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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유명한 베타랑 칼국수

전주 이야기 4

by 김경희

베이비 붐이 일었던 시대에 태어난 는 배곯던 시대의 애잔함은 없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모든 것이 흔전 만전 넘쳐나지도 않았다. 그저 적당히 부족함 없는 대학 시절을 보냈다. 지금의 대학생들도 비슷할까. 돌이켜보면 대학에 다니던 그때까지 나는 참 철이 없었다. 아버지의 주머니 사정은 안중에도 없고,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아무렇지 않게 택시를 탔다. 괜히 겉멋이 들어 허구한 날 두꺼운 전공서를 옆구리에 끼고 커피숍을 들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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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커피숍'에 앉아 친구들과 머리 맞대고 마시던 커피는 유난히 썼다. 커피의 구수한 맛을 알게 된 건 예순이 넘어서였다. 그땐 그저 쓴 커피 한 잔에 철없는 낭만을 타서 마시던 시절이었다. 우스운 건, 그렇게 고상한 척 다리 꼬고 앉아 커피를 마시다가도 배가 고파지면 곧장 버스 타고 시장 속 같던 칼국수 집으로 향했다는 사실이다.


성심여고 정문 앞에는 ‘베테랑 칼국수’가 있다. 예전엔 이 집 바로 옆에 상아탑 재수학원이 붙어 있었는데, 점심시간만 되면 재수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친구들과 나는 그들 틈에 섞여 아줌마들처럼 방바닥에 철퍼덕 자리 잡고 앉았다.


뜨끈한 구들장이 엉덩이를 데워오기 시작할 즈음, 김 나는 칼국수 한 그릇이 코앞에 놓였다. 달걀 풀어 끓인 국물에 국수 넣고, 볶은 들깨가루와 구운 김가루, 고춧가루를 듬뿍 올린 칼국수는 구수함과 칼칼함이 어우러진 전주의 맛이었다.


커다란 칼국수 그릇 앞에서 커피숍에서의 고상한 자태는 금세 사라졌다. 젓가락으로 면을 휘감아 올려 후후 불다가, 후루룩 소리를 내며 면 치기를 했다. 그러다 입술을 오므리고 칼국수 꼬투리를 입안으로 쪽쪽 빨아들였다.


그때의 베테랑 칼국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젊음의 위장은 돌을 삼켜도 소화시킬 정도였기에, 푸짐한 양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는 서울에도 베테랑 칼국수 분점이 생겨났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반조리 형태로 집에서도 손쉽게 먹을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전주 한옥마을 성심여고 앞 베테랑에서 먹는 칼국수 맛이 으뜸이다.


베테랑 옆으로도 여러 군데 칼국수 집이 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사람들은 베테랑으로 몰려들었다. 세월이 흘러 다른 칼국수 집들은 모두 사라졌고, 그 자리는 이제 베테랑이 사들여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칼국수의 맛, 그것이 베테랑의 이름값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한때 청춘의 맛이던 칼국수가 점점 버거워졌다. 젊은 시절엔 칼국수 한 그릇을 아무렇지 않게 비워냈는데, 이제는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도 잘되지 않는다. 남편 또한 칼국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베테랑을 찾지 못했다. 입보다 위가 먼저 나이를 먹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예순이 넘어서 다시 베테랑과 재회했다. 계기가 된 건 며느리 때문이었다. 그 아이는 전주에 오기만 하면 칼국수 맛에 반해 베테랑을 찾았다.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칼국수의 구수한 국물을 맛보게 되었다. 아들 내외와 함께 마주 앉아 칼국수를 나누어 먹을 때면 문득 웃음이 난다.


칼국수를 아들 그릇에, 며느리 그릇에 덜어주다 보면 어느새 면발이 그릇과 그릇 사이를 넘나들며 다리를 놓는다. 그 다리 위로 김이 피어나고, 웃음이 오가고, 세월이 건너간다. 젊은 날 친구들과 방바닥에 질펀하게 앉아 먹던 칼국수가 이제는 세대를 이어주는 따뜻한 끈이 되었다.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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