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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dcat혜진 Feb 24. 2021

세계와 세계, 0에서 1까지

| 본사: 장기 출장 그리고 1 대리




인간 세계에 ‘태초에...’라고 시작하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보통 그런 이야기의 중심은 창조자가 만들어내는 세계에 관한 것이지만, 그 창조자나 그가 만들어낸 세계보다 더 유명해져서 아직도 인간들에게 회자되는 이가 하나 있다.

옛 시절의 인간 세계는 규칙이나 질서보다 욕망이나 미움이 가득했던 시대였다.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 방법,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이해하는 과정, 그리고 이 세계를 잘 살아갈 수 있는 지혜..., 그런 것들을 정확하게 전달해 줄 누군가 필요했다. 한 사람에게서 두 사람, 두 사람에게서 세 사람에게 전해져 0 번이 그토록 원하는 ‘선순환의 세계’가 되길 원했다. 그것이 장기 출장의 시발점이었다.

그런 목적으로 처음 만들어진 대리가 1 대리이다. 0 번은 1 대리에게 인간 세계에 직접 가서 여러 가지를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그는 처음으로 인간 세계에 당도하여 정말 많은 것들을 전달했다. 하지만 0 번은 다시 돌아온 그를 몹시 문책했다. 1 대리는 0 번이 원했던 것 이상으로 인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줬고, 이후 인간 세계에서는 1 대리의 의도와 달리 그의 존재를 이용한 살육의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이 1 대리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는 다시는 인간 세계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 사건 이후 본사에(갇혀)서 업무를 처리한다는 이야기만 떠돌았다.

문득 그 이야기가 생각났다. 지금 171713 대리는 바닥에 누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허공에 떠 있는 것도 아닌 상태다. 관리자 면담을 위한 공간 이동은 자신의 의지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착 지점의 지정도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위아래가 없는 공간 어디쯤에서 깨어나기는 했는데, 아무도 없다.



“이런, 너무 오랜만에 면담이라서 도착 지점을 잘 못 지정했군요. 잠시만요.”



저 멀리 아래쪽 어디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171713 대리는 드디어 바닥에 ‘쿵’ 소리가 나도록 착지했다.



“괜찮으신가요?”



눈 앞에는 거대한 모니터가 셀 수 없이 분할된 채 여러 가지 장면들을 쉴 새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171713 대리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직도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업무용 책상과 모니터와는 반대 방향으로 위치한 의자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보니 거대한 모니터 앞에 누군가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모니터의 현란한 화면들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놓칠 수 있는 지점이었다.



“멀리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부로 제가 직접 갈 수는 없어서요.”



1 대리는 171713 대리에게 손짓으로 더 가까이 오라는 표현을 하면서도 여전히 손에 잡고 있는 단말기에서 놓지는 않는다.

171713 대리는 인간 세계에서는 그를 신의 아들로 기록한 것을 읽어 본 적이 있다. 어딜 가든 그의 외모는 한결 같이 표현되어 있었는데, 대충 생각나는 건 덥수룩 한 장발에 수염과 삐쩍 마른 체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그의 끔찍한 모습은 눈앞에 있는 이와는 거리감이 컸다.

1 대리는 반바지에 편안한 티셔츠를 입고 안경을 낀 애띈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염은커녕 뽀얀 얼굴에 단정하게 자른 머리는 인간 세계였다면 분명 그들의 호감을 샀을 것이다. 171713 대리가 가까이 오자 그의 눈동자가 반짝하면서 빛났다.



“반갑습니다. 다른 대리님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 좀 신기하네요. ”



1 대리가 움직이며 제 자리에서 발을 떼는 순간, 그제야 171713 대리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절그렁, 그가 171713 대리에게 한 걸음 다가오자 그를 따라 바닥에 있던 쇠사슬이 소리를 냈다. 맨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쇠사슬은 족쇄에 걸려있었다. 한쪽 끝은 어디인지 모를 곳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171713 대리는 잠시 쇠사슬의 반대편을 찾으려고 눈으로 좇다가 결국은 점처럼 사라지는 것을 알고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제가 이런 모습이라, 놀라셨나요?”
“아니요.”
“다행이네요. 하긴 요즘은 연수원에서도 이런 이야기들을 한다더군요. 제 사례가 교육에 도움이 된다면서요?”
“들은 적은 있습니다.”
“교육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때의 인간 세계는 지금과는 너무 달라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데 말이죠.”
“부활 말입니까?”
“그런 ‘기적’이 아니면 인간들은 저를 의심하고 믿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지시받은 업무 수행은 절대 불가능했겠죠. 물론 0 번은 이해 못했지만.”



