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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나무가 된 교동 아씨

전주 이야기 1

by 김경희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잘난 이들은 하나둘 고향을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간다. 특별히 잘난 것도, 그렇다고 모자란 것도 없는 평범한 나는 전주에서 태어나 자라고, 일하고, 결혼하여 지금까지 살아왔다.


태어난 고장에서 평생을 살아간다는 건, 누군가 말했듯 ‘못나서 산을 지키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보다 조용히 미소 짓는다. 떠나지 않아도 되는 삶, 변함없는 이곳에서 하루하루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작은 행운 아닐까.


나는 전주의 한옥마을, 교동에서 나고 자랐다. 어린 시절 한옥마을은 고요했고, 골목마다 흙먼지가 흩날렸다. 기와지붕 아래서는 된장 냄새가 스며 나왔고, 가을이면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감나무에 발간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은행잎은 햇살 받아 골목길 위로 노랗게 번지곤 했다.


친구들과 깔깔대며 뛰놀던 은행나무 골목, 오목대를 오르내리며 숨바꼭질하던 순간들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하지만 세월은 동무들을 각자의 길로 흩어놓았고, 그때 함께 놀던 친구들은 어느새 뿔뿔이 흩어져 서로의 안부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지금의 한옥마을 은행나무 골목에는 여행객들로 가득하다. 오목대로 오르는 길에는 낯선 웃음소리가 메아리친다. 교동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그 안의 시간은 오래전에 흘러가 버렸다. 변해버린 골목과 새로 들어선 화려한 가게, 생판 알지 못하는 외지인의 웃음이 한옥마을을 수놓고 있지만, 곳곳에 남아 있는 옛 흔적들은 어린 시절의 발자국을 불러일으킨다.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보이는 대청마루와 서까래, 대들보, 부서진 기와 조각, 은행나무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까지. 이 모든 것이 마음속에서 그림처럼 한 장 한 장 펼쳐진다.


오목대에 올라 내려다보면, 한옥마을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멀리 흩어진 동무들의 어릴 적 웃음과 숨결이 은행나무 사이사이에 남아 아직도 걸려있는 것 같다. 고향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흘러간 시간과 남겨진 기억을 마음에 품고 오늘과 내일을 묵묵히 살아가는 일이다. 남은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면, 시간의 흐름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남아 있음은 누군가 떠난 자리의 공허를 채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선물은 지나온 시간의 모든 순간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일이다. 아직도 골목 곳곳에 남아 있는 옛 흔적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심리적 재산이다. 언제나 꺼내 쓸 수 있는 이 재산은 때때로 그리움에 몸부림치거나 외로움이 깊어질 때 삶의 바닥에서 빛이 되어 내면을 은은하게 비춰준다.


어려서 교동 아씨였던 나는 이제 세월의 흔적을 품은 어른이 되었다. 교동 한옥마을의 빛과 그림자, 은행나무에 매달린 노란 잎사귀 하나하나, 경기전을 둘러싼 돌담길의 굴곡, 뾰족한 전동 성당의 첨탑, 잿빛 기와 위로 내려앉는 환한 햇살까지. 이 모든 풍경과 함께 고향을 지키는 못난 나무처럼, 지난 시간의 온기와 기억을 품고 고향의 숨결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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