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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un 23. 2018

[어떤人터뷰]박찬욱 감독

박찬욱의 완성을 칭송하는 세상에서 여전히 미완의 박찬욱을 보는 박찬욱.


2016년 6월 1일에 <아가씨>가 개봉한 뒤로 감독님이 촬영 현장에서 직접 찍은 사진을 모은 사진집 <아가씨 가까이>와 시나리오집 <아가씨 각본>이 출간됐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아가씨 아카입>은 <아가씨> 제작 과정에 관한 백서입니다. 국내에서 영화 한 편을 두고 이렇게 많은 관련 서적이 나온 건 처음일 겁니다.

사실 <아가씨 아카입>은 영화 제작 당시부터 기획한 것이었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같은 아트북을 내달라는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기왕 이렇게 기획된 백서에 사진이나 미술적인 요소도 많이 넣으려 했죠. 물론 그래서 책값이 조금 올라갈 수밖에 없었지만 <아가씨>를 좋아하는 관객들이 사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거예요. 문화 소비의 양태가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영화와 관련된 상품을 사서 즐기고 소장하는 관객이 있다는 의미이니까요. 그게 아니면 <아가씨 각본>을 출판하거나 OST를 LP로 내겠다는 생각조차 못했겠죠.


요즘 한국 영화계에 박찬욱이라는 감독의 경력을 되짚거나 기념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재개장한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는 감독님에게 헌정하는 박찬욱관을 개관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50대 중반에 벌써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만.(웃음) 각종 해외 영화제에서 공로상 수상자로 초청하고 싶다든가, 회고전을 열겠다든가, 이런 제안이 많이 들어오는데 몇 번 초청에 응한 적도 있어요. 처음에는 싫었는데 이젠 체념하게 됐어요. CGV의 헌정관 제안도 자포자기 심정으로 받아들인 거죠.(웃음) 대신 저도 때이른 원로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하니 몇 가지 조건을 걸었어요. 기술적으로 최상의 음향과 영상을 보장해달라. 그리고 음향과 영상 수준을 승인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 때때로 내가 프로그래밍한 기획전을 열고, 내가 찍은 사진도 인화해 걸고 정기적으로 교체할 수 있도록 해달라. 그럼 극장이 존재하는 한 개인전을 계속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어쨌든 스스로는 영화감독으로서 중간 점검 같은 시기를 보내는 것이라 규정하고 있어요.


<아가씨>는 미장센 자체가 하나의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입니다. 아나모픽 렌즈로 촬영해서 2.39:1의 와이드 스크린 비율로 상영하는 작품인 만큼 화면을 채우는 미장센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고요. 그만큼 류성희 미술감독의 공헌도가 높은 작품이었죠.

사실 예전부터 공이 컸지만 <아가씨>에서 가장 컸죠. 칸 영화제의 벌컨상은 번외 특별상으로 분류되지만 본래 주요 부문에 포함된 상이었어요. 배우나 감독, 각본가가 아닌 기술 파트 종사자에게 주는 가장 큰 상이죠. 대개 촬영감독이 받는데 류성희 미술감독이 수상했다는 건 <아가씨>를 채운 미장센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걸 인정받은 거예요.


류성희 미술감독 외에도 오랫동안 감독님의 영화에 힘을 보탠 조력자가 많습니다. <아가씨 아카입>은 박찬욱이라는 감독에게 조력해온 테크니션들을 관객에게 소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값진 기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에게도 이 책이 소중한 거예요. 관객에게 그들의 기여를 알릴 수 있는 기회니까요. 그리고 영화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도 가치 있는 자료라고 생각해요. 이런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물론 기획하기 어려운 작업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필진을 섭외하고, 인터뷰도 여러 차례 해야 하죠. 사진이나 시각 자료도 많이 사용하고 싶어서 미술팀에서 작업한 다양한 스케치와 시대 고증을 위해 참고한 각종 자료를 모아 출판사에 전달했어요. 편집 디자인도 복잡했고요.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죠.


