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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세상만상

경청과 성숙의 시간

나이 들어간다는 건 무르익어가는 시간으로 접어드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by 민용준

상실과 고통과 고립과 무력, 나이가 들어간다고 하면 익숙하게 떠오르는 단어들은 대체로 이렇다. 하지만 과연 늙어간다는 건 꼭 그런 일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더욱더 깊이 받아들이고 경청할 수 있는 성숙하고 충만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나 혼자 산다. 유명한 예능프로그램 제목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혼자 사는 1인 가구수가 사상 처음으로 1000만 세대를 돌파했다. 지난 9월 행정안전부에서 발간한 ‘2025 행정안전통계연보’에 의하면 2024년 전체 세대수 2411만 8928세대 중 1인 가구는 1012만 2587세대로 나타났다. 전체 세대의 과반에 가까운 40% 이상 세대가 1인 가구라는 말이다. 한때 전통적인 대가족 단위에서 벗어난 핵가족화의 지표처럼 여겨지던 4인 가구는 이제 대가족으로 분류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현재 4인 이상 가구는 394만 세대로 지난 4년 사이 70만 세대 가깝게 감소했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5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올해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1051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UN에서 제시하는 기준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가 총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할 경우 초고령사회로 구분한다. 한국은 이미 엄연한 초고령사회다. 그리고 65세 이상 고령인구의 가구 형태 중 1인 가구는 37.8%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한국 사회의 1인 가구 세대가 증가하는 경향은 이런 세태와 깊게 유관하다. 혼자 사는 노인이, 혼자 늙어가는 노인이 늘어가는 상황이 1인 가구 증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건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외롭고 고독해질 확률이 높은 일이 되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혼자 산다 하여 모두가 다 외롭고 고독해지는 건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고독을 벗 삼아 유유자적 자신만의 시간을 영위하며 잘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든다는 건 끝내 손쉽게 익숙해질 수 없는 상실과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사연일 것이다. 쇠락한 기운과 쇠퇴하는 상황 속에서 함께 늙어가는 처지였던 벗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을 경험해야 하고, 무릎이 뻣뻣해서 쉽게 일어서기도 걷지도 못하는 상황을 인지해야만 한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을 홀로 느릿하게 견디고 있다는 박탈감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타인의 손을 빌려야 할 일도 늘고, 마음을 나눌 상대에 대한 갈망 또한 절실해진다.


영화 <줄스>는 마치 <E.T.>의 노인 버전 같은 영화다.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마을 분턴에서 살아가는 노인 밀턴(벤 킹슬리)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집 뒷마당에 추락한 UFO로부터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미지와의 존재와 조우한다.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관계 당국에 신고하니 되레 장난전화를 하지 말라는 역성만 듣게 될 뿐이다. 그 와중에 기력이 약해진 것으로 보이는 외계인을 내버려 둘 수도 없다. 결국 그를 집에 들인 밀턴은 외계인에게 음식을 내어주고 유일하게 사과를 먹는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때가 되면 사과를 내어준다. 좀처럼 말이 없고, 사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외계인과 뜻밖의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다 각기 다른 이유로 그의 집을 방문한 두 노인 샌디(해리엇 샌섬 해리스)와 조이스(제인 커틴)에게 외계인을 소개하게 되고 세 노인은 논의 아닌 논의 끝에 외계인에게 줄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된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외계인과 세 노인의 관계를 다룬 <줄스>에서 우주 SF는 하나의 수단이다. 매일매일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던 밀턴은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계인 줄스를 만나 예정에 없던 사건들을 겪게 된다. 딱히 친분을 느끼지 못했던 노인들과 함께 외계인을 돌본다. 샌디와 조이스 역시 마찬가지다. 줄스를 만나기 전까진 매일 같이 별 일 없이 살던 노인들이었다. 시의회에 출석해서 동네에 필요한 개선책이나 요구하는 것이 소일거리였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외계인의 출현은 노인들의 일상에 화색이 돌게 만드는, 그야말로 특별한 사건이다. 덕분에 마주칠 때마다 인사 정도나 나눌 뿐 별다른 대화를 나눈 적 없던 세 노인은 매일 같이 만나 대화를 나눈다. 줄스가 나타난 덕분에 일어난 일이다.


“외계인은 노인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바를 선사한다. 노인들에게는 친구나 연인처럼 좋은 경청자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외계인 줄스는 완벽한 경청자다. 세 노인은 평소에 서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줄스처럼 완벽한 경청자가 있을 때 그럴 수 있음을 깨닫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영화 <줄스>를 연출한 마이클 터틀타웁 감독의 말처럼 외계인 줄스는 노인들의 곁에 그저 묵묵히 자리할 뿐이다. 세 노인은 말이 없는 외계인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한다. 그리고 결국 서로 대화를 나누고 긴밀한 관계로 거듭난다. 말이 없고, 말이 통하는지 알 길이 없는 외계인이 되레 관계를 잇는 다리가 된다. 특별히 표현하는 바가 없지만 묵묵히 들어준다는 인상만으로도 모종의 위로가 된다.


