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와 목적, 그리고 구조
변호사의 민법 공부란 뭘까
민법 공부라고 하면 판덱텐 체계로 짜여져 있는 두꺼운 민법 교과서를 첫 장부터 읽는 것이 생각난다. 하지만 변호사의 민법 공부는 철저히 실무 관점에서 다시 짜여져야 한다.
변호사의 민법은 (1) 돈을 지급할, (2) 물건을 인도할, (3) 이전등기절차를 이행하라고 청구할 권리와 그에 따른 의무를 적어서 돈, 물건, 등기를 달라고 공격하거나, 그 청구의 기각을 구하며 방어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청구취지와 요건사실론은 그 기술의 기본 틀이다. 따라서 변호사의 민법은 청구취지와 요건사실론을 주요 목차로 다시 쓰여야 한다.
민법의 기본 원리는 청구취지와 요건사실론의 '스토리'를 체득한 이후에, 교과서를 발췌해 보면서 정확한 개념을 잡아 나가면 된다. 비유하자면, 민법은 드라마같이 익혀야 한다. 드라마는 먼저 일단 1화 2화 보면서 스토리에 빠져서, 끝까지 주인공에 이입했다가 빌런을 욕했다가 허우적대 봐야 비로소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다. 민법은 의뢰인을 위해 누구에게 뭘 구할지, 상대방은 어떻게 방어할지, 무슨 증거가 나올지 머리를 싸매고 전쟁을 벌이다가 비로소 제대로 알고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보통의 민법 교과서는 '판덱텐'이라는 체계로 짜여지고 두꺼운 양장에 위엄찬 한자가 대빵만하게 박혀서 멋있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걸 읽는다고 크게 다가오지도 않고 민법을 잘 알게 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위키백과를 생각해 보면 된다. 위키백과에서 드라마를 찾아보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된 회차별 시놉시스와 등장인물 소개와 사건 전개가 모두 적혀있다. 아주 효율적인 정보전달이지만, 이걸 모두 외웠다고 해서 그 드라마를 잘 알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변호사의 민법 공부는 속칭 '수험법학'과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
변호사 실무는 큰 틀에서 적당히 감을 잡고 의뢰인이 원하는 결론(효과)에 이르는 법리 및 주장을 검토하고 법리 및 주장에 증거로 제시할 사실관계(증거)를 모색하고 수집하는 활동이다. 변호사 실무는 요구되는 능력, 검토 순서, 목적 면에서 수험법학과 다르다.
요구하는 능력이 다르다.
수험법학에서는 먼저 사실관계가 주어진다. 수험법학은 사례에 특정한 사실관계가 정리되어 나왔을 때 거기에 너트 구멍에 맞는 볼트를 돌려 끼듯 관례적으로 기재해야 할 조문, 법리(이론 또는 판례)의 기재례를 기재 순서까지 정확히 외워 정확히 박아넣는 능력을 테스트하는 '시험'공부다.
여기서는 법전상 조문의 위치, "어떠어떠한 견해가 있으나 이러이러한 점에서 저러저러한 견해가 타당하고 판례도 같은 입장이다"라는 틀에 넣을 적당한 키워드를 달달 외우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 달달 외우는 것의 기준은, 사실관계의 너트가 나왔을 때 바로바로 기재례를 시험지에 알맞은 분량으로 출력해 넣을 수 있는지 여부다.
반면 실무법학은 사실 감만 잘 잡고 있으면 될 뿐, 소수설과 목차 기재례를 달달 외우고 있을 필요까지는 없다. 오히려 방향을 설정하는 감이 더 중요하다.
검토순서가 다르다.
수험법학은 주어진 사실관계 → 발문에 대한 목차와 기재례 (법리, 기록형의 경우 주어진 증거 거시 - 포섭) → 결론 순으로 검토해야 한다.
반면 변호사 실무에서는 의뢰인이 원하거나 최선을 결과를 가져다주는 결론 → 결론에 이르기 위한 법리 및 주장 검토 → 법리 및 주장에 증거로 제시할 사실관계(증거) 모색 및 수집 순으로 검토가 이루어진다.
수험법학은 검토 순서에 따라 제한된 시간 내에 내용을 충분히 현출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반면, 변호사 실무에서는 증거 모색 및 수집이 중요하다. 증거가 있고 결론이 상식적이라면 법리가 다소 불명확하더라도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것처럼 상식적인 결론에 맞추어 새로운 법리가 개발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그런 주장을 잘 하는 것이 '리걸 마인드'를 갖추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목적이 다르다.
수험법학은 요건과 결론 도출 과정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상계 가부가 문제된다면 상계금지채권에 해당하는지 여부 및 그 근거를 외워 기재하는 것이 득점 포인트다. 안될 것 같더라도 일단 법리를 쓰고 왜 안되는지 포섭하는 것이 전부 다 득점 요소다. 안되는 것을 왜 굳이 쓰지라고 생각하고 안 쓰면 점수를 잃는 것이다.
