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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YA May 18. 2024

기획은 기회를 만드는 일

또는 오류를 바로잡아가는 일

한때 몸담았던, 그보다 열정적일 수 없었던, 애증의 롯데타워 건물. 저녁을 먹고 돌아올 때면, 왜 우리가 있는 층만은 불이 꺼지지 않는 거냐며 농담 섞인 불평을 했던 때가 떠오른다



망했다, 아주 철저하게.


탄생부터 오류였던 삶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태어나 중증 아토피를 앓으며 온갖 합병증에 시달렸고 아버지의 폭압과 지독한 가난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19살에 새집증후군으로 폭발한 2차감염 증세로 수능 준비는커녕 학교 수업조차 제대로 가지 못해 겨우 졸업만 했고, 이듬해 20살에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디자이너의 꿈은 산산조각 났고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간 학과에서 이 지독한 난치병과 씨름하며 눈 수술, 합병증 등으로 수술하며 보내야 했고, 그 사이 아버지의 사업은 폭삭 망해버려서 치료비조차 제대로 마련할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리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쫓겨났다. 나무껍질 혹은 코끼리 피부처럼 흉측해진 피부를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스스로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치료비를 벌어보고자 했지만 그마저도 모두 외면받기 일쑤였다. 나는 펴고 굽혀지지 않는 팔과 다리로 스스로 계단 하나 올라갈 수 없어 엄마의 부축을 받고 움직이는 내 처지가 너무 힘겹기만 했다.



아버지는 사업이 망하고 술독에 빠져 지냈다. 나는 두 평 남짓한 방에서 겨울에는 파카를 입고 여름에는 발가벗고 지냈다. 한 달 약 값인 삼십만 원에도 손을 벌벌 떨었지만, 그 약 외에는 대체재가 없는 현실에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약을 먹었다. 어떤 일이라도 하고 싶었다.



천주교에 갔다. 뭐라도 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 현재도, 그때도 무교였지만 누군가를 돕다 보면 내가 살아갈 이유도 명확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청년 단체의 모든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거기에 매진했다. 쓸고 닦고 봉사활동 다니고, 어르신들 안내하고… 그러다 급기야 청년 단체의 장을 맡게 되었고, 수녀원과 아동 요양원, 독거노인시설 등을 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다. 부모에게 버려졌음에도 내보이는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가 나를 반성케 했다.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온갖 치료에 지친 몸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무언가를 해보기 위해 아등바등거렸다.



등록금이 없어서 수료 상태로만 두었던 대학이었다. 방송대로 방향을 틀었고 부산직업능력개발원에서 장애인 동료들과 함께 구직활동을 했다. 여러 자격증을 취득하고, 찢기는 피부에도 웃으려 노력했다. 100군데를 지원하면 100군데에서 모두 떨어졌다. 아르바이트 하나 할 수 없었던 사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곳은 봉사활동은 놀았던 것이라며 콧방귀까지 뀌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야 했다.



학업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던 시기부터 블로그를 만들어서 글을 썼다. 디자인의 욕심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혼자 공부해가며 소스를 고치고 꾸며놓고 글을 썼다. 글을 쓴 지 10년 가까이 지난 무렵, 부산직업능력개발원에서 한창 지원하던 중에 한 회사에서 내 글을 유심히 보고 면접 제안을 주었고, 채용이 될 수 있었다. 내 첫 직무는 콘텐츠 에디터였다.



