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명언이라고 느낍니다. 기사는 언론인의 입장에서 자살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극단적 선택이라고 표현하지 말고 다른 용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극단적 선택이라고 표현하면 마치 누구나 자살을 자기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길 수 있기 때문이라며 말이죠.
하지만 제게 가장 크게 다가온 문장은 “세상에 개인적 자살은 없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자살 생각자는 스스로 지옥에서 못 벗어난다.”입니다. 아주 공감이 가는 문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초등학생 때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시험 점수가 터무니없이 떨어져서 비교적 모범생이었던 당시의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죠. 엄마에게 점수를 내밀면서 죽고 싶다고 말했다가 같이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엄마 덕분에 시험 점수는 죽고 사는 문제와 비교할 수 없다는 걸 배웠죠.
그 뒤로는 신앙이 굳건해지면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죽음을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한번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계속 그 생각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조언이나 책을 통해 얻는 조언도 거부하게 되지요.
저출산으로 국가 비상사태가 된 지금도 하루 평균 3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2021년 1만 2252명, 2022년 1만 3352명, 2023년 1만 3770명, 매년 늘어납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가 된 것이 19년째 연속이라고 합니다.
제가 사회적인 이슈 중에서 관심이 가장 큰 것 두 가지가 자살과 장애인 문제입니다. 자살은 그 생명이 사회에서 그 순간의 어려움을 참아내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많은 가치를 세상에 표현할 수 있을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아주 큰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의 자살일수록 더 큰 손해입니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들이 그 사람의 손에서 나타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세상에 내놓기도 전에 미리 목숨을 손절해 버리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사회에도, 국가에도 아주 큰 손해입니다.
자살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야 합니다. 가장 쉽게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세상에 대한 흥미, 관심이 아닐까요? 관심이 생기면 그걸 더 알아보고 싶고, 그러자면 살아남아 시간을 들여 더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취미가 될 수도 있고, 운동이 될 수도 있으며, 사람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잘 모르겠으면 일단 대형 서점에 찾아가 보세요. 제목만 쭈욱 살펴보면 내가 어떤 분야에 흥미를 가질 가능성이 있는지 찾을 수 있습니다. 관심이 가는 책의 제목들을 모아보는 거죠.
세상은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당신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온 우주가 아무 이유 없이 당신을 세상에 보냈을 리가 없어요.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데. 영혼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데. 절대로 이유가 없을 리가 없습니다.
오늘의 질문: 살아오며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다시 살 힘을 하늘이 내려주시길.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당신도 그러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