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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dcat혜진 Mar 05. 2021

세계와 세계, 0에서 1까지

| 본사: 업무 지시 그리고 0 번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니, 그 많은 인간들을 창조하고 그들만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건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인간 세계에 0 번의 말을 전하러 갔을 때, 그 많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감정에 치여서 한 동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보잘것없는 그 자그마한 세계에서 그들만의 언어로 소통하고, 탄생하고, 소멸하고, 세계를 만들고, 저마다의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 모습이 너무 경이로웠습니다. 그들과 지내는 동안 느낀 수많은 감정들 앞에서 저는 0 번의 입장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할 수 없고, 자신을 향한 수많은 감정들을 바라보지만 가질 수 없는 그 모순된 입장을 말입니다.

인간은 0 번의 세계에서 창조되었지만, 이미 스스로를 새롭게 다듬고 그들만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중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더는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에게 자유로운 사고의 세계를 준 것은 0 번이었으니까요. 그런 결과 하나 모르고 그랬을 리 없으니.

알고 보면 서글픔 밖에 남지 않는..., 아니, 그 보다 더한 감정이 인간 세계에 있다면 그것은 0 번이 가져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기적과 권능 앞에서 경외심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들이 결국은 어떤 결말로 치달을지도 조금은 눈치챘지만, 저는 그런 것을 개의치 않기로 했습니다.

자신들의 세계를 처음으로 만들어준 존재를 잊고 자신들만을 위해 살아갈 그들에게 제가 무슨 마음을 가졌을 것 같습니까. 날카로운 가시 면류관을 뒤집어쓰고 비루한 나무틀에 못 박혀 인간의 죽음을 느낄 때도 저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업무 수행에 ‘개인적인 감정은 필요하지 않았다’라고만 하겠습니다. 다만, 0 번이 지시한 사항은 지켜야 했습니다.

모자란 믿음을 더 심어주려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가는 ‘신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런 저를 보며 그들이 제발 0 번이 그토록 원하는 ‘선순환의 세계’를 닦아주길 바랐습니다. 양심, 죄악에 대한 미안함 그런 것들이 남아있기를 바랬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지게 된 이유를 되짚어 보기라고 했으면 하는 바람....

그 허무한 바람이 결국은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제가 인간 세계에서 사라지고 그들이 저를 이용한 거짓된 믿음을 만들어 전쟁을 벌일 때 말입니다.

제 다음, 그다음의 대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예 인간의 영혼에 완전히 깃들어 업무를 수행한 대리도 있었죠. 소멸하기 직전까지 자신이 0 번의 대리라는 사실도 잊고서 완전히 인간 세계의 일원이 되어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 소용없었습니다.

인간 세계는 완벽하지 않은 것이 완벽한 것은 아닐까, 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가두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패했고, 다시는 그러면 안 되니까요.”



1 대리는 의자에 잠들어있는 소녀를 깨우지 않았다. 그리고 단말기를 다시 펼쳐 [열람 제한 파일]을 꺼냈다. 하지만 171713 대리가 보았던 같은 지시 사항이 떴다.



“맞습니다. 이 파일의 최종 관리자는 0 번 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열 수 없습니다. 0번 외에는요.”
“0 번을 깨우면 되지 않습니까.”
“그냥 잠이 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설마.”



1 대리는 안경을 벗어 티셔츠 끝으로 닦으며 조용히 말했다. 짧은 손짓 한 번으로 [열람 제한 파일]의 주변으로 다른 파일들이 펼쳐졌다.



“0 번은 지금 여기..., 그러니까 본사에 없습니다. 이 파일을 열 수 없도록 만들어두고 대부분의 존재 자체가 인간 세계로 가버렸습니다. 여기 있는 건 0 번 중 극히 일부분이죠. 왜 이런 일을 벌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열람 제한 파일] 의 주인이 0 번이군요.”




0 번은 이 곳에 없다. 최종 관리자가 없는 이 조직은 지금 이제껏 해온 관성으로 그냥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최종 관리자가 인간 세계로 가버려 부재중임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책임 지기 싫은 일을 기획이라는 이름으로 시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가장 큰 책임은 결국 최종 관리자의 몫이었다. 그의 부재는 그의 책임도 사라지는 것이다. 책임이 없는 업무란, 있을 수 없다.  

