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간실격
박홍성 감독은 김지혜 작가의 인간실격 시나리오가 하나의 시집 같았다고 했다. 16부작 드라마로 이미지화된 작품은 담담하게 꾹꾹 눌러 담은 감정선이 끝까지 터지지 않고 잔잔하게 흘러갔다. 배우들의 내레이션으로 읊조리는 대사 하나하나가 시였다.
그곳에 마흔이 되도록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며 우울증과 상실감에 빠져 있는 아내를 둔 정수가 있었다. 그의 직업은 백화점 식품관 팀장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크게 소리 내 화를 내지 않았다. 스스로 첫사랑을 잊지 못한 죄인이라며 속죄의 대가로 모진 환경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사랑을 원했다. 자신의 아내에게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지만 어딘가 뻥 뚫린 가슴은 수만 가지 바람이 들락거리며 쉐에액 낮고 작은 소리를 냈다. 정수는 그 소리를 애써 모른 척했지만 몸으로 전달되는 떨림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정수의 아내 부정은 아이를 유산하고 직장도 잃으며 삶의 동기까지 휘발된다.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되고 싶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된다. 자신이 그토록 힘들게 일과 사람에 집착해왔던 것은 삶은 무엇이라도 실체를 만들어서 스스로 증명받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부정은 자신의 불행한 상황을 인간으로서의 실격이라고 받아들였다. 인간실격. 가치 없는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의지는 자살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패하고 그와 함께 죽고자 했던 자살카페 회원들의 실제 죽음 앞에서 그녀는 더욱 초라해졌을 뿐이다. 그런 도중 부정은 심부름 대행 업을 하는 호스트 바 출신의 강재를 만난다. 얼핏 둘의 만남은 실격 처리된 선수들의 인정받지 못할 활동처럼 보이지만, 이 드라마가 이끌어가는 섬세한 묘사와 대사 그리고 배우들의 표정과 행동을 통해 인간은 결국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그들 또한 외롭고 처연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공감을 하게 된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 이혼한 후배 남편을 사랑한 약사. 역할 대행 서비스를 하는 아이돌 여자와 피시방 아르바이트로 하루를 견디는 취준생. 남편을 잃고 막노동부터 시작해 건물주가 된 여인. 겨우 딸 하나 키워내고 가진 것 없이 치매에 걸린 남자. 오랜 간병 끝에 남편을 잃고 병원에서 만난 간병인과 결혼한 여자. 이 독특하고 새로운 인물들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