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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Sep 02. 2018

<몰리스 게임> 우아한 박력

<몰리스 게임>은 실패를 징검다리 삼아 전진한 여자의 이야기다.

<몰리스 게임>은 할리우드의 유명한 극작가 에런 소킨의 연출 데뷔작이다. 거액의 판돈을 걸고 벌이는 포커 게임을 의미하는 하이스테이크 포커 클럽을 운영하던 몰리 블룸에 관한 영화다. 몰리 블룸은 유년 시절에 입었던 심각한 부상을 극복하고 미국 여자 스키 대표팀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한 대표팀 선발전에 나섰다. 당당하게 대표팀에 선발돼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목에 건 후, 하버드 법대에 진학해 여성 사업가로서 탄탄대로의 인생을 밀고 나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몰리 블룸은 올림픽에 출전하지도, 법대에 진학하지도 못했다. 세계에서 가장 진입 장벽이 높다고 알려진 하이스테이크 포커 클럽을 운영했다. <몰리스 게임>은 바로 그녀가 쓴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사실 에런 소킨은 <몰리스 게임>을 직접 연출할 의사가 없었다. “내가 쓰는 다른 모든 극본과 마찬가지로 <몰리스 게임>에도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최고의 감독이 연출을 맡아주길 원했다.” 그가 생각한 최고의 감독은 데이비드 핀처였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좀처럼 마땅한 감독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제작자 에이미 파스칼이 그가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 “직접 해볼 생각은 없는 거야?” 크리스마스 휴가 직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에런 소킨은 휴가가 끝나고 그 제안을 수락했다.


에런 소킨의 각본에는 남다른 특징이 있다. 에런 소킨은 인물의 성공을 찬양하는 데 관심이 없다. 인물의 특이성이 드러나는 어떤 순간을 추출해내거나 인물의 양면적 특성에 주목해 아이러니한 감상을 남긴다. <소셜 네트워크>는 마크 주커버그가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이 연모하던 여성을 찾기 위해 검색한 뒤 친구 신청을 고민하는 광경으로 끝난다. 또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잡스가 일생일대의 프레젠테이션을 앞둔 상황에서 갈등을 빚고 있던 친딸과의 언쟁 끝에 화해를 요청하는 순간을 묘사한다.


<몰리스 게임>은 몰리의 인생에서 최악의 순간으로부터 출발한다. 올림픽 출전이 유력한 선수였지만 점프 도중 스키 한쪽이 벗겨지면서 목으로 추락하는 부상을 입게 되는 순간, 그리고 포커 클럽 운영을 그만둔 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 러시아 마피아와 연루됐다는 혐의로 FBI에 연행되는 순간. 에런 소킨은 법대 출신의 인재가 고급 포커 클럽을 운영하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FBI에 연행된 뒤 재판에 출석하기까지의 과정을 플래시백과 플래시포워드 방식을 교차해 나열한다.


흥미로운 건 몰리를 묘사하는 방식인데, 에런 소킨은 몰리가 이성적인 방식으로 범법적인 그물망으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지위를 확보해나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나간다. 자신을 이용 가치로만 생각하는 남성들 사이에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확고한 원칙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가는 몰리의 태도는 역설적인 흥미를 자아낸다.


에런 소킨의 작품답게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쏟아지는 정보량과 대사량을 자랑하는 이 작품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 아무래도 제시카 채스테인이다. 우아하면서도 단단한 인상으로 몰리 블룸의 강인한 내면을 담담하면서도 또박또박하게 쌓아나가는 그녀의 연기는 처음으로 여성 원톱 시나리오를 쓴 에런 소킨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아군이었다. 여기에 케빈 코스트너와 이드리스 엘바 그리고 마이클 샤라를 비롯한 조연들은 극의 생기를 확장하는 훌륭한 첨병 노릇을 해준다.

에런 소킨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인물에 대한 여운을 강렬하게 극대화시키는 엔딩 시퀀스의 묘미가 상당한데, <몰리스 게임> 역시 그렇다. 몰리가 스키 사고를 당하는 오프닝 시퀀스 이후로 현재와 과거를 부지런히 오가던 영화는 결말부에서 다시 스키 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몰리를 비춘다. 몰리는 들것에 실리길 거부하고 두 발을 딛고 일어서 걸어 나간다. 그리고 전광판을 본다. “몰리 블룸 완주 실패.” 그리고 몰리는 말한다. “윈스턴 처칠은 성공을 이렇게 정의했다.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를 거듭하는 능력.” 실로 우아한 박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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