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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ypyo Feb 15. 2022

직감이 믿음을 지배할 때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말해 주지만, 우리는 아주 조금만 알 따름이다. 또 만일 우리가 얼마나 많이 모르는지 망각한다면, 엄청나게 중요한 많은 일에 무감각해지고 만다. 다른 한편 신학은 사실상 무지의 영역까지도 안다는 독단적 믿음을 이끌어 냄으로써, 우주를 향한 일종의 주제넘고 오만한 태도를 양산한다. 생생한 희망과 공포 앞에서 맞닥뜨린 불확실성은 고통스럽지만, 위안을 주는 동화에 의지해 살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그러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을 망각해서도 안 되고, 철학적 질문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답변을 찾았다고 자신을 설득해서도 안 된다. 확실한 진리는 없다고 주저하며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지 않고 의연히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철학이 지금도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 <러셀 서양철학사> 중


*


삶이 뒤틀려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존재에 대한 의문, 그로 인해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삶. 사유는 배부른 자의 사치일 뿐이고, 생활전선 가까이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사람들에게는 비웃음의 대상이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고통의 한가운데 들어서 온몸으로 그것을 받아내는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바로 존재의 이유였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나는 어디서라도 무너질 것이 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고 다양한 경험을 할수록 프레임에 갇히는 것을 느꼈다. 경험이 사유를 절대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에 나는 좀 더 깊은 사유를 하기 위해서 명상을 시도하고 글을 썼다. 그런 세월을 거친 나에게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이다. 굳이 덧붙인다면 ‘진리는 없다고 주저하며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지 않고 의연히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는 것이다.  



작가 룰루 밀러는 동성애자이다. 직업은 과학 PD이자 작가이다. 30대 초반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Why Fish Don’t Exist>를 펴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다소 신화적인 제목이 눈길을 끌지만, 이 에세이는 아주 현란한 사유의 여행을 제공한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그녀의 선택은 탐구였다. 과학도로서 그녀는 스탠퍼드 대학 초대 총장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조사한다. 그는 분류학자였고, 세상에 알려진 어류의 20%를 그가 명명했다. 그녀는 그가 어떻게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을 법한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하면 그토록 사회적인 성공을 유지하며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을까 답을 찾고 싶었다. 그를 통해 의미 없는 삶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자 했다.


하지만 이후 그녀가 알게 되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유럽을 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던 우생학이 그로 인해 넓게 퍼졌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유럽이 아닌 미국이 우생학의 발원지였다니.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직감적으로 인류가 가장 월등한 존재라는 전제를 두고 모든 생물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고정된 시각은 물에서 사는 생물은 모두 어류라고 분류했다. 어류라고 분류했다니. 그렇다면 어류가 아니라는 말인가. 바로 그렇다 형질을 분석해 진화론적으로 분류체계를 연구하는 분기학에서 어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분류체계였다.


담수에 사는 폐어는 소와 닮았다. 심장이 심방과 심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겉보기와는 달리 속은 포유류와 닮은 것이다. 물에 산다고 모두 같은 분류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컨대 산에 사는 양, 소, 말, 사람을 같은 분류에 넣는 꼴이라는 것이다.


룰루 밀러는 여기서 아주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삶에서 물고기가 사라진 것이다. 지구가 우주 중심이 아니라고 했던 코페르니쿠스와의 발견과도 맞먹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에게 이 사실은 세상에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경계가 없고 더 풍요로운, 아무런 기준선도 그어지지 않은 그곳”을 여행하기로 한다.


들뢰즈는 세상에 놓여 있는 경계를 점선으로 두고 언제든지 유기적으로 변할  있다고 했다. 개체는 특정 형질의 동일성을 두고 정의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변 사물과 어떤 관계를 두고 있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했다. 룰루 밀러는 이러한 것을 깨달은  같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이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세상은 신비로 뒤덮여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특정 언어와 개념으로 세상을 가두어버린다면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돌이킬 수 없는 폐단을 저지를 수도 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꽃을 사랑하는 소년에서 우생학을 지지하는 과학자가 되기까지의 삶의 여정에 이러한 사실이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지 않기 위해서 혼란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주어진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재정의하고자 한다.


*


블록체인, NFT, 메타버스, 팬데믹 등 사회는 변화고 있다. 변화에 수반되는 것은 갈등과 대립이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틀에 갇혀 가능성을 닫아 버린다면 우리는 우생학을 받들어 불임화 수술을 자행하여 우수한 유전자를 보존한다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진화는 다양성을 기반으로 변종에 의해서 진행된다.


과학적 지식으로 미지의 세계를 일반화하고, 종교적 신념으로 무지를 덮을 때 우리는 실수를 범한다. 우리는 욕망하며 세상은 운동한다. 그 안에 놓인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만물 또한 마찬가지다. 일반화, 동질성을 부여하는 행위는 기준을 만들기 때문에 전체주의적이고, 폭력적이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우리가 함께 하는 이유는 다양한 의미에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특정 형태로 유효하다.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면? 새로운 환경에 직면한다면?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에게 물고기가 사라진다면? 무엇이 달라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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