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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Nov 24. 2023

차승원, 9보다 중요한 1의 주관

차승원은 지금 누구보다도 명확하고, 명쾌하다. 

“자유로운 사람은 죽음보다 삶에 대한 명상을 하며, 죽음 이외의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이다. 스피노자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이상 큰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에게 큰 기쁨을 주는 일을 고민했고, 궁극의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능동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그런 능동적인 삶의 근간이 되는 건 결국 자신을 보존하려는 자유의지에 있다고 주장했다. 외부 요인이 아니라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 궁극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정의했다.


모두 바라는 대로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이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삶을 바랄까? 이 질문에 정확하게 답할 수 없다면 결국 내가 바라는 삶도 명확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당장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간의 품을 들이고, 경험의 폭을 쌓고, 그렇게 숱한 시행착오의 허물을 벗은 후로, 나라고 여기던 나와 몇 차례 결별한 뒤에야 비로소 만나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좋으면 좋고, 안 좋으면 안 좋은 거지. 괜찮은 건 없는 거야.” 얼마 전 나영석 PD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차승원이 한 말이다. 툭 던지듯 말하고 있었지만 툭 떨어진 생각처럼 들리지 않았다. 인상적이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면에서 인상적이었다. 내 삶을 내 의지대로 살아가겠다는 자유의지가 느껴진다는 점에서 하나, 내가 바라는 삶의 방향과 내게 가능한 삶의 방식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 하나. 물론 이건 지금, 차승원이라 할 수 있는 말이고, 가능한 삶일 것이다.


“나는 회사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가능한 부분이 있죠. 그런데 직업군에 따라 입장이 다 다르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관계라는 게 힘든 부분이 있잖아요. 그래서 제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도 있을 거예요. 다들 제각각 취향이나 주관대로 사는 거죠. 다만 저는 그렇게 여기고, 그럴 수 있다는 거죠. 저도 지금보다 젊을 때는 괜찮은 거 같다고 넘어가며 살았어요. 그런데 사실 그건 괜찮을 거 같다는 바람이었지, 괜찮은 게 아니었거든. 물론 인간관계는 개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잖아요. 누군가는 괜찮으면 괜찮은 거겠지. 다만 나는 아닌 건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어차피 모든 건 지극히 주관적이잖아요.”


그러니까 차승원도 지극히 주관적인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의 주관은 온전히 자신의 삶으로 수렴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들린다. 타인의 삶을 향해 발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렇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정의할 뿐이다. 이는 지나온 시간을 통해 만나고 경험한 자기 자신을 보다 정교하게 되짚고 반추하며 얻어낸 주관일 것이다. 이런 주관은 자연인의 일상과 함께 직업인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도 주요한 기준처럼 자리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어떻게 볼지, 이런 걸 의식하며 연기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일단 제가 가진 생각을 먼저 표출해보고 반응을 보는 식이죠. 아니다 싶으면 다른 걸 또 해보는 거고. 그런 방식이 예전과는 달라진 점이죠. 상대적으로 훨씬 유연해졌어요.”

<독전 2>가 제작된다는 소식과 함께 일찍이 공개된 출연 배우의 이름 사이에서 차승원을 발견했을 때 의외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흥미로웠다. <독전>에서 차승원이 연기한 브라이언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서 기능적으로 큰 활약을 하기 어려운 존재처럼 보였다. 심지어 <독전 2>는 그 직후의 상황을 그린다고 하니 더더욱 그 쓸모가 궁금했다. “사실 의아하긴 했죠. 그걸 또 어떤 식으로 만들려는 걸까? 그런데 브라이언만 놓고 봤을 때 그가 등장하는 이유를 좀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괜찮을 거라고 봤어요.” 그만큼 자신이 납득하고 연기할 수 있는 수준의 캐릭터를 만들고자 캐릭터를 두고 백종열 감독과 많은 의견을 나눴다. “일단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하는 캐릭터라 노쇠한 느낌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오히려 더 무섭게 뿜어내는 살기 같은 기운을 드러내는 인물이기도 해요. 전작에서는 허세가 넘치는 면이 있었다면 속편에서는 그런 허세는 많이 빠졌고, 진짜 무서운 인물이 됐다고 할까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독전 2>에서 연기한 브라이언이 좀 더 재미있었어요.”