<올드보이> 이후로 오랜만에 영화로 재회한 임승용 대표는 <아가씨 아카입> 발행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애초에 그 친구 기획이었으니까요. <올드보이> 당시에도 <올드보이 백서>를 냈는데,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물로 남기는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아가씨>도 그렇게 하자고 기획했던 거예요. 출판사 편집자들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영화사 제작부의 일도 많아지는 셈이니 제작사 대표에게 그런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죠. 제가 한 일은 그저 출판사를 연결해준 것 정도예요.

책 말미에 임승용 대표가 쓴 에필로그가 수록됐습니다. <올드보이> 이후로 10년이 지난 뒤에야 다시 감독님과 영화를 만들어보니 <올드보이> 때보다 발전한 것을 확인했다면서 스스로를 돌아봤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오랜만에 다시 만나면 그 사람의 변화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죠.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지도 느끼고요. <올드보이> 때만 해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각본을 수정하고 제 마음대로 했어요. 그런데 이젠 제작자에게 그런 사실을 알리고, 의견도 구하고, 동의를 얻은 뒤에 실행해요. <아가씨> 촬영 중 한번은 촬영이 급한 탓에 그 과정을 깜박하고 뒤늦게 임승용 대표한테 양해를 구했는데, 아마 임승용 대표는 그런 변화가 발전적이라 느꼈나 봐요.


혹시 본인 스스로도 그런 변화를 체감하나요?

사실 <올드보이> 연출 당시에 욕심이 너무 많았어요. 원하는 걸 꼭 얻어야 한다는 고집이 강했죠. 그러다 보니 제작자도 많이 괴롭혔고요. 물론 지금도 그런 욕심이 있지만 예전보단 준비를 많이 하고 생각도 많이 하면서 시간과 돈 그리고 사람들의 능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요령이 생긴 거죠. 예를 들면 <올드보이> 때만 해도 촬영 횟수를 초과하거나 더 요구하는 게 당연한 시대였죠. <아가씨>는 총 70회차를 목표로 촬영을 시작했는데 프로듀서들은 제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며 90회차는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저도 예전의 내가 아니라면서 70회차로 우겼죠.(웃음) 결국 68회차에서 끝났어요. 목표보다 2회나 줄였죠.


그만큼 신뢰할 수 있는 동료들과의 경험이 쌓인 덕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면도 있죠. 영화도 예술 창작이지만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과 노동이 필요한 일이에요. 가끔 감독 개인의 예술적 충동이나 영감을 미친 듯이 따라갈 수도 있겠지만 영화를 10편이나 찍은 감독 입장에서는 보다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을 덜 고생시키는 쾌적한 방법을 찾고자 고민할 수밖에 없어요.


미국에서 <스토커>를 연출한 경험도 그런 변화에 일조하지 않았을까요? 프리프로덕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합의된 제작 방향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프로덕션 과정이 있으니까요. 제작 과정의 변수를 통제하는 제작자의 권한도 강하고요.

확실히 그렇죠. 프리프로덕션 기간도 짧고, 촬영 횟수도 굉장히 짧게 주어지고, 감독의 즉흥적인 판단으로 모든 과정이 바뀌지 않아요. 소위 작가주의 감독이나 작가의 창작력을 위축시킨다는 측면에선 단점도 있고, 그래서 이를 싫어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분명 거기서 배울 점도 있는 거 같아요. 창조적으로 위축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즐거운 근무 환경을 만드는 것 또한 이뤄야 할 목표니까요.


<아가씨>는 120억원이 넘는 제작비가 투자된 작품입니다. 감독님의 작품 중 가장 많은 예산을 쓴 영화죠. <아가씨 아카입>을 보면 PD들의 손익분기점에 대한 긴장감이 적지 않았다는 게 느껴집니다. 감독님에게도 수익에 대한 긴장감이 있었나요?

