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은 글들이 내게 남긴 것

사라진 2년, 쓰지 않은 글이 남긴 공백

by 흐눗

런던에 다시 입성한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회사 메신저(Slack)에 내 이름 옆으로 일주일이나 붙어 있던 “2years” 뱃지를 보니 왠지 부끄러웠다. 2년이나 됐는데도 남들이 “왜 아직도 그렇게 일하냐” 하고 면박을 주는 건 아닐까, 혼자 노심초사했다. 거의 사람을 핍박하다시피 굴리는 회사에서 2년을 어떻게 버텼는지 스스로도 놀라웠다.


그동안 글을 쓸 기력도, 마음도 없었다. 써서 뭐하나 싶었다. 남들이 읽어주지 않는 글이라면 가치가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옛글을 마주쳤다. 정리도 안 된 엉망진창 글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꽤 마음에 들었다. 오래전에 잊어버린 감정과 사건들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떠올랐다. 기록하지 않았다면 영영 사라졌을 순간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고려시대 문화유산을 발굴한 기분이랄까. 이렇게까지 일기조차 제대로 쓰지 않고 2년을 보내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제야 글을 쓰는 이유를 깨달았다. 글은 미래의 나에게 오늘의 복잡다단한 마음을 기억하게 해 주는 유일한 장치였음을.


벌써 5~6년 전의 인터뷰 글이나 몇 년 전 헤어짐의 기록들을 읽어보니, 지금 내가 기억하는 감정이나 사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세세한 마음들이 켜켜이 남아 있었다. 그때의 좌절이나 기쁨, 아쉬움, 실제 사건들이 다시 펼쳐지니 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글로 토해내지 않았다면 왜곡되어 버렸을 기억들이 자세히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글을 쓰지 않은 지난 2년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것 같다. 물론 사진이나 유튜브 비디오는 남아 있을지 몰라도, 내 속내를 친절하게 드러내는 글은 어디에도 없다. 큐티책에 휘갈겨둔 메모 몇 줄 빼고는 내가 무엇에 괴로워했고, 무엇에 감사했는지 더는 알 길이 없다.


나는 늘 공개 글이 부담스러웠다. 편치 않은 마음으로 쓴 글들이 반응이 없으면 “역시 내가 그렇지” 하며 자책했다. 몇 번이나 다시 쓰고 고치느라 시간만 많이 들었는데, 그래봤자 교정도 잘 안 되고 심란한 때가 많았다. ‘일기를 쓸 거면 그냥 구글 Docs에 쓰면 되지, 왜 굳이 공개하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정작 중요한 건 그저 기록을 남기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작가도 아니고, 나를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인데 뭐 그리 심각하게 생각했던가. 아무도 부담을 주지 않았는데, 없는 눈치를 스스로 만들어내다가 결국 흥미를 잃었고, 내 기록도 기억도 사라져 버렸다.


최근 친오빠가 Thread에 매일 여러 편씩 글을 올리는데, 그게 굉장한 영감이 되었다. 담백하고 솔직한 글들이 재밌었고, 오빠의 심정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라 왠지 고마웠다. 타국에 산 지도 오래라 1년에 두세 번 길게 만날 기회밖에 없는데, Thread를 통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게 되니 참 좋았다. 꾸준히 글을 쓰는 모습에 존경심이 차올랐는데, 이제는 책까지 내는 멋진 작가가 되었다.


그런 오빠를 보니, 내가 왜 그동안 글을 쓰지 않았는지 아쉬움이 크게 밀려왔다. 그냥 편하게 주절주절 털어놨더라도, 나에겐 벅찬 의미가 되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지난 2년이 못내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회사에서의 자잘한 대화들, 그날그날의 마음, 오늘 나탈리아와 나눈 깊은 이야기, 그리고 30대 마지막 문턱에 서 있는 이 순간까지 차곡차곡 기록하고 싶어졌다.


이제는 부담 갖지 않고 그냥 줄줄 써 내려가야겠다. 런던에서 사는 이 삶이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시간이 흘러 이 글을 읽으며 “그때 그랬구나” 하고 눈가가 촉촉해질 날이 오겠지. 나를 위해 글을 쓰자. 더 진솔하게, 더 용기를 내서.



2025년 3월의 런던아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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