서울로 올라왔다. 2평짜리 고시원에서 먹고 자며 일했다. 그렇게라도 기회를 얻은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주로 운영 중이던 제약사의 메일과 서버 등의 시스템이 디도스 공격 등으로 무력화되면서 계약이 끊겼고, 그때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아직은 설익었지만 아이디어 하나를 사업화해보자고 대표가 제안했고 나는 아이디어만을 가지고 서비스를 만드는 기획자로 변모했다. 그때부터 밤 낮 할 것 없이 일에 매진했다. 낮에는 수의사, 훈련사, 펫샵 등을 방문하며 이해관계자를 만나거나 신촌 길거리 등지에서 설문조사를 하거나 인터뷰를 했고, 밤에는 온갖 소셜모임에 가서 다른 기획자는 어떻게 일하는지를 파악하고 일에 접목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기에 나는 늘 처음부터 배운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콘텐츠 추천시스템, UI/UX, 와이어프레임, IA 등등 모두 그때 끊임없이 시도하며 깨지고 배우며 만들어나갔다. 물론 피부과 약은 계속해서 먹으며 지냈다. 한약은 물론이고. 그렇게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빛을 보리라 생각했다. 어떻게 주어진 기회인데, 아무렇게나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창 개발 막바지에 다다를 때였다. 하나 남은 눈마저 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병원을 가도 부정적이었다. 수술 중에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고, 수술이 잘 안될 가능성이 높고 자칫하면 눈을 잃을 수 있다고 하면서 우리 병원에서는 수술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그렇게 여러 병원을 다녔다. 점차 모니터 화면의 글씨는 물론이고 a4용지에 쓰인 글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아산병원에서 윤영희 교수를 만나 기적적으로 수술을 했고, 회복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은 너무 길고 힘들어서 도대체 암흑 같은 미래가 나아지리라는 생각도 못 하고 지냈다.



회사에서는 기획 업무를 인수인계해 주고, 병원에서는 일자를 조율하며 수술을 하고 보니 벌써 2-3개월이 지나 있었다. 업무 공백이 생겼고 에이전시이자 스타트업이었던 회사에서는 그러한 공백을 계속해서 기다려주기 힘들어했다. 그렇게 나는 첫 회사를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허탈했고 슬펐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가며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표와 의견 차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회사가 초기일수록 핵심 기능에만 충실한 MVP를 빨리 만들어서 소규모 고객에게 테스트하고 시장의 반응을 보는 것이 먼저라고 했지만, 아이디어와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던 대표는 그런 것보다 길고 장대한 로드맵을 그리고 여러 기능을 잘 만들어서 한 번에 론칭하기를 바랐다. 현실적으로 자금이 많다면 그 방법이 맞을지도 몰랐으나 회사의 규모와 자금으로 봤을 때 그건 힘들었다. 그래서 밤에도 소셜 모임에 가거나 동물 병원에 방문해서 자문위를 모시려 했고, 그것을 발판으로 더 개선해 나가보고자 했지만 수술이 발목을 잡아버렸다. 또다시 방황이 시작된 것이었다.



IT와 컴퓨터, 디자인 이런 것에서 손을 떼라는 말을 가족들로부터 수없이 들었다. 나도 흔들렸다. 아토피도 그랬고, 눈도 그랬고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만 할 것처럼 느껴졌다. 이후로도 20대 초반에 그랬던 것처럼 부산, 대전, 제주 산간 할 것 없이 둥지를 틀려고 애썼다. 그러나 일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부작용이 심한 스테로이드와 사이클로스포린과 같은 면역 억제제, 인터페론 등으로 단발성이 짙은 치료만을 해야 했던 내게 세상은 기회를 줄 여력이 없었다. 또다시 수백 장의 이력서를 내고 떨어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3년 만에 IT 업계에 복귀했다. 그전에 국과수에서 감정물 접수를 하는 일도 했지만 제대로 일을 한다고 느꼈던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롯데온 오픈 전이어서 대규모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채용되었다. 우리 팀에도 60명 가량 되는 인원이 모였다. 일부 기획자 외에는 모두 파견/계약직이었고 해외 베트남센터까지 있었다. 수십 명의 운영인력을 내가 담당했다. 어드민을 기획하거나 성과관리하거나 지표관리, 자동화, 속성기획, 검색필터 기획, 속성위젯 등 여러 업무를 수행하며, 운영과 기획의 중간에서 조율하는 역할까지 했다. 주말과 명절까지 회사에 출근해서 일했다. 해야 한다면 했다. 그것이 나를 살게 해준다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도 같고.



3년간 3번의 팀장이 바뀌고 여러 파트가 바뀌었지만 내 업무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기획자로 계속 성장하고 싶은 마음에 여러 가지 어필을 해보기도 하고, 여러 과제를 수행하기도 했지만 위에서 정한 대로 일이 진행될 뿐 내 의사는 안중에 없었다. 이대로 있는다면 더 이상 성장하지도 못하고 꼬여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굳게 결심을 하고 이직 준비를 했다.



