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피츠 제럴드_위대한 개츠비
나에겐 꽤 오랜기간 닉이 개츠비를 변호하며 묘사한 이 문구를 가슴에 간직하고 살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20대 시절 위대한 개츠비라는 작품에 미쳐있던 시절이다.
그는 마치 1만 5000킬로미터 밖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감지하는 복잡한 지진계와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삶의 가능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한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는 그런 진부한 감수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이요, 다른 어떤 사람한테서 일찍이 발견한 적이 없고 또 앞으로도 다시는 발견할 수 없을것만 같은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 그래,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속절없는 슬픔과 숨 가쁜 환희에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삼은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들 때문이었다.
나쁜X 데이지를 위해 순정을 다 바친 개츠비가 아름다웠다. 내 이상형이 이런 순정남이었기에 더 과몰입을 했던 것 같다. 세상에 다시 없을 이런 순정남을 현실에서도 만나길 고대했기에 이 작품을 곱씹어본게 아닐까. 소설원작과 영화까지 합한다면 아홉번 쯤 돌려본 위대한 개츠비를 몇 년 만에 영화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어릴땐 보지 못했던 세상을 알게 되었고 또 성숙해지기도 했나보다. 그전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작품속에서 보이기 시작하면서 세상나이브했던 지난날의 날을 떠올리며 헛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게 오랫동안 순정의 상징이자 환상이었던 개츠비란 인물에 대해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개츠비는 진짜 순수한 사랑만을 위해 자신 한 몸 다 바치던 순정남일까. 진짜 위대할까. 위대하다면 왜 위대하다는 것일까.
사실 이 작품에서 개츠비라는 인물은 처음부터 애매모호한 존재로 나온다. 작가가 개츠비는 이러이러한 인물이다 라고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다. 영화속에서도 개츠비역할을 맡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초반에 무리해서 자신에 대해 꾸며낸다. 독자와 관객은 도대체 개츠비가 어떤 인물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진짜 위대한 인물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다. 나 또한 몇 번을 읽어도 이 소설의 중심축을 찾는게 매번 어려웠다. 그런데 소설가 김영하의 말에 따르면 소설이 잘 구축되어 있을수록 중심을 찾기 힘들다고 한다. 독자와 작가가 계속해서 그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중요한 인물들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제시된다고 한다.
화려한 파티를 매일 열고 자신이 굉장한 인간인 것처럼 부풀렸던 것은 다 뭐 때문이었을까. 바로 데이지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 잃었던 첫사랑을 찾기 위해 5년간 밀주업을 해서 부자가 되어 그녀 곁을 맴돈다. 여기까지 보면 개츠비는 정말 순수하고 로맨틱한 남자다. 그런데 원작 소설을 자세히 보면 개츠비가 데이지를 사랑하기 시작한 건 자신의 욕망 때문이었다. 처음 놀러간 데이지의 집은 아름다웠고 많은 장교들에게 인기가 많은 그녀는 돈의 상징이었다. 그녀는 돈을 좋아했고 데이지가 가진 우아함은 그녀가 가진 부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런 데이지를 가지면 개츠비 자신이 많은 장교들을 이기는 것 같았고 우두머리가 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녀를 원한거다.
데이지를 위해 만들어낸 수많은 환상과 파티는 후에 데이지가 개츠비 집으로 와서 계속해서 둘이 다시 사랑을 나누게 되면서 서서히 끝이난다. 화려했던 모든 것들이 끝나는 시점이 온다. 한마디로 개츠비는 몰락한다. 작가는 결국 개츠비란 인물을 환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으로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개츠비의 인생서사를 당시 미국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짓지 않을 수 없는데 당시 시대적 배경은 1920년대다. 이 작품이 위대한 이유도 바로 여기서 나온다. 재즈시대로 불리는 플래퍼가 유행하기 시작한 이 시점은 1차 세계대전 후 세상의 패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온 때다. 경제적 호황을 누리고 거칠것이 없었던 미국의 경제 소비활동을 잘 나타내는 작품이고 또한 그랬던 미국의 미래를 개츠비의 몰락이라는 상징을 통해 예견한다. 미국은 전에 없던 경제적 호황기 후 1929년 10월 29일 검은화요일이라고도 불리는 세계 대공황을 맞게 된다.
그럼 개츠비는 위대하지 않을까? 세속적인 개츠비의 죽음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 삶의 무의미함일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개츠비는 세속적인 욕망을 가진 인물이 맞지만 무모함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이 무모함은 한 개인이 어떤 강력한 욕망을 가지고 무언가에 도전하고 한가지에 광기의 에너지를 쏟아내길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다. 이상과 환상은 아무나 추구할 수 있는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알면서도 이를 바꿔보겠다는 정신에 우리는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렇게 강박적인 무모함을 가진 인물을 만들어냄으로써 독자에게 새로운 인물을 제시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소설의 힘이다. 어차피 인생의 본질은 허무 아닌가. 나는 밀란쿤데라의 인생을 꿰뚫는 정확한 통찰력에 대단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스콧피츠제럴드가 개츠비를 통해 추구하는 허무라는 본질위의 환상과 이상을 보며 충만함을 느낀다. 결국 허무라는 삶의 선상위에서 인간이 계속해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건 이상과 희망이다.
"어차피 비극이 판치는 세상,
어차피 아플대로 아픈 인생, 구질스런 청춘...
그게 삶의 본질인 줄은 이미 다 아는데
드라마에서 그걸 왜 굳이 표현하겠느냐,
희망이 아니면 그 어떤것도 말할 가치가 없다.
드라마를 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말하는 모든 비극이
희망을 꿈꾸는 역설인 줄을 알아야 한다."
라고 했던 노희경 작가의 말이 생각나는 밤이다.
P.S 피츠제럴드는 최고의 지성이란, 두 가지의 상반된 개념을 동시에 지니며 어떤 일이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면서도 이를 바꿔보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는 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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