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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리 Sep 12. 2024

그 남자 시작 -상-

사랑에 빠지는 찰나 

제가 그쪽이 불편한 이유를 알겠어요,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요? 안광이 없어요. 

머리를 감다가 문득 일주일 전 소개팅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분에게는 죄송하게도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문장만은 또렷하게 기억났다. 

 그 이후로 면도를 하다가도, 지하철에서 얼핏 보이는 내 모습에도 자꾸 눈을 확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분에게는 공감하지는 못했다. 내가 보는 내 눈 안에는 작은 빛이 있었다.


머릿속에 안광에 대한 생각이 계속 머무는 것 빼면 평소와 똑같이 지내고 있었다. 집에 가고 싶다고 속으로 염불을 외우면서도 주어진 일은 열심히 했다. 담배나 한 대 피우러 나간 흡연구역에서 그녀를 봤을 때, 뭔가 답을 찾은 듯했다.


- 박팀장님! 


나를 올려다보며 슬며시 웃는 그녀의 눈에는, 세상 모든 밝은 것을 담은 듯한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 어... 안녕하세요.

- 저번에 소개팅하신 건 잘 안되셨나 봐요?

- 예, 대차게 까였어요.

- 이유 물어봐도 돼요?

- 아..


정말 하찮고 말도 안 되는 이유인지라 말해도 될까 말까 고민하려던 찰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갑자기 입이 움직였다.


- 안광이 없대요.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런 이유로 차인 사람은 없을 정도로 독특한 이유긴 하지만, 너무 오래 웃으니까 이게 그렇게까지 웃긴 이유인가 자꾸 의구심이 들었다.


- 안광이 없대요? 

- 그런 의미에서 오팀장님, 제가 안광이 그렇게 없습니까?

- 아닌데. 박팀장님 되게 반짝반짝한데.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머리 위로 햇살이 비친다. 적어도 이 순간에는 당신의 머리가 더 빛나는데 누가 누구 보고 빛난다고 하는 건지, 피식 실소가 터졌다.


- 못 믿어서 웃으시는 건가? 

- 솔직히 네. 이유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반짝반짝하다는 단어를 저랑 연관 짓는 것도 웃겨서요. 


그녀는 살짝 미소 짓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진짜 안광이 있다는 건 저런 거구나 중얼거리는 타이밍에 메시지가 하나 왔다.


「반짝반짝한 이유 듣고 싶으시면 오늘 저녁 어때요?」




 회사 근처 고깃집에서 시시콜콜한 회사 이야기로 한 점, 요즘 대단하다던 오팀장님의 신입사원 이야기로 한 점, 회사의 앞날을 위한 한 잔.. 정작 하려던 이야기는 못하고 둘 다 기분 좋게 취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하던 일 이야기를 잠깐 걸으며 마무리하고 가려던 그녀를 붙잡은 건 나였다. 


- 반짝반짝. 이야기 안 해주셨잖아요.


그녀는 나를 보더니 또 웃었다. 그럼 간단하게 한 잔 더 할까요?라는 말과 함께 조금은 시끌벅적해 보이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구석에 바테이블밖에 자리가 없다고 해서 나갈까 고민하는 사이에 그녀는 자리를 잡았다. 내가 반짝반짝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니, 아직은 술기운이 부족한 것 같아 소주를 계속 마셨다.


- 박팀장님은 일할 때 제일 안광이 빛나요. 

- 네?

- 일할 때 제일 눈이 빛난다고요. 세상 권태로운 표정으로 세상 열심히 일하시잖아요.

- 아.. 그냥 일 빨리 끝내고 집 가고 싶은 직장인일 뿐인데요.

-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그러면서도 열심히 일하고, 더 잘하려고 노력하고, 성과 나오면 누구보다 좋아하시잖아요. 

- 그건.. 노동의 대가를 받으니까?

- 그렇게 스스로 생각을 제한하니까 다들 당신의 빛나는 모습을 모르는 거 아니겠어요.

- 근데 팀장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 나는.. 당신을 지켜봤으니까?


그녀가 살짝 웃고 남은 술을 들이켠다. 술집이 시끄러워서 그런가 그녀의 이야기를 잘 들으려고 점점 더 다가갔는데, 좁혀진 건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었나 보다.


- 그럼 저는 사람을 볼 때는 안광이 없나요?

- 아뇨.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볼 때는 빛나죠.

- 그게 누군데요? 

- 일단 팀원들? 그리고 박팀장님 동기 볼 때도 아주 조금은 빛나는 것 같고. 스스로 거울 볼 때도 조금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 어.. 맞아요. 아주 작은 빛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 그럼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그만큼만 좋아하나 봐.


 그게 뭐예요,라고 피식 웃었다. 나도 몰랐던 나를 이렇게나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랍고 생각보다 재밌어서 계속 더 듣고 싶었다.


- 진짠데. 안광이라는 게 왜 빛나겠어요. 무언가를 열중해서 보고 애정이 담겨있으니까 그만큼 잘 보려고 눈썹에 힘주고 눈꺼풀에 힘주니까 빛나는 거지.


 그녀가 눈썹을 추켜올리거나 눈꺼풀에 힘을 주면서 말한다.  본인만의 안광학을 주절주절 떠드는 그녀의 목소리를 더 들으려 다가갔다. 분명히 엄청 시끄러웠는데, 갑자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냥 눈앞에서 떠드는 사람에게 조금 더 집중하고 더 듣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정신 차려보니 그녀에게 거의 기댈 만큼 다가가있었다. 조금은 멀어지려고 하는 그때, 그녀가 내 미간을 찌른다.


- 지금도, 빛나잖아. 눈부실만큼.


그녀의 입술로 내 입술을 포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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