최대 관심사였죠.(웃음) 남의 돈을 그렇게 많이 갖다 썼으니 잃지 않게 만들어야 하니까. 최소한 은행 이자보단 높은 이익을 돌려줘야 <아가씨>에 투자한 보람이 있잖아요. 그게 상업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직업윤리죠. 그래야 다음 영화를 투자받을 자격이 생기고. 사실 <아가씨>는 여자들 간의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불매운동까지 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걱정거리가 많은 영화였죠.


<아가씨>에서 김민희 씨와 김태리 씨의 베드신을 촬영할 당시에 여배우들이 부담감을 느끼지 않도록 무인 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배려한다고 해도 여배우들에게 정사 장면은 정말 힘들어요.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죠. 그리고 원격 조정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카메라나 장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죠. 그래서 기술이 좋은 거예요.(웃음) 기술의 발전이 미학적 성취를 보장하기도 하지만 액션 신에서 배우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에도 유용하잖아요.


최근 영화계에서 불합리한 여성 영화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남성 감독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할 수 있는 얘기를 하는 건 당연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관심이 부담스럽기도 할 텐데요.

그렇진 않아요. 물론 이런 문제에 대해 말할 때 걱정되는 건,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이미 어떤 실수를 했거나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지는 않은지, 누군가에게 본인이나 잘하라는 말이나 듣게 되는 건 아닌지, 이런 것들이죠. 그게 아니라면 여성들이 느끼는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영화계는 제 직장이니 여기서 차별이 조장되고 있다면 저도 도덕적 책임을 느껴야 하죠. 이런 얘기를 자꾸 해야 제 스스로도 조심하게 될 거고요.


<박쥐> 이전까지의 여성 캐릭터는 남성들의 세계에 힘을 보태거나 박살 내는 도구적 존재였다면 <박쥐> 이후부터는 적극적으로 자기 세계를 개척해나가는 인상입니다.

<박쥐>나 <스토커> <아가씨>의 여자들은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과감하게 떠나는 사람들이죠. 세상으로부터 탈주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런 면에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복수 3부작의 에필로그 같으면서도 <박쥐> <스토커> <아가씨>의 프롤로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복수극이라 할 수 있고, 그 이후의 작품들과 연결하면 소녀의 성장을 다루니까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아가씨>는 섹스 중에 끝나는 영화라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다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임수정)은 망상 속에서 욕망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굉장히 불쌍하고 이중적인 존재죠.

<공동경비구역 JSA>부터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스토커> 그리고 <아가씨>까지, 여성 캐릭터는 언제나 중요한 역할로 존재했습니다. 여성 캐릭터를 잘 활용하면 이야기에 남다른 특이성을 확보하고 특별한 흥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사례를 거듭 만들어온 인상이랄까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중립국 감독위원회에서 파견된 여성 수사관 소피(이영애)가 말씀하신 부분에 어울리는 사례라 봐도 좋겠습니다. 본래 영화의 원작 소설인 <DMZ>에서 남자인 캐릭터를 제가 우겨서 여자로 바꾼 거니까요. 단순히 생각해봐도 남자만 나오는 군대 영화는 너무 답답하지 않나요?(웃음) 더 중요한 건 배타적인 한국 사회, 심지어 남성들만 우글거리는 군대 조직이라면 외국에서 온 수사관이 백인과의 혼혈인이고 여자라면 깔보고 무시하며 비협조적으로 굴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렇다면 극의 긴장감이 살아날 수 있죠. 게다가 남한과 북한 병사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그런 태도가 드러난다면 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까지 닿을 거라 생각했어요. 체제가 다른 사회임에도 그런 면에서는 비슷하다는 거죠. 게다가 이수혁(이병헌)이나 오경필(송강호)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서도 보이는 공통점이라면 더욱 확실해지는 것이고요. 그들이 처음에 노골적으로 소피를 무시하는 건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겁니다. 결국 그런 현실적인 긴장감이 드라마의 긴장을 만들어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이후로 여성 캐릭터가 극을 끌고 나가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차 강해졌는데, 한편으론 의식적으로 노력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친절한 금자씨>부터 정서경 작가와 공동으로 집필한 각본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정서경 작가와 <친절한 금자씨> 집필을 시작하기 전에 <박쥐>의 초안 작업부터 진행했다더군요.

