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용준 Jul 01. 2017

김민희와 홍상수라는 주홍글씨

김민희와 홍상수의 영화적 동거는 세간의 비난을 통해 보다 견고해졌다.

남자가 말했다. “너 소문 다 들었어.”

여자가 물었다. “무슨 소문이요?”

그러자 남자가 답했다. “유부남과 사귀다가 외국 나가 잠수탔다며.”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나오는 대사다. 이 영화에서 김민희는 유부남 영화감독과 사귀다 헤어진 뒤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는 배우로 등장한다. 대부분의 관객이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통해 특정한 현실을 환기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거듭 언급되는 유부남 감독과 여배우와의 애정 관계에서 관객들은 자연스레 김민희와 홍상수의 관계를 연상하게 된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홍상수는 이야기를 미리 정해놓고 찍는 감독이 아니다. 최소한의 출발점 역할을 할 시놉시스 정도는 존재하겠지만 결과적으론 그날그날의 상황에 맞춰 당일에 이야기를 집필하고 그날 그 내용을 촬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화는 매일같이 그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을 통해 잉태되는 산물인 셈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또한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이야기에서 홍상수 본인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건 부자연스럽다.



물론 이것이 홍상수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의미는 아니다. 홍상수 본인도 자전적인 이야기를 영화화한 적은 없다고 말해왔고, <밤의 해변에서 혼자> 역시 그렇다고 밝혔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반영되지 않은 이야기를 쓸 순 없는 노릇이다. 이번 영화 역시 그렇다. 자신이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에서 정작 자기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기만에 가깝다. 물론 홍상수가 기만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홍상수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개봉을 앞두고 한 영화 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많은 소설가처럼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디테일이나 만드는 자세에서 얼마든지 개인적이고 솔직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그런 기욺 속에서도 밸런스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게 자전적인 것은 아니겠죠. 그런 의도가 아예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홍상수의 영화 속에 자리한 홍상수가 그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진 않다는 말이다. 홍상수의 영화에 반영된 홍상수는 영화의 자아로 뿌리내리는 대신 홍상수라는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요소로 수집될 따름인 셈이다.



그런데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선 홍상수가 만든 기존의 영화와는 다른 특이성이 발견된다. 홍상수의 영화 속 인물들은 결코 관객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스크린이란 경계 밖으로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선 홍상수의 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부자연스러운 존재가 등장한다. 검은 비니를 쓰고, 검은 코트와 검은 바지를 입은 남자 말이다.


이를테면 함부르크를 배경으로 한 1부에선 난데없이 카메라의 시점으로부터 등장한 한 남자가 멀리 떨어진 영희와 그녀의 지인을 “여보세요!”라고 부르며 다가가서는 한국어로 시간을 물은 뒤 이내 사라진다.


이후 영희와 그녀의 지인은 그 남자가 자신들을 쫓아온다는 것을 직감하고 그에게서 달아나듯 이동한다. 그러다 1부의 끝에서 그 남자가 해변에 있던 영희를 둘러메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2부에서도 그렇다. 지인의 도움으로 강릉의 숙박 시설에 묵게 되는 영희가 지인들과 함께 실내로 들어섰을 때 베란다 밖에서 한 남자가 창을 닦고 있다.


기이한 것은 영화 속의 인물들이 그 남자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 그러니까 그 남자는 관객에게만 보이는 존재란 사실이다. 심지어 영화 속 인물들이 베란다 창문을 열고 경치를 구경할 때조차 그렇다. 일종의 방백 같은 존재인 셈이다. 이 남자의 등장에 관한 물음에 홍상수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왜 그런 인물이 나오는지 설명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답을 알 길이 없는 주관식 질문과도 같다. 다만 김민희의 현재 상황을 떠올리면 어떤 해석은 가능하다. 홍상수와의 관계가 폭로된 이후 김민희의 사생활은 불특정 다수의 관심을 받고 있다. 그리고 대중은 스마트폰 액정을 통해 김민희에 관한 소식에 손쉽게 접근한다.


