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_단순한 열정
뜨겁던 한 계절이 지나가고 또 다시 가을이 찾아왔다. 10월의 가을은 노벨상 시즌이기도 하다. 매년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할 때면 수상자 면면의 삶이 내게 또 어떻게 동기부여를 줄 지 기대가 된다. 많은 분야중에서도 올해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분야는 문학계였다. 2022년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아니 에르노라는 프랑스 여류 작가였는데 왜인지 모르게 끌려 작가의 작품을 검색했다. 작가의 작품들을 보니 문득 서점 가판대의 감성적인 표지를 보고 스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특정시기에 특정 책을 만나는 것은 운명이라 했다. 필자도 그 말에 동의한다. 바쁜 상반기를 보낸 후 올해 가을 길목에서 운명처럼 만난 작가는 아니 에르노였다. 그녀의 작품에 흥미가 생긴 이유는 소재들도 파격적이긴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프랑수아즈 사강과 혹시 닮았을까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담담하고 사실적인 그녀의 프랑스 문학적 문체가 이 깊어지는 가을과 어울리길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첫 작품으로 '단순한 열정'을 열어 보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사강의 문체와는 다르게 너무도 사실적인 기술에 놀랐다. 아니 에르노의 문체는 정말 냉정하고 차가워서 프렌치시크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진한 가을 같았다.
냉담하고 차가운 그녀의 문체는 기교없이 자신의 감정 바닥 끝을 드러내는데 탁월했다. 매스컴에서 말하는 '단순한 열정'의 줄거리는 대학교수인 에르노가 연하인 외국인 유부남과의 불륜 후 연인을 상실한 이별의 외로움이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을 사랑으로 인한 자아의 상실을 다룬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 에르노는 소위 사랑에 미쳐 낭떠러지에서 결국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인간(자신)의 감정 끝은 어디인지를 냉정하고 담담한 그녀의 문체로 말하고 있다. 자아의 상실이라는 처절한 고통을 날 것 그대로 적나라하게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부끄러운 치부이기에 타인에게는 커녕 내 자신의 내면에서조차 회피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아니 에르노는 누구보다도 용감했기 때문이다. 그 용기의 이면에는 아주 비싼 값을 치뤄서 이뤄낸 일상의 투쟁이 있었다. 그녀는 그저 영감으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온갖 수치과 괴로움을 바탕으로 성취했던 것이다. 자신의 일생을 진심을 다해 뜨겁고 열정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토록 뜨거운 열정을 이 세상에 날 것 그대로 토해낸다는 것 또한 참 경이롭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의 감정을 정확히 들여다 보는 경험은 아니에르노 같은 작가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보통의 삶이 영혼을 죽이는 사소한 일들의 관행을 묵묵히 체념하고 사는 삶이라고 한다면 그 시절 가장 고귀하고 빛나던 그녀의 감정을 보여준 것은 우리들 입장에서도 고마운 일이다. 그녀의 외로움은 처절하고도 쓸쓸했지만 철저히 아름다웠다. 마치 어딘가 한 쪽 구석이 텅 빈 것 같지만 사랑하게 되는 가을이라는 계절처럼 말이다. 아직 낙엽이 지는 계절은 아니지만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볼 때면 아니 에르노를 떠올리면서 나는 내 감정에 얼마나 끝까지 뜨거웠는가 돌아보게 될 것 같다. 벌써부터 조금은 부끄러워지는 10월의 어느 새벽에 이 글을 마무리한다.
"내면적인 것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순수한 자아 속에 타인, 법,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에르노-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 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나는 내 온 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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