처음에는 뱀파이어가 되는 신부의 이야기를 몇 장 써놓은 게 있어서 그걸 발전시킬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정서경 작가에게 <박쥐>를 맡겨둔 동안 저는 <친절한 금자씨>를 쓰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친절한 금자씨> 제작이 급해진 거죠. 복수를 주제로 한 영화 세 편을 완성하겠다고 공언해버려서.(웃음) 게다가 <올드보이>를 발표한 뒤 세 번째 복수극의 주인공은 여자로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터라 여자 작가에게 맡겨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때마침 옆에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박쥐>에서 당장 급한 <친절한 금자씨>로 선회한 거죠.


<올드보이> 이후에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복수극을 만들고 싶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올드보이>는 미도(강혜정)만 진실을 모르는 채로 끝나잖아요. 물론 그래야만 하는 이야기였지만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모두 다 알게 된 진실을 그녀만 모른 채로 끝내니까 왠지 미안하더라고요. 여자만 아무것도 모른 채로 영화를 끝냈다는 게 찜찜했어요. 그러니 여자 주인공의 복수극을 만들면 그런 마음이 풀릴 거 같았죠.


김지운 감독님과의 인터뷰에서 전작에 대한 반대급부가 차기작 구상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길 들은 기억이 나네요. 감독님에게도 그런 경우가 있을까요?

전작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작을 구상할 때가 많아요. 물론 이건 반작용에 해당하는 사례는 아니겠지만 <공동경비구역 JSA>는 남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분단에 관한 이야기였으니 또 다른 문제인 계급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복수는 나의 것>을 만들었죠. 그리고 <복수는 나의 것>은 너무 건조하고 냉정한 영화였으니, 화산이 폭발하듯 뜨겁고 강렬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져서 <올드보이>를 만들었어요. 송강호와 만났으니 최민식을 만나고 싶기도 했고. 그리고 아까 말한 것처럼 <친절한 금자씨>는 여자 주인공을 만들고 싶어졌고. 이런 식이었죠. <박쥐>는 오래된 구상을 기회가 왔을 때 실현한 셈인데 제작 과정에서 배우나 스태프와 일하는 게 너무 편하고 즐겁고 행복했기 때문에 이 상태에 안주하면 안 되겠다는 자각이 생겼어요. 그래서 외국으로 나가서 찍어야 되는 <스토커>를 선택했죠. <아가씨>는 <스토커> 이전에 기획한 작품이었고요.


정서경 작가와 공동 각본을 쓰기 시작한 <친절한 금자씨>부터 비중과 역할이 보다 주도적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감독님의 내면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정서경 작가와의 작업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없을까요?

그런 면도 분명 있을 거예요. 다만 어디부터 어디까지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죠. 종종 저를 잘 아는 사람들도 “이 아이디어는 정서경 작가 거고, 이건 감독님 거죠?”라고 물어보는데 틀릴 때가 많아요. 제 관점에서 정서경 작가는 여성적이라기보다는 동화적 특성이 있는 거 같아요. 반대로 폭력과 관련된 부분은 확실히 제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박쥐>와 <아가씨>의 공간성에는 비교할 만한 지점이 있는데요. <박쥐>는 일본식 적산가옥에 자리한 한옥집이 공간 배경이고 <아가씨>는 영국식, 일본식, 한식 가옥이 나열된 저택이 주된 공간 배경이 됩니다. <박쥐>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한데 버무려서 시공간에 대한 감각을 뭉개는 느낌이라면 <아가씨>는 각기 다른 것들이 혼재된 시대상을 오히려 명징하게 부각시키는 느낌이에요. 결국 <박쥐>의 미장센은 뒤죽박죽의 조화로움을 보는 재미로 다가온다면 <아가씨>의 미장센은 정갈한 부조화를 보는 재미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박쥐>에서는 일본식 가옥에서 한복집을 하면서 보드카를 마시고 마작을 합니다.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는데 그게 제가 생각하는 한국적인 풍경 중 하나예요. 특별히 좋다거나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뒤섞인 채로 자연스럽게 존재한다는 거죠. 그리고 <아가씨>는 서로 다른 문화가 섞여 있지만 서로 다른 채로 그냥 존재한다는 걸 의식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대사로 소개하는 거죠. 여긴 영국식이고, 여긴 일본식이고, 이렇게. 그럼으로써 한국 근대사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폭력적으로 이식된 이국적인 풍경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가씨>를 3D 영화로 만들 계획도 있었다더군요.