사실 롯데이커머스에 입사하기 직전에 신약이 개발되었다. 임상에 참여했고, 그것이 효과가 있어서 이커머스에 입사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병증에 구애받지 않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기였다. 치료비는 문제였다. 1회 주사에 100만원, 최소 2주에 1회 맞아야 했고, 월 200만원이 소요되었다. 서울에서 자취하는 나로서는 돈을 벌수록 돈을 까먹기만 하는 상황이 계속된 것이었다. (아마 그래서 더 일에 매진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국제교류재단에 이직했다. 사실 추가합격이었으나 국제교류업무와 그와 관련된 기획 업무가 매혹적이어서 제주 서귀포에 둥지를 틀려고 했다. 허나 너무 바닷가에 인접한 곳이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너무 습하고 제주 특유의 환경에 아토피는 온몸에 다시 돋아나기 시작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육지에서 기획자의 일을 계속 구해보자 마음먹었다.



힘겹게 을지로의 한 회사에 입사했다. 신규 사업을 준비하는 부서에 채용되었는데, b2b 대상 api로 데이터거래 중개 플랫폼을 만드는 곳이었다. 나는 나를 건실한 태도를 지녔고, 삶에 있어서 태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어필했다. 그리고 이사는 내 브런치의 글을 찬찬히 읽고 내게 믿음을 주었다. 그렇게 일할 수 있게 된 것에 무척 감사해 하며 제대로 일해보자 했다. 온갖 서비스 정책서를 만들고, 서비스 플로우를 만들며 관련 기획/디자인/개발 부서와 회의를 하며 일을 해나갔다. 이번에야말로 실패하지 말자고 하면서.



2개월이 지날 때쯤, 회사 인수 소식이 들렸다. 새로운 인물들이 그룹사에서 오고, 그들의 계획대로 신규 사업을 중단하고 프로젝트를 드롭하며 관련 인물들을 정리한다는 소문이 팽배했다. 2월 첫째 주에 회사 전체 인사를 한 대표이사가 둘째 주에 나와 PO들을 면담했고 프로젝트 드롭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어떻게 해볼 새도 없이 계약만료로 퇴사하게 되었다.



다시 거리로 내몰렸다. 일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수십 군데 경력기술서와 포트폴리오를 내면서 나의 진정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기획자로서의 내 삶을 버리기 싫었다. 일하면서 나보다 잘한다고 생각하는 비슷한 연차의 사람은 없었다. 그것을 꼭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작은 스타트업이나 에이전시부터 어느 정도 투자를 받은 곳까지 계속 면접을 보았다. 그러나 계속 떨어지기만 했다. 병력과 이력, 그리고 최근의 퇴사까지 모든 것이 나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들기 충분한 듯했다. 어떤 기획자인지 모르겠다라고 하거나 웃으면서 헤어졌지만 탈락통보를 보내는 일이 계속되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나이? 나이에 비해 적은 경력? 맡았던 일? 공백기? 그런 것들은 한 사람의 실력을 제대로 증명해주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했지만 세상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우아한 형제들의 2차면접, 그 30분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탈락했을 때, 사실 그 전의 2주 동안 매일 면접을 봤었고 계속해서 탈락소식을 받고 있었고, 더 이상 지원할 회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지원했던 상태에서, 아 이게 정말 나의 마지막이구나 하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4-5월에 그렇게 무수한 탈락을 접하고 나서 말썽이 생긴 팔꿈치를 치료 받으며 생각했다. 이 업계에서 더는 나라는 사람의 효용가치가 없다는 뜻이구나 하고. 끝없는 탈락은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되고만 있었다.



돌아보면 사는 게 먼저라고 했던 때가 있었다. 고3때, 담임선생님, 교감선생님, 부모 형제 할 것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게 먼저라고 했다. 그래서 홍천이며 경북이며 할 것 없이 절에 가서 채식을 하고, 108배를 밥 먹듯이 하고, 나보다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돌보며 또 온갖 병원에서 치료받고 살았다. 수없이 돈만 까먹는 생활을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31살에 처음 취업해서 지금껏 어떻게든 일도 잘하고 함께 일하기도 좋은 그런 동료와 직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저 몇 가지 이력으로만 나를 판단할 따름이고, 그 사이에 빈 것들을 아무도 읽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기획자로서의 삶을 떠나서 내가 어떤 직장에서 일이라는 걸 다시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누군가 이 글을 읽을 거라는 생각도 안 들고, 나에 대해 가질 어떤 생각을 내가 바꿀 수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다시금 어떤 기회가 주어지면 제대로 일어서 보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서류조차 읽으려 하지 않는다.