실무법학은 효과가 중요하다. 의뢰인을 대리하여 금전지급 청구의 소를 제기해놨고 상계항변이 예상된다고 치자. 금전지급청구가 인용되려면 상대방의 상계항변이 배척되어야만 한다. 처음부터 효과부터 생각하게 된다. 의뢰인은 돈 받을 수 있어요? 부터 물어보기 때문에 돈을 받으려면 상계항변이 배척되는 효과를 얻어야 하고, 그러려면 상계금지채권의 요건에 해당해야 한다고 설명하게 된다. 결국 실무에서는 의뢰인이 원하는 결과와 법률효과가 중요하다.
변호사 민법 공부의 구조
학습순서: 청구취지 기재례 → 청구원인별 기재례 및 법리 → 항변/재항변 각 기재례 및 법리
그래서 변호사 실무를 위한 민법 책은 반드시, 먼저 청구취지 기재례를 배우고, 청구원인별 사실 기재례 및 법리, 전형적인 항변 사실 기재례 및 그 법리와 재항변 사실 기재례 및 그 법리를 나열하고 설명해야 한다.
우선 의뢰인이 원하는 결론인 청구취지를 배우고 그 청구의 종류별로 쓰여야 한다. 청구취지는 모든 민사 서면의 궁극적 효과다. 그러므로 변호사 실무를 위한 민법은 반드시 청구취지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의뢰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야 한다. 돈을 받기 원하는가(금전청구)? 물건을 인도받기 원하는가(인도청구)? 이전/말소등기절차를 이행하라는 의사의 진술을 명받기 원하는가(등기청구)?
결론을 정했다면, 의뢰인에게 그 결론에 이르기 위한 근거 사실관계들을 물어야 한다. 이것이 청구취지의 원인, 청구원인이다. 우리 법원은 각 청구원인 별로 사실관계를 기술하는 문장들을 어느 정도 정형화시켜 놓았다. 변호사의 민법은 먼저 이런 청구원인별 사실관계 기재 샘플들을 수집한 후에, 그 기재례에 숨어있는 법리를 하나하나 서술하는 방식으로 쓰여져야 한다.
항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피고 입장에서 기각을 구하고 있다면, 원고 청구원인에 대한 항변이 무엇이 있는지 그 항변을 기술하는 문장들이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기재례에 숨어있는 법리를 하나하나 공부하는 순서로 배워야 한다.
변호사 민법 공부의 목차
그래서 변호사 실무를 위한 민법 책은 다음과 같이 쓰여져야 한다.
❶ 먼저 청구의 종류부터 나눠야 한다. 금전청구(돈 달라) / 인도청구(물건 달라) / 등기청구(등기 달라). 청구취지 문장을 작성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❷ 그 다음은 청구원인인 주요 권리발생사실을 기준으로 청구의 종류를 세분화해야 한다.
- 금전청구(대여금, 매매대금)
- 임대차(인도청구 or 금전청구)
- 인도청구(대지인도 + 건물철거 + 퇴거)
- 등기청구
❸ 나아가 주요 권리발생사실을 기반으로, 그에 부수하는 청구들과(보증채무금, 양수금, 대위, 전부, 추심금), 특수한 주제인 사해행위 취소소송을 덧붙이면 된다.
위 목차에 관련 내용을 좀 덧붙이면 다음과 같은 목차가 나온다. 주로 돈, 물건, 등기를 달라는 결론인데 결론에 이르는 근거들이 다 다르다.
1. (돈 달라) 대여금 + 보증금
2. (돈 달라) 매매대금 및 지연손해금, 매매해제 원상회복 + 보증금
3. (돈 달라) 임대차계약에 기한 임차보증금반환, (물건 달라) 임대목적물반환청구
4. (물건 달라) 토지소유권에 기한 토지인도/건물철거/퇴거청구, (돈 달라) 부당이득반환청구
5. (돈 달라) 채무불이행, 불법행위 손해배상청구
6. (등기 달라) 소유권이전보존등기청구/소유권이전보존등기말소청구/근저당권설정등기청구/근저당권설정등기말소청구 등 각종 등기청구
7. (돈 달라) 어음금 청구
8. (돈 달라) 권리발생사실 +a하여 보증채무금, 양수금, 대위, 전부금, 추심금 청구
9. (사해행위를 취소하고, 등기 되돌려놔라 or 돈 달라) 사해행위 및 원상회복
모든 민법의 법리는 위 목차에 우겨넣을 수 있는데, 이제부터는 우리 실무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틀로 민법을 익혀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변호사 민법 공부 : '사실심'의 중요성
마지막으로, '사실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대법원 판례는 '상고이유'에 대한 답이고, 상고이유는 법리오해로 제한된다. 실무에서도 대법원에 가서 다퉈볼 만한 사건들은 몇 없다. 그러니 대법원 판례만을 공부하는 수험법학은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장님일 수밖에 없다.
변호사 실무는 하급심 판례를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므로 주요 하급심 판례의 목차와 기재례부터 익혀야 한다. 지엽적인 쟁점에 대한 대법원 판례를 외우는 것보다 잘 쓰여진 하급심 판결문을 따라가면서 기초사실을 정리하는 방법, 관련 법리와 쟁점에 대한 판단으로 논리를 밀고 나가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훨씬 낫다.
- 2018. 11. 12. 작성한 글을 조금 고쳤다. 도대체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거나 다소 무리하게 형식적으로 삽입된 어구나 문장을 삭제하고, 논리가 끊어져 있는 부분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