잘 만든 3D 영화는 기막힌 영화적 경험을 주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라이프 오브 파이>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같은 영화가 그렇죠. 물론 <아가씨>는 불덩어리가 날아오는 영화는 아니지만 입체적인 이미지가 이야기의 현실감을 높여줄 수 있을 거 같았거든요. 액션이나 판타지 같은 장르물이 아닌 일반 드라마에서 입체 영화라는 형식이 어떤 새로움을 줄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그리고 <아가씨>는 관객들의 지적 활동을 유도하면서 실제와 거짓 사이에 놓인 진실을 머릿속으로 구성해내는 재미를 주는 영화이기 때문에 입체 영화였다면 보다 풍부한 변수들을 배치할 수 있어서 관객들이 구성의 재미를 더 크게 느낄 수 있었을 거 같아요.


지난 5월부터 8월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까르띠에 현대미술 재단의 소장품을 공개하는 <하이라이트> 전시가 열렸는데 여기서 동생 박찬경 감독과 함께 작업한 작품 <격세지감>을 상영했습니다. 남양주종합촬영소에 있는 <공동경비구역 JSA> 판문점 세트에서 3D 입체 영상으로 촬영한 작품인데요, <아가씨>에 대한 아쉬움을 <격세지감>으로 달랜 걸까요?

그런 셈이기도 하죠. 그런데 <격세지감>은 <공동경비구역 JSA>와 같은 세트에서 찍었지만 전혀 다른 작품이란 사실이 중요한 영화예요. <공동경비구역 JSA>가 인공적인 세트 느낌을 감춰야 하는 영화라면 <격세지감>은 오히려 그걸 드러내야 하는 작품이었죠. 그런데 두 작품이 각각 제작된 2000년과 2017년 사이에 한반도의 남북한 상황은 변한 게 없잖아요. 그런 현실감이 두드러지도록 <공동경비구역 JSA>와 더욱 이질적인 차이를 느끼게 만들 장치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입체 영화를 생각했죠. 그리고 <공동경비구역 JSA>의 엔딩 시퀀스에서 가장 유명한 이미지인 엔딩 컷 장면에서 정지하면서 그것이 오픈 세트에 인화된 사진으로 돌아오잖아요. 그 부분이 <격세지감>의 핵심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어요. 그래서 3D 입체 영상이 필요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결국 <아가씨>에선 자연스러운 표현 양식으로 3D 입체 영상을 고려했다면 <격세지감>에서는 인공적인 장치임을 의식하게 만드는 요소로 3D 입체 영상이 필요했다는 의미 같습니다.

그렇죠. <격세지감>의 입체 효과가 과장돼 보이는 것도 그래서죠.


<격세지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운드를 연출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42개의 스피커로 구현한 입체적 사운드가 마네킹을 동원해 인위적으로 연출한 영상 위로 오버랩되는 상황에서 온전히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영화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건 바로 그 사운드입니다. 그래서 ‘영화에서 사운드란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답변처럼 느껴지기도 헀는데요. <스토커>나 <아가씨>를 비롯한 기존의 연출작들을 보면 영화상에서 이미지와 사운드가 조응하는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각별히 공을 들이는 편이기도 했죠.

