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와 융의 심리학에 대해
한 남자와 여자가 세 번을 ‘우연’히 만난다면 그 두 사람은 ‘필연’ 혹은 ‘운명’이라 할 수 있을까?
영화 『세렌디피티』는 그렇게 시작한다.
크리스마스이브, 뉴욕. 인파가 몰린 백화점에서, 조나단과 사라는 같은 장갑을 사려고 동시에 손을 뻗었다. 그들의 첫 만남은 계산되지 않은 충돌, 그저 우연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서로를 알던 것처럼, 단 한 번의 만남은 도시의 불빛처럼 반짝이는 설렘으로 번져갔다. 조나단은 그 순간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듯, 조심스레 그녀에게 연락처를 물었다.
우연보다 운명을 믿는 사라는 “만날 운명이라면 만나게 되어 있다.”라며 가벼운 키스를 남기고 가버렸다. 그런데 정말 운명이었을까. 조나단과 사라는 각자 흘리고 간 목도리와 장갑을 찾아 다시 카페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시 마주쳤다. 기억하듯, 마주하듯.
두 번째 우연에 조나단은 안달이 났다. 조나단은 집요하게 사라의 연락처를 요구했고 사라는 한 장의 지폐를 꺼내 조나단에게 연락처를 적으라고 시켰다. 그는 숫자를 적었다. 사라는 아무 말 없이 지폐를 챙겼다. 그리고는 근처 가게에 들어가 사탕 하나를 사버렸다. 지폐는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세상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조나단이 놀라 묻자, 사라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이 지폐가 나에게 돌아온다면, 그때 연락할게요.”
조나단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도 당신의 연락처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줘야죠.”
그러자 사라는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낸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초회판이다.
그녀는 책 표지 안쪽에 이름과 번호를 적었다.
“내일 아침, 이 책을 중고서점에 팔 거예요. 당신이 이 책을 찾게 된다면 그때 연락해요.”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에요.”
조나단은 투덜거렸다.
사라는 마지막 제안을 한다. 그를 데리고 호텔로 갔다.
“우리 각자 다른 엘리베이터를 탈 거예요. 같은 층에 동시에 도착하면, 그게 운명이라는 신호인 거죠.”
그렇게 그들은 각자 우연히 23층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 순간은 마치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조나단의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멈추고 한 아이와 그의 아버지가 탔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마구 누르는 아이의 장난으로 기회는 지나가고, 둘은 그렇게 엇갈린다.
아이는 장난의 신인가. 아니면 운명의 익살맞은 대리인인가. 인생이란 종종 가장 중요한 타이밍에 등장한 가장 하찮은 변수에 의해 뒤틀리고, 멈추고, 멀어지는 것이다.
그날, 두 사람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서로를 세상 속에 던져두고 떠났다. 다시 만날 운명이라면 수수께끼 같은 지폐 한 장과 책 한 권이 그들에게 ‘우연한 행운’을 선물해 줄 수 있을까. ‘운명’ 혹은 ‘필연’이란 연속된 우연에 의미를 부여한 것일까. 영화 속 사라는 말한다. 결정하는 것은 우리지만 운명이 보내는 계시를 잘 읽어야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이 영화의 제목 세렌디피티는 ‘우연한 행운’을 의미한다. 융의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싱크로니시티(synchronicity)’라 부른다. 인과관계없이도, 의미 있게 연결된 사건들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즉, 의미 있는 우연이란 뜻이다. 비유하자면 세상이 나에게 말을 거는 방식, 무의식이 현실과 조용히 손을 맞잡는 순간을 뜻한다.
타로는 ‘싱크로니시티’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타로를 펼칠 때마다 유독 자주 마주하는 상징이 있다. 나는 78장의 카드 중에 ‘은둔자’ 카드를 자주 뽑는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그 빈도와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그 반복된 우연 속에서 나는 의미를 찾았다. 나는 은둔자처럼 어두운 세상을 작은 등불로 밝히며 홀로 미션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언젠가, 용하다는 보살을 찾아 사주를 본 적이 있다. 보살은 내게 ‘천파살’이 있다고 했다.
“천파살이요? 그게 뭔데요?”
“하늘에서 내려온 파동 같은 기운이야. 고독하게 살 팔자라는 뜻이지. 혼자 있어야 힘이 생기고, 괜히 남 따라다니면 운이 새.”
순간 불현듯 타로 카드 속 ‘은둔자’가 떠올랐다. 혼자 등불을 들고 길을 걷는 그 이미지. 보살이 설명한 천파살과 내가 자주 마주했던 은둔자의 상징이 묘하게 겹쳐졌다. 그건 단지 미신이거나 점괘가 아니라, 내가 오랜 시간 동안 직감하고 있었던 ‘나라는 사람의 방식’을 누군가가 다른 언어로 짚어준 것 같았다.
MBTI 테스트를 할 때도 그랬다. 나는 INFP로 나왔고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내가 INTJ라고 한다. 더구나 챗GPT 또한 내가 INTJ라고 해서 곰곰이 따져봤더니 나는 INTJ가 맞았다. 내가 아는 나와 외부에서 보는 내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외부의 시선이 더 정확한지도 모른다.
나는 INTJ - 전략적 은둔자다. 조용히 내면을 탐구하며, 큰 그림을 보는 전략가, 타인의 의견보다 자신의 내적 기준을 신뢰하는,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지혜를 얻는 수단으로 여기는 은둔자. 그렇다면 은둔자의 등불은 INTJ의 통찰력과 미래지향적 비전에 대한 상징인 것이다.
나는 타로가 좋다. 타로는 어린 시절부터 따라다닌 꼬리표, “나는 왜 남들과 다를까?”에 대한 답을 주었다. 타로는 단지 미래를 예측하는 도구가 아니라, 나에게 ‘이해’라는 이름의 위로를 준 첫 번째 상징 언어인 것이다. 타인은 나를 낯설게 느꼈고, 나조차도 스스로를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타로를 접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세상과 나 사이를 잇는 비유와 상징의 다리를 건넜다.
그렇게 나는 타로를 통해 현실 속에서도 의미 있는 우연-싱크로니시티를 찾고 패턴을 연구한다. 당신은 반복해서 마주치는 상징이 있는가? 우연이라고 지나치지 말고 그 상징이 지금 당신의 무의식이 건네는 메시지는 아닐까 생각해 보길 바란다. 세상이 흔들릴 때, 나만의 리듬으로 걷고 싶다면 타로는 그 여정을 함께 걸어주는 조용한 등불이 되어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