잘못 살아온 것 같은 기분을 매일 느낀다. 스타트업에서, 롯데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에게 고민상담가로서 일을 잘 도와주는 든든한 지원군으로서 계속 살아갔고 그들과 꽤 연대하며 지내왔다 생각했지만 모든 것은 신기루에 가까웠다. 조직을 등에 업고 있을 때만 유용한 사람은 조직이라는 탈을 벗자마자 무용한 인간이 된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뭘 하며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다. 계속해서 내가 잘할 수 있고, 기본기는 충실하게 갖춰져 있다고 여기는 서비스 기획과 운영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도전장을 내밀고는 있지만,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커리어는 끝나 버린 걸까? 조금씩 성장하는 삶, 아주 힘든 시기들을 보냈지만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더 본질을 꿰뚫는 능력을 갖춰나가고 싶고, 조금씩 갖춰나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력서와 경력 기술서 몇 줄만으로 그것을 증명해보이기도 전에 치워져 버리는 것이 요즘의 현실인 것 같다. 눈 수술, 회사 인수, 자가면역질환 등등 그런 것들은 내 의지가 아니었고 순간에 닥친 불행이었지만 아무도 그렇게 여기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야 한다. 오뚜기처럼 다시 곧추서서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서고, 넘어뜨려도 다시 털고 걷고 달릴 준비를 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니라 해도 그 모든 세월이 아무것도 아니지 않음을 나와 내 가족은 안다. 그것만 믿고 다시 도전해야 한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유쾌하고 유머러스했던 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주변 모두와 즐겁게 일하고 즐기는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_23.06.30. 발행글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났다. 사실 작년 2월의 인수 이후, 4-5월에 복직 요청도 받았지만 거절했고, 자살을 예방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공공기관에도 합격했지만 내 성향과 딴판인 컴퓨터 세팅과 조립이 위주인 부서에 발령받고 고민 후에 퇴사했었다. 또 다른 회사에서 합격했지만 24시간 잠도 자지 않고 일에 빠져 사는 그들을 보며 나의 인생은 일로만 채워진다는 생각에 괴로워했었고 결국 퇴사했다. 나의 길은 명료했다. 서비스 기획자나 운영인력의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나아가 보는 것, 그것뿐이었다.



오랜 고민 속에서 발품 팔며 이곳저곳을 다닌 끝에 한 공간의 문을 열었다. 책과 쉼과 여유가 있으면 해서 만든 공간. 책과 영화와 음악, 차와 산책과 고독을 좋아했던 나의 성향이 자연스레 배인 공간이었다. 동생이 공들여서 도와준 덕에 문을 열었지만 여러 문제가 생겼다.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더는 도망치지 않으리라'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또다시 도망칠 궁리를 했다. 책이 망가져가는 이상 이곳에서는 더 이상 열정을 쏟아부을 수 없다며. 



주말에만 문을 열고 또다시 공간을 보러 다녔다. 지난한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했다. 잘해놓았고 예쁜데, 잘 될 것 같은데, 아쉽다고. 나는 그것을 두고 '보기에 좋은 것이 꼭 맛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빛 좋은 개살구'인 셈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찾고 있다. 인생은 처음부터 내게 살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 늘 사지로 내몰았다. 살 만해지니까 초기의 마음을 자꾸 잊는다. 그때는 여름에 선풍기 대신 에어컨만 있어도 살겠다고 했다. "혼자 걸어 다닐 수만 있어도 소원이 없겠다!"라고 한 적도 있었다. 일해서 먹고사는 것이 어딘가라고도 했고, 가족들이 큰 탈 없이 지내는 것이 어딘가라고도 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늘 자신이 가진 것은 보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것에만 시선을 두는 장님이 따로 없다.



기획이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던 시절에서 벗어나 또 다른 무엇을 만들어내고 안착시킬 하나의 기회다. 기획은 기회를 만드는 일이다. 다시 시작해 보자.



_24.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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