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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unny Jul 08. 2019

...어떤 편지

짧은글 #하나

저는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입니다. 아니, 진짜 집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숙소라고 해야 맞겠네요. 삼 일씩이나 머무르려고 하다 보니 집처럼 익숙해졌나 봅니다.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데 말이죠.

한국에서의 당신의 하루는 어떠셨나요. 눈살 찌푸려지는 일 없이 행복한 일만 가득하셨나요. 이곳만큼은 아니겠지만 그곳도 꽤 춥다고 합니다. 바깥에서 꽁꽁 언 몸 따뜻하게 녹여줄 것들만 곁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는 온종일 눈과 함께 걸었습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태어나서 본 눈을 모두 쌓아 놓은 것보다 더 많은 눈을 본 것 같습니다. 참으로 새하얗고 예쁘더군요. 순백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주변 풍경과 어우러질 때 더더욱 아름다워지는 것 같습니다. 마치 제가 이곳에서 보았던 풍경처럼 말이죠.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설국의 모습은 분명 이곳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설국 말고도 이곳에는 다양한 풍경이 많다는 것을 오늘 어느 사진관의 사진을 보고 느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사계절 모두 각자의 아름다움이 넘쳤지만 저는 유독 봄 사진이 끌렸습니다. 한동안 밖에서 겨울을 느끼고 와서 봄의 상반된 매력에 끌렸던 걸까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봄 사진 속에는 흰 눈이 깔린 벌판 대신 푸르른 생명력이 넘쳐나는 풀들이 사방을 수놓고 있었고 가지 위에 눈을 이고 조금은 외롭게 서 있던 나무들이 봄의 기운을 만끽하는 듯 조금은 활기차 보이더군요. 그러다 문득 저와 당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저는 겨울처럼 대했습니다. 새하얀 눈이 모든 것을 덮어버린 모습. 순백의 매력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뿐인. 오히려 외롭고 고독해질 수 있는 그런 계절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저는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저와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조금의 거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적당한 거리로 멀어지게 했습니다. 이것이 몇 번 반복되자 이러한 인간관계가 제 성격에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에 저와 잘 맞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고 지금껏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저의 불편함을 줄곧 건드리곤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저는 진심으로 마음이 맞는 몇몇 친구들 외에는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흰 벌판 같은 조금은 외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아 눌러온 외로움이 터져 나와 사람의 따뜻한 품을 찾고 싶어 졌는지 모릅니다. 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었던 감정의 설렘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는 당신에게 봄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당신에게 끝없이 깔린 흰 벌판이 아니라 푸르른 생명력이 넘치는 배경을 선물해 주고 싶었습니다. 외로움과 고독보다는 봄의 따스한 활기참이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만의 계절을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어떤 계절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으나 저의 봄을 받아들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셨다는 것은 기억에 선명합니다.

 처음 겪어본 일이었기에 한심하게도 당신을 원망했습니다. 왜 나의 봄을 받아주지 않느냐면서 말이죠. 오랜 겨울을 살다가 당신을 보고 봄이 되고 싶었는데 왜 나의 마음을 몰라주느냐면서 말입니다. 네,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막상 저도 많은 사람을 겨울처럼 대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중 저에게 봄이 되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당신에게 저는 그저 당신의 계절로 대해주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저 당신의 계절을 봄으로 바꾸기에는 제가 충분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당신께서도 누군가에게는 봄이 되어주시겠지요. 무한한 생명력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시겠지요. 그 사람이 제가 아니라는 것이 마음이 아플 따름입니다.



 지금, 이 기차는 어디쯤을 달리고 있을까요. 가벼운 덜컹거림에 맞추어 풍경들이 하나하나 아른거립니다. 오늘 여행의 마지막 장소에서 이곳의 풍경을 오래오래 간직하려 눈에 한가득 담고 왔는데 그래서 그런지 창문에 그 장면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는 기분입니다.

오늘의 여행은 혼자여서 외로운 여행이었지만 혼자였기에 진정한 나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외롭지 않은 여행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외로움은 그리움을 부르고 그리움은 당신을 불러냅니다. 그래도 당신과 함께 보았으면 더 좋았을 아름다운 풍경, 당신과 함께 걸었으면 더 좋았을 눈길이었습니다. 그러지 못하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당신의 계절을 알지 못하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을 보니 기차가 거의 역에 다다른 모양입니다. 이제 내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내일 제가 이곳을 떠나 새로운 도시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당신께서도 오늘과 다른 새로운 내일을 살아가시겠지요. 새로운 것들을 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가시겠지요. 그 모든 일에 행복이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의 내일에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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