다시 한 걸음 앞으로 옮기자 쇠사슬이 절그렁 소리를 한 번 더 냈다. 한 손으로는 쉴 새 없이 단말기를 두드리며 1 대리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인간 세계를 위한 기획이 워낙 많아서 상신하신 대리들이 원하는 시간에 처리하려면 절대로 쉴 수 없답니다.”
“바쁘시군요.”
“일을 분산하고 또 분산하더라도 결국 최종 승인은 관리자가 하니까요. 잠시만요....”



171713 대리는 1 대리가 보고 있는 모니터를 함께 바라봤다. 조그맣게 분할된 모니터 속의 인간 세계는 사건, 사고, 재난, 행복, 슬픔, 기쁨, 죽음, 탄생 그리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모습까지도 흩어지듯 하다가 다시 모여들기를 반복한다. 1 대리는 지금 조금만 보아도 어지러운 그 수백수천, 아니 수만의 장면들 속에서도 정확하게 파일을 찾아내고 상신된 기획과 대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본사 [관리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지만, 171713 대리는 일단 잠자코 있었다.



“잠깐만 눈을 떼도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는 곳이 워낙에 많다 보니, 실례가 많네요. 이제 거의..., 네. 이제 되었습니다.”



인생 파일의 소용돌이가 몇 번 더 휘몰아치다가 곧 잠잠해지자, 그제야 1 대리는 171713 대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제 면담을 해 보도록 하죠. 인생 파일의 [열람 승인]을 [요청]하셨더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 인생 파일이 업무에 꼭 필요한가요?”


절그렁, 1 대리의 움직임으로 쇠사슬이 한 번 더 소리를 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안에 메아리처럼 소리는 울리고 다시 또 울렸다.

 

“정확하게는 [열람 제한 파일] 이 필요해서 [열람 승인 요청] 을 먼저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면담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군요.”



171713 대리는 상냥한 얼굴의 1 대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모른 척하고 있다. 지금은 얌전하게 본사를 총괄하며 있지만, 내내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저 족쇄는 겨우 억누르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0 번이 아무런 이유 없이 그를 묶어 두었을 리 없으니까.



“[열람 제한 파일] 이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그럼, 그 파일의 주인은 그런 인생을 살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까? 어떤 기획도 할 수 없는 그런 삶을 말입니다.”
“그것 말고도 수행하실 업무가 많으실 텐데요. 무엇보다....”


퉁, 하고 갑자기 모든 모니터가 꺼져버렸다. 1 대리는 안경을 살짝 올리며, 171713 대리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왜 그렇게 [유예] 된 기획에 관심을 가지는지 모르겠네요.”



정적이 잠시 흐르는 공간 저 어딘가에서 갑자기 비명소리 같은 것과 함께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윽고 1 대리의 발목에 연결되어 있던 쇠사슬이 순간 팽팽해졌다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며 절그렁 소리를 냈다. 1 대리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지만, 171713 대리는 일단 개의치 않았다.

상냥한 얼굴 위에 감추고 있는 속마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있는 본사. 다르지 않다.



“저는 왜 그렇게 그 [열람 제한 파일] 만 따로 관리받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인간들은 모두 다 똑같습니다. 특별한 인생 파일은 없습니다. 인생 파일의 큰 흐름에 맞게 저희는 그저 기획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다만 인간들은...,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걸 믿죠. 제가 처음에 인간 세계에 발을 붙였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저를 창조자가 보낸 대리로 생각했지만, 한 편으로는 또 그걸 증명하기를 바랐으니까요. 그래서 주어진 권능과 기적도 모두 사용하게 되었죠.”



