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는 너무 가까우면 붕괴된다

적당한 거리는 오히려 깊은 관계를 만든다

by 서하

우리는 종종 가까워질수록 관계가 깊어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의 '안정 궤도' 이론은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준다.


보어의 원자 모형에 따르면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는 '아무 거리'에서나 안정적으로 존재하지는 못한다.

전자와 원자핵 사이엔 전자기적 인력이 존재한다.

이 인력이 너무 강하면, 전자는 중심으로 떨어져 붕괴하거나 충졸하게 되고

너무 약하면, 전자가 밖으로 튕겨져 나가게 된다.

그래서 전자는 '정해진 거리'에서만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 거리를 우리는 '보어 궤도' 혹은 '보어의 안정 상태'라고 부른다.


즉, 전자가 너무 가까워도 안되고 멀어도 안된다.

적당한 거리에서만 서로의 존재를 유지하며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 원리가 갑자기 떠오른 건,

관계에서 느껴지는 거리감과 매우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자주 못 보게 된 친구들이 있다.

중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친구들이어서

서로의 행복과 좌절을 나누고, 사소한 일에도 서로의 반응을 궁금해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 20대 후반에서 30대에 접어들 무렵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누군가는 결혼을 했고, 누군가는 이직을 했고

나는 나대로 내 삶을 감당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운할 만큼 바빠졌고, 말없이 흘려보낸 메시지들도 있었다.

예전처럼 아무 때나 전화를 걸거나 만나자고 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 최근 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친구의 임신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우리는 시간을 맞춰 오랜만에 만났다.

처음엔 다들 어색한 듯 웃었지만,

이상하게 대화는 끊이지 않았고, 그동안 못 했던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문득 깨달았다.

우리는 멀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단해졌다는 것을.




어쩌면 우정도 전자처럼

너무 가까이서만 머물려고 하면 부담이 되고, 너무 멀어지면 잊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사이 어딘가, 서로가 바빠도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거리,

서로의 삶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할 땐 곁으로 천천히 스며드는 관계의 거리,

그게 우리의 '안정 궤도'가 아닐까?


물리학이 말하듯, 관계도 일정한 거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다.

밀착이 아닌 연결, 침투가 아닌 공명, 간섭이 아닌 존중


너무 가까우면 붕괴되고, 너무 멀면 소멸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안정 궤도를 지켜야 한다.

이제는 그게 우정을 지키는 방식이라는 것을 30대가 되니 조금은 알 것 같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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