브라이언은 <독전>에서 사실상 만신창이가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독전 2>에 다시 등장한다는 건 필연적으로 자신을 그렇게 만든 대상에 대한 복수심을 기반에 둔 행동과 결정을 할 거라는 예감을 남긴다. 하지만 거동조차 불편한, 휠체어에 의존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인물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신체적인 대미지를 입은 상태라 좀 느릿느릿한 면이 있어요. 그런데 그래서 오히려 대사에 집중력이 생겼어요. 다들 총 들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혼자 휠체어를 타고 쓱 들어오면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잖아요. 상대방이 쉬지 않고 떠드는데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래요?’ 이렇게 한마디 하는 사람이 주의를 집중시키는 법이죠. 브라이언에게는 그런 면이 있어요.”


굵은 선을 가진 캐릭터가 크게 움직일 때 눈길을 끄는 건 인지상정이지만 무언가 꽉 찬 공간에 허락된 한 점의 여백이 있다면 그 역시 시선을 끄는 법이다. 무엇보다 캐릭터를 인식하게 만드는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디테일일 것이다.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게 배우들이 하는 일일 거예요. 예를 들어 물 먹는 거 하나만 봐도 캐릭터가 느껴지거든요. 생수병 뚜껑을 열고 물을 마신 뒤 누군가는 잘 돌려서 잠그고 탁자에 내려놓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뚜껑을 테이블에 대충 던져놓고 잠그지 않은 생수병을 들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게 다 캐릭터죠. 그런 디테일을 켜켜이 쌓아가다 보면 ‘앗!’ 하면서 공감하는 순간이 생기면서 사람들을 그 캐릭터에 확 빠져들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려면 제 행위를 스스로 관찰하고 기억해야 되는 거죠.” 요즘 말로 연기에도 ‘와우 포인트’ 같은 것이 있는 법이랄까.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지난 2022년에 방영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1화에서 차승원의 연기를 보며 ‘와우 포인트’를 느꼈다. 서울에서 제주로 전근 간, 사실상 좌천된 것이나 다름없는 은행장 최한수는 기러기 아빠다. 딸을 프로 골퍼로 만들기 위해 막대한 유학비를 감당했지만 남은 건 쪼들리는 형편이다. 그는 고생스러운 삶을 묵묵히 견디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 미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됐건 그는 비좁은 방바닥을 구석구석 걸레질하고 청소하며 정리를 마친 뒤 비로소 커피 한 잔을 내려 허리를 펴고 창밖을 바라본다. 그 삶의 99.9할이 불행으로 점철돼가고 있다 하더라도 0.1할의 희망을 유지하는 건 어쩌면 그런 일상의 리듬을 놓지 않는 면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활의 디테일을 만들어내는 배우가 차승원이라는 사실이 흥미롭고 생경했다.


“만약 이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저는 어디서든 열심히 했을 거예요. 그거 하나는 자신해요. 이 직업을 갖고 살지 않았다 해도 굶지는 않았을 거라고. 이거 아니면 아무것도 못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거죠.” 저절로 수긍이 된다. 이미 나영석 PD의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할 줄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많은 ‘차줌마’로서 범상치 않은 생활 능력을 증명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모델이, 배우가 아닌 삶을 세상이 허락했을까? 우연히 눈에 띄어 모델이 된 건 과연 우연이었을까? 그럴 리가. 적어도 차승원은 세상이 가만히 내버려둘 이목구비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삶을 결정짓는 건 우연도, 운명도 아니다.


“보통 운칠기삼이라고 하잖아요. 운이 7이고, 재주가 3이라는 거지. 그런데 저는 운구기일이 맞는 거 같아요. 운이 훨씬 많이 따라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9의 운이 오려면 노력을 훨씬 많이 해야 돼요. 9의 운을 받으려면 1을 훨씬 공들여서 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거죠. 운은 느닷없이 저절로 굴러오는 게 아니에요. 절대 아니지. 저는 불가항력이라는 말을 믿지 않아요. 끝까지 해봐야 되는 거예요. 적어도 스스로 창피해지고 싶진 않거든.” 중요한 건 9가 아니라 1이라는 주관을 전하는 차승원의 언어는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명확하고, 명쾌했다.


(<VOGUE KOREA> 12월호에 쓴 인터뷰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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