그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간 것은 0 번이 원했던 ‘선순환의 연결점’이 아니라 1 대리의 기적과 권능의 현장이었다. 물론 그런 기적과 권능은 1 대리가 하는 모든 말들을 인간 세계에 옮기는 것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지만, 주객이 전도된 이야기는 0 번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 결과 저는 이렇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또 다른 대리가 인간 세계에 직접 간 것을 알고 있습니까?”
“압니다.”
“이 족쇄는 저만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모두 연결되어 있죠, 이렇게 제가 당기면....”



공간의 저 편에서 이윽고 괴성이 들렸다. 조금 전보다 더 가까운 곳이었다.



“인간 세계는 아시다시피 모두 크고 작은 기획으로 이루어지죠. 특히 재앙이나 재난은 말입니다. 예전에 이 쇠사슬의 끝에 있는 또 다른 대리가 0 번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기획을 하나 했었습니다. 인간 세계의 믿음이 부족했던 시대였죠. 아니, 믿음은 있었지만 잘못된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부정당하고 있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최종 승인이 나기도 전에 업무 수행을 진행했고, 또 한 번 인간 세계는 큰 고통이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본사 직속인 [재앙] 과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들이 하는 일은 극비에 가깝다. 새어나간다면 다른 부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획들이 많으니까. [재앙] 만 담당하는 그 부서가 탄생한 이유는 아마도 예전에 재앙을 부른 대리가 있을 곳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는 그런 큰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저 지금처럼 인간 세계는 이렇게 소소하고 평온하게 흘러가야 맞죠. 탄생하고 살아가다가 소멸하는 그런 삶 말입니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모니터가 제기능을 하며 돌아왔다. 분할된 화면은 다시 어지럽게 돌아다니며, 짧은 사이에 상신된 기획안과 관련한 인생 파일들도 여러 개 만들어져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단말기를 다시 열며, 1 대리는 웃음 지었다.



“그게, [열람 제한 파일]을 풀 수 없는 이유입니까?”
“이만하면 대답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 업무를 해야....”
“대답을 제대로 못 들은 것 같은데요.”
“... 그만 돌아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열람 제한 파일] 의 최종 관리자는 0 번이죠. 1 대리가 아니라.”
“.......”
“그리고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말입니다. 그럼, 0 번은 어디 있습니까?”



171713 대리의 마지막 말에 단말기 창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한 숨과 함께 감겼다. 1 대리는 단말기 창을 천천히 닫았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모니터가 모두 닫혀버렸다. 안경을 다시 올리며 171713 대리를 바라보는 1 대리의 시선은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상냥한 표정과 빙글빙글 돌리던 말도 모두 사라졌으니, 이제 드디어 비밀이 드러나고 진짜가 보일 차례다.  



“0 번은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죠.”
“연수원에서 교육받을 때 들은 이야기가 있었죠. ‘[관리자]는 어디에나 있고, 모두가 볼 수 있다.’였습니다. 그리고 이 면담은 [열람 승인]을 [요청] 하기 위한 면담입니다. 이 면담을 [관리자]로서 진행할 분은 1 대리가 아닌 것 같은데요. 어쨌든 저와 같은 직함을 쓰는 ‘대리’니까 말입니다.”
“아하..., 지금 1 대리의 직능을 의심하는 겁니까?”



‘의심’이라는 말과 함께 삐딱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1 대리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자 171713 대리는 왠지 의문점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조금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오기 전에 본 것이 있습니다. [열람 제한 파일] 의 주인, 그 어떤 것도 기획될 수 없는 인간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다른 이의 시선으로 기억된 아주 어릴 때의 모습이었지만, 또렷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171713 대리는 아까부터 덩그러니 있던 업무용 책상과 의자 가까이에 다가갔다. 그리고 모니터와 반대 방향으로 돌려져 있던 의자를 천천히 정면으로 돌리자, 그곳에는 자그마한 몸집의 소녀가 잠들어 있었다.



“이 소녀의 모습과 똑같으니까요.”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안경 너머의 눈매가 더 날카로워지더니 1 대리는 쇠사슬을 끌며 천천히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저 제 직능이 뛰어나다고 해두죠.”
“하....”
“그래서 지금 0 번은 어디 있습니까?”
“...,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역시..., 그렇군요.”



1 대리와 171713 대리의 사이에서 갈색 머리의 소녀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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