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를 보는 것이 더 좋을지도
필요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은 참으로 어렵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나는 필요한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고, 노력도 한다. 그 필요라는 부분이 깨지면 심각한 좌절의 굴레를 맞이하기에 모두들 두려워한다. 이런 질문은 스스로에게도 참 두렵다. 또 어지러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반성하게 된다. 그렇지만 필요란 상황과 시간에 따라서 변한다. 그것을 예측하고 일일이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번 고뇌에 빠지거나 정신줄을 놓고 회피하게 된다.
나는 이것만으로도 책이 말하는 것은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한다. 고고한 높은 이상과 철학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의 다양한 상황을 간파하는 아포리즘적인 경구들이 저자의 이야기와 함께 남아 있다. 어떻게 나를 지켜낼 것인가, 어떻게 세상과 조화를 이룰 것인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란 세 꼭지를 읽다 보면 이상하게 노자가 선생님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진석 교수의 EBS 강의, 인간이 그리는 무늬와 같은 수준이 정말 어떻게 삶을 대할 것인가에 깊이 있게 말한다고 느낀다. 이건 내가 꼰대화의 초입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요란 타인의 것이다. 나의 필요란 항상 그것과 같다고 할 수가 없다. 결국 필요한 사람인가의 판단은 타인이 하겠지만, 나 스스로 성숙하고, 존경받을 행동과 사랑받을 태도를 갖추지 않는 다면 이는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나는 세상에 나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것, 그것을 통해서 함께 살아가는데 기여와 도움을 줌으로 되돌려 받는 것이라 믿는다. 세상은 불공평해 보이지만 또한 공평한다.
발타자르 그라시안, 라 로슈코프, 라 브뤼에르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처음 알게 됐다. 그들이 행복하고 존경받는 삶을 살았는지는 모른다. 그들이 세상을 살아가며 각각의 상황에 조금씩 정리해 둔 생각을 보면 그리 순탄한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찾아보니 순탄하게 살았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회한과 결과에 대한 분석이 아닐까 한다. 나는 인생을 좀 더 살고 나면 이런 경구보다는 사람들이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며, 좀 더 긍긍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글을 남기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그게 잘 안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이 남아서 그렇겠지만...
그들이 보이는 데로 보고, 할 수 있는 만큼 진행하고, 느끼는 데로 이해하는 냉정한 삶을 남겼다면 어떠했을까 상상해 본다. 그것이 현재에 답보상태로 머물자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를 경주하지만, 지피지기와 같이 현재를 냉정하게 보았다면 위태롭지도 않고, 높은 수준의 글들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