 

“하아.... 그러니 저 파일이 속하면 [유예] 된 기획일 수밖에 없죠. 우리 세계에서는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니까요. 큰 흐름조차 모르니 무엇을 할지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0 번이 처음에 무엇을 설정해 두었는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말 그대로 완벽한 자유 의지의 삶이네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가 만든 시스템에는 맞지 않으니, 인간 세계에서도 순탄치는 않을 겁니다. 음, 인간 세계의 게임으로 본다면 마치....”
“버그네요.”
“버그, 그것도 맞지만 사실은 바이러스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어떤 목적으로 간 것인지는 정말 모르니까요.”



바이러스, 그 말을 하며 다시 안경을 쓴 1 대리는 [열람 제한 파일] 주변에 인생 파일 중 하나를 펼쳤다. 그것은 171713 대리도 본 적이 있었던 파일이다. [유예] 된 기획의 주인, 가장 [열람 제한 파일] 의 주인과 가까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간 파일. 그 외에도 171713 대리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주변 파일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인간 세계에서 순탄치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일단 어린 시절의 이 장면만 보더라도 알 수 있죠. 이건 0 번이 깃들어 태어난 소녀의 어머니 파일입니다.”



171713 대리는 1 대리가 보여주는 몇 가지의 파일과 수많은 장면들을 빠르게 확인했다. 딱하다. 주관적인 감정을 가지는 편이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보고 자랄 필요 없는 것들이 즐비한 삶이란. 타인의 시선으로만 보았을 뿐인데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떠올랐다.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권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몇 가지 정도는 손대서 열심히 고쳐주고 싶을 정도로.



“가엾죠? 고작 주변 인간의 시선으로 본 장면들일뿐인데 말입니다. 본인은..., 분명 무척 큰 소용돌이를 거치고 있을 겁니다. ”
“그렇군요.”



인생 파일의 소용돌이는 그들의 삶의 모습과 비슷하게 드러난다. 아마 [열람 제한 파일]을 펼친다면 어느 누구보다 거대한 소용돌이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털어놓고 나니 조금은 편하군요. 하지만, 그냥 이야기드린 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이건 극비입니다.”
“본론을 말씀하시죠.”
“인간 세계도 중요하지만, 저는..., 우리가 있는 이 세계도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인간 세계가 아니라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0 번은 말했지만,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없는 인간 세계도 분명 지금 보다 나아질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요?”
“다시 제자리로 돌려야겠죠. 0 번을, 우리의 관리자를.”
“.......”
“전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비자가 아니라 상대자에게 깃들어 업무를 수행하는 대리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업무 수행 능력이, 직능이 뛰어나다고 하셨죠?”



‘직능’이라는 단어에 힘주어 말하고는 다시 빙그레 웃는 1 대리의 얼굴을 보며 171713 대리는 곧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불안하지만 대충은 예상이 되는 말이었다.



“아시다시피 [열람 제한 파일]은 절대로 풀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0 번을 중심으로 한 기획은 절대로 할 수 없죠. 그러니까.”
“상대자에 깃들어 0 번의 인생 파일에 관여하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0 번을 이 세계로 데리고 와야죠.”
“그러려면 인간으로서의 삶을 끝내는 방법밖에 없군요.”
“[사고사] 같은 기획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니 방법은 하나밖에 없죠.”



문득 171713 대리는 1 대리가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잠깐 생각했다. 그가 원하는 방법을 알 것 같았다.

그토록 자신이 이해하려고 애쓰던 0 번이 인간 세계로 사라져 버린 것을 알았을 때, 1 대리가 가진 감정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가 0 번에게 가진 감정이 한없는 애정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왠지 지금 보이고 있는 주변 파일들의 인간관계의 배치도 0 번이 사라진 후 1 대리가 재빨리 손댄 것은 아닐까 의심되기 시작했다.

집착, 0 번이 인간 세계에 보인 모습 중 대부분이 그런 거라면 지금의 1 대리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유예] 된 기획이라도 어떻게든 [영원한 사랑]으로 평온하게 끝내는 방법도 있습니다. 1 대리가 원하는 인간 세계의 그 ‘소소하고 평온하게 탄생하고 살아가다가 소멸하는 삶’ 말입니다.”