캐나다의 철학교수 다이앤 엔스의 저서 <외로움의 책>에서는 외로움이 ‘다른 사람과의 친밀감이나 밀접함이 충족되지 않을 때 이를 갈구하는 욕망’이라고 정의한다. 혼자 있다고 하여 모두가 다 외로움을 느끼는 건 아니다. <외로움의 책>에서도 ‘고립이 곧 외로움은 아니다’라고 하며 고립의 필요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는 것도 고통이 되고, 너무 오랫동안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것도 고통이 된다’고 설명하며 ‘함께하면 함께 집단에 갇힐 수 있’고, ‘혼자라면 자기 안에 갇힐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고, 사람의 균형감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설득한다.


자명한 건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혼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도 결국 함께 살아가는 세계 속의 일원이라는 자각을 통해 명징해지는 바람이다. 살아가는 이상,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외로움을 견디고 이기는 기술을 습득하는 이도 있겠지만 이 역시 외로움을 의식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외로움에 익숙해진다는 것도 자연스러운 합리다. 나이가 든다는 건 혼자가 되는 일에 익숙해지는 삶을 살아갈 확률이 높아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점차 부고가 익숙해지는 나이가 되고, 절친한 벗의 타계 소식을 듣는 일이 생기고, 서서히 관계로부터 고립되는 기분을 느껴야 한다. 한적한 시간은 늘어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름이 드물어진다. 심지어 적절한 노후자금을 확보하지 못한 노인이라면 삶이 짐처럼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베레나 카스트 박사가 쓴 <나이 든다는 것에 관하여>에서는 ‘죽음의 기술은 삶의 기술’이라 정의하고, 늙어간다는 것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제안한다. ‘나는 노화를 질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각각의 도전 과제가 주어지는 모든 삶의 단계처럼 특별한 도전 과제가 주어진 지극히 정상적인 삶의 한 단계라고 생각한다’는 필자는 나이 들면서 얻게 되는 경험과 감상을 새롭게 받아들이길 권한다.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삶의 질이 높아진다. 하지만 노년기에는 점점 늘어 가는 고독을 받아들이다 보면 이것이 외로움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애도, 특히 끝을 향해 가는 삶에 대한 애도는 우리 인간이 가진 가장 훌륭한 자산이기도 하다. 우리는 애도하는 마음을 통해 추억과 지나간 것에 대한 감사함, 무언가를 계속 주고 싶은 소망, 아쉬움을 느낀다.’

어차피 누구나 끝내 죽는다. 태어난다는 건 대체로 불공평한 일이지만 죽는다는 건 모두에게 공평한 일이다. 늙어간다는 건 어쩌면 그런 죽음으로 수렴하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물론 죽음을 유쾌하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죽음을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단계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거기까지 잘 가보자는 마음이 동할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그 과정에서 느끼는 불안이나 고독에 짓눌리거나 잠식당하는 대신 받아들이고 감각할 수 있는 여유가 깃드는 것을 충분히 만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늙어간다는 것을 포용할 수 있다면 불가능하게 느꼈던 연결과 발견을 회복하거나 다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외로움에 고립되는 대신 타인의 외로움을 위로하고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진짜 행위로 실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로 의존하는 것은 우리의 사회적 삶에 속하며,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는 삶을 사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나이 든다는 것에 관하여>에서 말하듯, 의존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건 의지할 수 있는 존재를 찾거나 의지가 될 수 있는 역할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의존하고, 의존할 수 있는 상대가 되면서 자신의 현재를 명확하게 짚고 살아갈 수도 있는 법이다. 이는 나이기 많고 적은 것과 무관한 일이다. 오히려 새로운 관계를 활발하게 맺게 되는 어린 시절에 더욱 현격해지는 진리다. 다만 그 시절에는 그러한 변화가 너무 익숙하고 당연해서 깊게 고찰하기 어렵지만 상실과 고립이 익숙해질 무렵에는 자연스럽게 이입할 수밖에 없는 일상의 감각으로 자리 잡게 된다. 고로 그런 상황을 허무나 고통으로 받아들이기보단 가능한 변화로써 끌어안을 수 있다면 되레 노년의 삶도 그만큼 새로운 나날로 다가올 것이다.


“젊은이들이 이 영화에 반응한다는 점이 정말 놀라웠다. 노인에게도 젊은이에게도 진짜 감정은 전해지기 마련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다는 게 흥미로웠다.” 마크 터틀타웁의 말처럼 <줄스>가 나이와 무관하게 공감대를 얻는 영화가 된 건 결국 늙어간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필연적인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나이가 든다는 건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사안이다. 어쩌면 미리 두려워지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마땅히 받아들일 일이라 여기면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도 너르게 열릴 것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고로 조금씩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함께 가능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세상과 타인에 대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면 스스로의 삶도 보다 아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함께하는 삶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 건 끝내 남이 아닌 나를 위한 일일 것이다.


(미래에셋증권에서 발행하는 VIP매거진 <세이지클럽>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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