶으면 무조건 오토바이 버리고 빠져나와야 해요."
그 일이 있고 일주일 후였나?
하루 종일 비 많이 내리던 그날,
빗물에 젖은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한 번 그리고 마지막 배달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또 한 번 넘어졌지만, 그때마다 난 몸으로 오토바이를 막았다.
내 동생이 사 준 새 오토바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