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ypyo Apr 25. 2024

자기혐오를 사랑한 남자

[넷플릭스] 베이비 레인디어

https://youtu.be/GMP9mbPp3gE?si=qcBAJQONarhO-5ts

영상과 글은 조금 다릅니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자존감이라는 말이 많이 떠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나”라는 실체는 무엇일까.

넷플릭스 <베이비 레인디어(baby reindeer)>는 주인공 도니가 자신보다 불행해 보이는 여인에게 베푼 작은 친절로 시작된 스토킹 사건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언뜻보면 그의 자존감은 낮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사랑의 대상과 방식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 인간은 자기혐오와 허무주의 어딘가 걸쳐 있다. 사랑은 인간에게 어려운 숙제다.

자기혐오와 사랑에 빠지다

도기는 코메디언을 꿈꿨다. 그것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힘든 고통 속에서도 언젠가 자신이 위대한 코메디언이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버틸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유명한 희극 작가를 만나게 된다. 무명 배우에게 그는 거대한 산과 같았다. 우연은 그 특유의 성질로 인해 오히려 더 필연으로 느껴진다. 이 운명적 만남이 자신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줄 거라고 믿었다. 도기는 그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다. 가슴 깊숙이 숨어있던 소리가 거대한 산을 만나 메아리친다. 그렇다. 자신이 기꺼이 참고 견딜 지난한 숙련의 겹을 일순간에 벗겨내게 된 것이다. 그가 곧 진리이자 길이었다.

그러나 비극의 주인공의 일반적인 전개처럼 그는 자연스럽게 무너진다. 유명 작가의 환심은 그의 재능에 있지 않았다. 그 재능이라는 것도 실체가 불분명하다. 그는 단지 작가의 성적 희생물일 뿐이었다. 발화되는 불꽃을 위한 작은 장작 같았다.

작은 성공은 또 다른 큰 성공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한계가 분명한 자신의 재능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눈을 가릴 때도 있다. 그럼으로 인해 희망에 부풀어 몸이 터져버리는 경우도 있다. 도기가 그랬다. 결여된 재능을 불어 넣어 겨우 부풀어 오른 희망 풍선.

그때 그는 어떤 여인을 만난다. 작고 살찐 몸매. 생기를 잃은 피부와 머릿결. 그녀의 이름은 마사. 도기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바에 온 마사에게 차를 공짜로 내어주면서 처량한 자신보다 못한 이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이상한 자부심을 느낀다.


문제는 그런 마사가 도기에게 푹 빠졌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녀는 스토킹 전과자이자 정신병자였다. 마사는 매일 도기를 찾아 바에 온다. 매장 문을 열고 같은 자리에 앉아 그에게 공짜 제로 콜라를 받아 먹으며 도기를 칭찬한다. 매료된 눈빛은 도기가 관객으로부터 받고 싶던 선물이었다. 무대와 현실에서는 어둠만 가득하던 도기의 삶에 달콤하고 향긋한 눈빛과 음성이 찾아들자 마치 봄이 온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찌 불쾌하다. 벚꽃은 비에 떨어지고, 황사가 가득 낀 봄날처럼.

그럼에도 그는 그녀의 스토킹에 중독된다.

무섭게 변한 스토킹에 몸부림치지만, 정작 그것을 진심으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불편한 동행은 도기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처럼 빙글빙글 돌며 계속 이어진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유명 작가가 환심을 끌어 그를 이용했을 때도 그랬다. 그는 그 작가의 잘못된 행위를 애써 무시했다. 그가 바란 것은 오로지 그의 관심이었다. 내가 어떻게 되든 그의 관심과 그로 얻게 되는 기회가 자기 자신보다 더 중요했다.

오로지 그 관심.

그로부터 얻게 되는 잘 살고 있다는 확신

관심과 관심이 모여서 꿈이 완성될 수 있다는 믿음.

흔히 자기 혐오는 자신을 미워하거나 스스로 삶을 비방하는 것을 두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혐오는 인간을 도구화, 수단화할 때 발생한다. 나 그리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필요한 대상으로 여기거나 우상화할 때 자기혐오는 시작된다. 나로서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은 당연하지만 너로 인해 내가 완벽해지겠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애초에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완벽해질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상화는 일종의 스토킹이며, 도기와 마사와 같이 자신이 누구인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자신이 원하는대로만 상대방을 바라보게 된다.

결국 내 존재의 가치를 타인으로부터 얻게 되면 나는 무의미하게 된다. 내가 사라진 자리에는 자기혐오가 찾아온다. 무의미의 사슬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계속 구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가 생각하는 나를 위해 나 스스로 헌신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가능하다.

도기의 마지막을 보자.

도기는 자기 자신을 진실로 대면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본인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을 고백하게 된다. 스토킹범의 관심이 그에게 하나의 위안이 되었고, 진실한 사랑 앞에서 자기혐오에 빠져 불안했다는 사실을 대중과 가족에게 말한다. 정말로 코메디언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단지 타인으로부터의 관심과 인정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 스토킹범 마사에게 동정을 느낀다. 어쩌면 그녀도 나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녀도 아직 자기 자신을 대면하지 못했던 것뿐이지 않았을까. 마사는 오히려 나를 구원했다. 그런데 마사는 나로인해 감옥에 갔다. 누가 진짜 피해자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파괴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