171713 대리는 1 대리에게 조용히 말하며 의자에 계속 잠들어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죽은 듯 누워있는 갈색 머리의 소녀는 숨소리로만 존재하고 있음을 알렸다.  



“[영원한 사랑]까지는 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럴 필요도 없구요. 그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만들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삶에 대한 애정, 인생에 대한 애착, 살고 싶어 하는 마음, 갖고 싶은 것이 생기는 그 순간, 그런 순간만 있다면 완벽합니다. 뭐, ‘첫사랑’ 정도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소리가 없던 모니터에서 갑자기 한 화면이 확대되더니 갈색머리의 소녀가 보였다. 누군가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카메라로 찍고 있는 여성의 모습도 함께 보였다. 1 대리는 안경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올리며 화면을 손짓으로 한 번 더 확대했다. 웃지 않는 아이의 모습은 계속해서 카메라에 찍혔다. 이윽고 여성이 몇 마디를 하자 그제야 활짝 웃는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본다.

1 대리는 0 번의 모습을 한 소녀의 웃는 얼굴을 보더니 곧 화면을 다시 닫았다.



“171713 대리님, 가장 근접한 상대자에게 깃들어 업무 수행을 해 주기 바랍니다. 장기 출장이 되겠군요. 상신은 필요 없습니다. 본사에서 그건 즉시 결재할 수 있습니다.”
“비밀 유지를 위한 추방 같군요.”
“마음대로 생각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이제 업무가 배정되었으니 수행은 하셔야 합니다.”
“제가 거부할 권한은 없습니까.”
“잘 아시다시피, 저희는 ‘대리’ 일뿐이니까요.”



다시 해맑은 웃음을 짓는 1 대리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얄미워 보인다.

문득 171713 대리는 202117 대리의 기획이 떠올랐다. 202117 대리의 예비자는 분명히 0 번이 깃들어 있는 소녀와 [첫사랑 전형] 기획을 진행하고 있으며, 곧 수행될 예정이다. 0 번의 인생 파일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굳이 그런 주변 인물들의 관계가 과연 필요한 것일까. 정상적인 업무 진행 과정이 아니라 ‘편법’까지 쓰면서 그 기획을 상신한 것은 1 대리다.

눈앞에서 얄미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일을 했을 리 없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0 번의 부재를 알고 있었으니까.  



“업무를 수행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처음 기획한 의도대로 진행할 겁니다.”
“네, 제가 원하는 것도 그겁니다. 최종 승인까지는 갈 수 없겠지만, 어쨌든 그 과정은 꼭 필요하니까요.”
“왜죠.”
“가장 빠르게 0 번이 복귀를 하려면, 스스로 소멸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소소하거나 평온하지 말아야죠. 삶을 견딜 수 없게 가장 큰 고통을 줘야 합니다.”
“가장 큰 고통....”



모니터 속의 화면이 둘 사이의 바닥으로 옮겨졌다. 드넓게 펼쳐진 하늘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

171713 대리는 1 대리가 0 번에게 안겨주고 싶어 하는 인간 세계를 보았다. 고통, 추락, 한 없는 절망....



“고통을 넘어선 절망 그리고 또 절망..., 한 없이 추락해야 합니다. 더는 희망이라는 세계에 올라서지 못하도록. 다시는 인간 세계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을 만큼....”
“202117 대리의 [첫사랑 전형] 예비자는 왜 필요한 거죠?”
“글쎄요, 일종의....”



그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 1 대리는 171713 대리를 바라보더니 족쇄를 끌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절그렁, 소리가 다시 한번 끝없는 하늘 위로 메아리쳤다.



“기폭제 같은 거라고 해두죠.”



171713 대리는 1 대리의 눈동자에 깃든 감정을 읽고 굳어지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집착, 아니..., 그건 광기에 가까웠다.
이 세계를 잠시 내팽개친 관리자에게 보내는 애달픈 복수.... 절그렁, 쇠사슬 소리를 내며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 때문에 소녀의 가녀린 모습이 가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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