이미지와 사운드가 어울려 상승 작용을 일으키는 것도 중요하고, 때로는 서로 어긋나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때도 필요하죠. 한편으론 너무 사실적인 사운드 때문에 실제 현장에 있는 듯한 체험을 할 수도 있고, 반대로 과장된 사운드를 선택해서 감독이 원하는 방향으로 관객의 주의를 돌리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습니다. 사운드의 활용은 항상 어떤 이미지를 만드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인 것이죠.


개인적으로는 <스토커>에서 메트로놈의 리듬감과 함께 좌우로 흔들리는 조명 아래에서 가로로 이동하는 인디아(미아 바시코브스카)를 보여주는 시퀀스를 좋아합니다. <아가씨>에서도 히데코가 밥알을 하나씩 집어들 때마다 계단을 오르는 발을 교차 편집해 보여줄 때의 리듬감이 인상적이었고요. 공감각적 쾌감을 일으키는 연출 방식이랄까요.

영화는 크고 작은 단위에서의 리듬이 중요해요. 항상 그런 리듬감을 생각하며 편집하고 음악을 써야 하죠. ‘특정한 시퀀스에서 어떤 리듬을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은 각본부터 연기를 포함한 모든 면을 종합해 계산해야 답할 수 있어요. 그런 리듬감이 잘 형성돼 있다면 3시간짜리 영화라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되죠. 결국 어느 단계까지 발전한 감독들은 그런 세심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 단계 더 질적인 비약을 이룬다고 보고요.


결국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이냐라는 총합적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영화에서 어떤 사운드를 구현하는가?’를 비롯한 수많은 기술적 질문에 답해나가는 순간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기술을 도입하는 데에서 그렇게 보수적인 감독은 아닌 거 같아요. 실제로 디지털 믹싱이나 디지털 색 보정은 국내에서 제가 아주 빨리 시도한 편입니다. 제가 워낙 문과 타입이라 기술적인 실무까지는 몰라도 테크놀로지를 미학적으로 활용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많아요.


평소 ‘딸바보’라 불릴 정도로 딸에 대한 애정을 피력해왔는데, 딸이 <아가씨> 미술팀 막내 스태프로 참여했더군요.

영화 현장에서 한번 일해보고 싶다고 하길래 수락했죠. 영화 경험은 없지만 미대생이니까 미술팀 막내 정도의 자격은 있었고, 용돈도 벌어야 하니까. 그래서 류성희 감독에게 빡세게 굴리라고 했는데 정말 제대로 굴렸나 봐요.(웃음) 다신 영화 현장에 얼씬도 하지 않을 거 같아요.


영화 일에는 관심도 갖지 않게 하려고 의도하신 건 아니겠죠?(웃음)

어차피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에요. 다만 현실은 명확히 알아야죠. 미술팀이 원래 고생이 많아요. 특히 류성희 감독의 미술팀은 정말 힘들어요.


최근 재개장한 CGV 용산아이파크몰에 박찬욱관이 개관하면서 감독님의 전작들을 상영하는 특별전이 열렸습니다. 동시에 장 피에르 멜빌의 <그림자 군단>을 비롯해 감독님께서 추천하신 고전 7편도 상영합니다. 그중 인상파 거장인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아들이자 영화감독인 장 르누아르가 연출한 <암캐>도 포함돼 있죠. 감독님의 부친은 건축가였지만 미술에 관심이 많고 실제로 그림을 그린다고 들었습니다. 왠지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장 르누아르의 관계가 떠오르더군요.

아버지는 건축가로선 은퇴했지만 지금도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예요. 어린 시절, 주말이나 휴일에 아버지, 동생과 함께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를 다니던 기억이 많이 남아 있어요. 작품 품평도 해주셨고, 그때 나눈 대화가 기억에 남아 있죠. 지금의 제 세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이 컸죠.


