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
1부. 셋이 되면 달라지는 것들
쭌이 다음으로 가장 먼저 임신 소식을 알린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 나 임신했어.”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엄마는 호탕하게 웃었고, 나도 따라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상대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엄마는 웃으면서 내게 잘했다고, 축하한다고 말했다. 사실 엄마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조금은 혼날 각오를 했었다. 아직 결혼식도 올리기 전인데 임신부터 하면 어떻게 하냐고 말이다. 그런데 엄마는 혼내기는커녕 너무 좋아했다. 엄마를 시작으로 다른 가족들에게도 전화를 했고, 다른 가족들도 쭌이네 가족들도 우리의 임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축하해 줬다. 너무 자연스럽다 못해 심드렁하기까지 한 반응들이 이어졌다.
“아니, 나 임신했다니까? 안 놀라?”
“딱히. 사실 오래 버텼다 생각했는데.”
평소에 자기보다 일찍 결혼하면 안 된다며, 내가 결혼식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으름장을 놓던 언니의 대답이었다. 동거를 한 지 몇 개월이 지났는데도 조용해서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단다. 엄마랑 아빠도, 오빠랑 새언니도 속도위반을 해서일까? 언니는 나와 쭌의 속도위반에도 굉장히 관대했다.
친구와 지인들에게 알릴 때도 그들의 반응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할 말이 있다고 하면 다들 임신을 했냐고 물었다. 다들 신기가 있는 건지. 살짝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쭌이와 내가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어째서 결혼을 건너뛰고 임신을 언급할 수가 있지? 왜 그랬냐고 물어도 상대방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또 황당했던 하나는 대부분 놀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축하를 해주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임신을 했다는 이 사실이 나만 당황스럽고 나만 놀라운 것인지 헷갈렸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고, 뒤늦게 나에게 몰래카메라였음을 알려주면서 ‘많이 놀랐지?’ 하고 얘기해 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왜 나한테만 비밀로 했던 거야? 살짝 배신감이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들이 해줄 수 있던 말이 축하밖에는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그들에게 ‘아기를 가져볼까?’ 고민하는 말을 던진 게 아니라, 이미 생겼다고 하는데 축하의 말 외에 다른 무엇을 말할 수 있었을까. 나도 주변에서 임신을 했다고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도 결국에는 ‘축하한다’라는 말을 먼저 꺼내게 되던걸. 마음은 괜찮은지 덧붙여 묻기는 했다마는, 결국에는 새롭게 생겨난 고귀한 생명에 대고 축하하지 않을 수가 없던걸.
물론 내 임신 사실을 듣고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활동을 해왔고, 얼마나 꿈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지, 일에 대한 욕심이 대단한지를 알고 있기에 아기가 생긴 것을 축하하기보다는 앞으로 내가 아무것도 못하고 주저앉게 될까 봐 안타깝다고 했다. 축하의 말을 들을 때도 그랬지만, 덮어놓고 걱정을 하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기분은 그저 그랬다. 축하를 해도, 걱정을 해도 싫다고 할 거면 어쩌라는 거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그때 내 기분이 그랬다. 다들 일방적으로 축하나 걱정을 해주니까 거기다 대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주저리주저리 털어놓을 수가 없었고, 그저 고맙다거나 걱정하지 말라거나 하는 말만 하게 되는 게 싫었던 것 같다. 마음이 정리가 안 된 상황에서 진심이 아닌 말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상황이 짜증 났던 것도 같고.
실제로 지역을 옮긴 후 프리랜서로서 슬슬 자리를 잡아가던 터에 하게 된 임신이라 나도 걱정이 되기는 했다. 아직 영화인으로서, 프리랜서로서 입지를 탄탄히 해 놓지도 못했고, 겨우 밥벌이를 하는 수준인 데다가 쭌이도 나도 모아둔 돈도 없어서 아기를 키우기에는 부족한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급하게 취직을 시도한다 해도 임신한 사람을 뽑아줄 곳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쭌이는 어깨가 더 무거워졌을 거다. 나도 내 미래를 모르겠는데, 영상업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쭌이는 앞으로의 벌이에 대해 더욱 예상할 수 없었을 거다. 내 벌이는 없다고 가정하고 자기가 혼자서 아내와 아이를 먹여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거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고, 힘들어도 잘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라 평소에 내가 ‘항상 혼자 짊어지지 말라’고, ‘힘들면 내가 책임질 테니 나한테 기대’라고 일부러 많이 이야기했는데도 그때마다 ‘오~ 멋있는데? 그래도 내가 일해야지’ 하고 말하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농담처럼 지나가는 말로 “이제 진짜 때려치울 수 없게 됐네.”라고 얘기했다. 그 말이 너무 무겁게 다가왔다. 쭌이의 웃는 모습이 안쓰럽고, 우리를 위해 참고 일할 생각을 하니 미안했다.
주위에 임신 사실을 알리면서 엄마로서 ‘축하한다’와 ‘어떻게 할래?’의 두 가지 말만 들으면서 내 마음을 궁금해해 주는 사람이 없음을 서운해했는데, 생각해 보면 쭌이도 자신의 마음을 미처 헤아릴 시간 없이 그렇게 아빠의 마음을 가지게 되어버린 것이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나에게 어떠냐고 물어봐 주지 않는 것을 서운해하면서도 쭌이에게 물어볼 생각을 못 했다. 생각해 보니 또 미안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묵묵히 아빠가 됨을 받아들이고 준비를 하는 모습이 듬직하게 느껴졌다. 나도 쭌이에게 이런 듬직한 아내가 되어주어야겠지. 앞으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가는 것들이 자꾸만 생겨날 것이고, 우리는 그 답을 다 알지는 못할 것이다. 답을 알려주는 사람도 없겠지.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잊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고, 항상 서로를 살피고 물어봐 주는 그런 부부와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쉽지 않은 다짐을 떠올려 봤다. 조금 철이 들었나.
글. 김현미
교정. 교열. 윤문. 김지현 rlawlgus2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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