하지만 김민희에게 대중은 베일에 싸인 대상이다. 김민희를 손가락질하는 이들은 김민희를 알지만 김민희는 그들을 모른다.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익명의 대중은 김민희를 불륜녀라 손가락질하고 그녀의 각성을 요구한다. 깨끗해지라고 일침한다. 그래서 한 손으로 열심히 창문을 닦지만 다른 한 손으론 거듭 창문을 짚는다. 창문은 닦이는 한편 얼룩진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어딘가 무력해 보인다. 감독 본인이 큰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김민희와 홍상수의 현재와 무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이런 해석 자체도 그런 관점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어떤 식으로든 ‘영화를 영화로 봐달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드는 영화다. 되레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과 결탁하고 호응할 수 있는가’라는 사례로 보다 유용해 보인다. 그것이 홍상수의 욕망이었건 아니었건 간에 그렇다.


그래서 혹자에게 이 영화는 더없이 불쾌할 것이고, 혹자에게는 더없이 흥미로울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와 김민희가 사랑했기 때문에 탄생한 결과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가 만든 영화 가운데서 유일하게 감독의 것이 아닌 듯한 영화다. 사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배우들은 굉장히 인상적인 소품 노릇을 해왔다. 홍상수라는 그릇을 채우고 비우는 식재료 같았다. 홍상수의 영화는 언제나 홍상수의 것이었다.



하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보단 김민희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성별도 달라진 느낌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성별로 치자면 대부분 수컷 같았다. 여성성보다는 남성성에 대해 긴밀하게 탐구하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가 보기 드물게 잉태한 암컷처럼 보인다. 여자처럼 보인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의 영희는 남성에 대한 냉소와 경멸을 직접적으로 발화하는 여성이다. 그리고 “남자들은 다 병신 같아요!”라고 강변하는 영희가 존재하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의 영화 중 유일하게 여자에게 질척거리는 남자의 모습이 적극적으로 묘사되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되레 여자들 간의 유대감이 보다 깊게 느껴진다.


영화 끝부분에서 스크린 저편으로 걸어가는 영희의 뒷모습은 오롯이 혼자가 된 한 여성의 처량한 자아와 성숙한 영혼이 대비적으로 공존하는 풍경처럼 보인다. 특히 홀로 담배를 피우던 영희가 햇볕을 받으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처연함을 한껏 머금은 장면인지라 이례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의미에서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김민희를 통해 개척한 홍상수의 새로운 영토처럼 보인다. 결국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김민희의 영화다.



지난 몇 년간 김민희는 눈부신 행보를 거듭해왔다. 변영주 감독의 <화차>를 통해 처음으로 압도적인 인상을 남긴 김민희는 홍상수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통해 일상적인 자연스러움에 특이한 성질을 불어넣는 자질을 보여줬으며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통해 예민함과 우아함을 대변하는 미장센 그 자체가 될 수 있으면서도 단순히 소품에 머무르지 않고 영화의 공기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증명했다.


김민희라는 배우가 지닌 남다른 특이성이 새로운 영화적 가능성을 여는 문이 될 수 있음을 오롯이 증명했다. 그리고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통해 김민희는 홍상수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영화를 개척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김민희와 홍상수의 열애 사실이 밝혀진 이후로 두 사람은 주홍 글씨 그 자체가 됐다. 이름 자체만으로도 비난의 대상이 됐다. 흥미롭게도 그 일련의 과정이 두 사람의 영화적 연대로 거듭나면서 홍상수의 영화와 김민희의 연기를 더욱 신선하고 견고하게 다지는 것만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과 스페셜 스크리닝에 초청됐다는 홍상수의 신작 <그 후>와 <클레어의 카메라>가 궁금하다. 홍상수의 영화와 김민희의 연기가 함께 이뤄낸 무언가를 다시 확인하고 싶다.

쉽게 걷히지 않을 대중의 비난 속에서도 묵묵히 걸어나가는 두 사람의 예술적 동행이 과연 어디로 다다를까, 나는 흥미진진하다. 김민희와 홍상수라는 주홍 글씨가.


매거진의 이전글 <파운더> 십자가와 경쟁한 사나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