영화감독인 형과 현대미술을 창작하는 아티스트인 동생이 ‘파킹찬스(PARKing CHANce)’라는 이름으로 협업해 영상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재미있는 일이죠. 사실 저도 미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동생의 재능이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포기했어요. 그런데 동생과 재능을 비교해서 진로를 정할 필요까진 없었던 건데, 어렸던 거죠. 뭘 몰랐어요.(웃음) 현대미술이 단순히 손재주만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그래서 영화를 하게 된 거지만. 동생이 미국으로 미술 유학을 떠날 때, 미술 말고 영화 유학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기도 했어요. 코엔 형제처럼 함께 영화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아서. 결국 어떻게든 이뤄진 셈이죠. 나이가 들면서 동생의 작품 세계가 영화에 접근해왔고, 저는 사진을 찍으면서 미술로 접근해갔고, 결국 가운데서 만난 셈이죠.


정리해고당한 남자가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를 척살한다는 내용의 소설 <액스>를 차기작으로 연출하려 했는데 투자 문제로 무산됐다고 들었습니다.

살인에 서툴던 아마추어 살인자가 점차 살인에 능숙해지고 무자비해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인데, 만약 제작이 됐다면 한국 개봉명은 <모가지>라고 하고 싶었어요. 마케터들은 싫어했겠지만.(웃음) 사실 돈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적합한 비용을 구할 수 있느냐가 문제인 거죠. 국내외에서 투자하겠다는 회사는 있는데 제가 원하던 회사에서 조달하진 못했어요. 물론 적은 돈으로 열심히 찍을 순 있어요. 하지만 좋은 각본과 기획을 갖고 있었음에도 너무 가난하게 찍어서 작품이 망가지는 걸 많이 봤어요. 예산에 맞게 각본을 고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아직 마땅한 수가 없으니 차라리 미뤄두는 게 낫다고 판단했죠.


봉준호 감독의 <옥자>를 투자 제작한 넷플릭스에도 관심이 있으신가요?

넷플릭스는 공격적인 투자를 하면서도 감독의 권한을 많이 보장해주는 편이라고 들었어요. 개인적으론 시즌제 드라마에도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조연까지 하나씩 매만져가며 캐릭터 탐구를 하기에도 충분한 호흡이 주어지니까요. 이미 미국의 좋은 작가들은 케이블 채널이나 스트리밍 서비스업체로 많이 이동했어요. 넷플릭스의 드라마 <집시>에 출연한 나오미 왓츠는 최근에 한 인터뷰에서, 좋은 작가들이 다 그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따라간 것뿐이라고 답변한 바 있죠.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저와 비슷한 처지의 감독들이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찍거나 TV나 스트리밍 서비스업체에서 제작된 미니시리즈를 연출하는 방향으로 산업이 재편되는 상황 같아요.


데이비드 핀처도 넷플릭스와 같이 계속 시리즈물을 만들고 있죠.

사실 핀처는 만들고 싶은 영화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입장일 거예요.(웃음) 드라마 연출에 재미를 붙인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저라면 전체 에피소드를 다 연출하길 선호할 텐데 핀처는 시즌 초반의 에피소드 한두 개만 연출하죠. 어쩌면 그것도 좋은 작전이에요. 유명 감독이 일부 에피소드만 찍게 되면 자신이 연출하지 않는 다른 에피소드에 비해 더 많은 예산을 끌어다 쓸 수 있거든요. TV 드라마치곤 꽤 높은 예산으로 자기 에피소드를 찍을 수 있는 거죠.


혹시 감독님이 연출한 TV 시리즈를 볼 수도 있을까요?

가능한 이야기죠. 안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저도 궁금하네요.


(이 인터뷰는 <에스콰이어> 한국판 2017년 9월호에 실린 기사를 재편집했다. 인터뷰 시점에 대한 이해 차원에서 설명하자면, 이 인터뷰는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으로 예정돼 있던 <도끼>(가제)라는 작품의 제작이 무산됐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로 진행됐고, 이 인터뷰 기사가 나간 이후로 박찬욱 감독은 2018년에 공개가 예정된 영국 BBC와 6부작 드라마 연출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박찬욱 감독은 올해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진행 중인 '파킹찬스' 전시에서 공개된 단편 <반신반의>를 발표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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