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ologue: 편지
사라, 오랜만이에요.
우리가 만난 지도 좀 된 것 같네요. 오늘 이 편지는 제가 떠나고 난 뒤에 변호사인 해리를 통해 전달될 것 같아요. 이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져 버리는 저 때문에 아마 한 동안은 해리가 많이 바쁠 것 같지만, 그래도 이 편지 정도는 전달해 줄 수 있겠죠.
예전에 상담을 받았을 때, 저에게 말씀하셨던 거 기억하세요? 뭐든 생각나는 것, 말하고 싶은 것부터 말하면 된다고. 그게 상담의 시작일 거라고 말씀하셨죠. 그때의 저는 할 말이 많이 없었어요. 아니, 사실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 이야기는 사실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은, 음....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제인이 갑자기 행방불명된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제인이 사라진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별로 드릴 말씀이 없어요. 경찰 조사에서도 말했듯이 저는 제인의 행동을 통제할 수도 없고, 오히려 그녀가 제 인생을 통제했으니까요. 지금도 물론, 그렇고요.
제인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오늘의 이 편지는 제인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네요.
제 인생에 거의 대부분은 그녀와 함께 했고, 어쨌든 그녀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아직 여전히 법적으로는 저의 보호자니까요.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먼 기억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녀가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먼저 떠올라요. 가만히 저를 바라보던 시선은 언제나 여러 가지를 담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감정이 보통의 ‘엄마’가 가지는 감정은 아니라는 것을 언젠가부터 깨달았어요.
아마 학교에 갔을 때, 친구들이 부모님과 함께 만든 쿠키를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 제인에게 물었을 거예요.
“제인, 왜 우리는 쿠키를 굽지 않아?”
“오, 아가. 쿠키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구워야 해. 하지만 우린..., 서로 사랑하지는 않잖아.”
주방에서 커피잔을 우아하게 들고 마시던 제인이 내게 그렇게 말했을 때, 전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맞아, 우린....”
“우린 그냥 서로가 필요한 거야. 그리고 사랑보다 더 좋은 걸 하지. 존중과 도움, 배려 같은 것들 말이야.”
“그래, 맞아. 제인. 쿠키 같은 건 안 구워도 돼. 난 그걸 좋아하지도 않으니까.”
사라가 듣기에는 이상할 수 있겠지만, 우리 사이에는 그 감정이 더 중요했어요. 유대감 보다 신뢰감이 우선이고, 혈연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어요. 예술가의 독특한 세계관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분명히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제인은 주변 모두에게 친절했고, 또 나에게도 소홀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다만.... 나중에 돌이켜보니 보통의 부모가 가지는 감정과는 조금 이질적일 때가 간혹 있었다고 해 둘게요.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삶의 방식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것 정도만 알아두시면 될 거예요.
뭐, 물론 아주 가끔은 어린 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때고 있기는 했지만요.
하지만 지금은 저도 마냥 어리지 않으니까요.
‘제인’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보통의 사람들은 ‘타잔’이나 ‘제인 에어’를 떠올리죠. 어느 쪽에 더 가깝냐고 묻는다면 둘 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제인 에어’처럼 그녀도 마찬가지였죠. 또, 타잔의 제인처럼 늘 곁에는 남자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제인 에어’의 주인공과 달리 그녀는 사랑에 감복하고 눈이 먼 추남 로체스터에게 돌아가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타잔의 제인처럼 남자가 늘 한 명이지도 않았죠.
저는 제인의 부모님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듣기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호텔에서 일할 때 스위스인지 어딘지의 어느 대부호를 만났고, 그때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대부호가 자식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일정한 재산을 나눠주기로 약속하게 된 정도만 알아요. 물론 제인이 직접 알려준 건 아니에요. 제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대충 알게 된 이야기예요.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아마 그 대부호가 죽었다는 사실을 뉴스로 접한 후 제인이 한 동안 저를 한국의 지인에게 맡기고 사라졌던 그 사이에 그녀가 뭔가를 했던 것 같아요. 친자 확인 소송이든 뭐든, 그녀는 분명히 자신이 받을 몫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걸 얻어냈죠.
그녀가 실력은 있지만 가난했던 예술가에서 유명한 예술가 겸 사업가로 변신했을 때가 그때였으니까요.
아, 그전까지는 허름한 울타리가 돋보이는 주택에서 살았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사건이 있어요. 뒷 집과 이어진 울타리가 조금 부서져 있었는데, 뒷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으면 항상 그 틈으로 저를 바라보던 뒷집 남자의 눈이 떠올라요. 발갛게 상기된 채 쪼그리고 앉아서 저를 바라보던 그 왼쪽 눈, 파란 눈동자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는 했었어요.
흐린 날이던 맑은 날이던 제가 뒷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으면 그 남자는 늘 저를 바라보며 뭔가를 했었어요. 그건 분명 좋은 일은 아니었을 거예요. 숨어서 한 걸 보면 말이에요.
그렇다고 방치된 건 아니었어요. 제인은 뒷마당에서 놀고 있는 저를 항상 주방 창문으로 보고 있거나, 아니면 문틀에 기대서 보고 있었어요. 다만, 제인은 뒷집 남자의 그런 시선을 모른 척, 못 본 척했을 뿐이에요. 그 남자는 제 몸에 손 끝 하나 대지 못 했어요.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난 거죠. 네, 맞아요. 그때 신문에 떠들썩했던 그 사건 말이에요. 제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첫 번째 사건.
어쨌든 그 사건 이후로 그녀의 작품 세계가 다양해지고, 그 작품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이후에 그녀의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으로 지금까지 이렇게 잘 성장한 거죠.
쓰다 보니 제 이야기 아니라 제인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네요. 하지만 사라..., 제 인생에서 제인을 빼면 사실 할 이야기가 얼마 남지 않아요. 저에게는 친구도 몇 명뿐인 데다가 제 외모는 어디에서도 눈에 띄어서 제인은 언제나 저를 숨기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세상과 접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오늘부터는 다를 거예요.
지금은 제인이 제 곁에 없고, 난 이제 내일이 지나면 이 곳을 떠날 테고, 곧 보호자가 없어도 될 나이가 되니까요.
제인의 사업 관련 이야기들은 내가 잘 모르는 것들이니 그녀의 파트너들이 알아서 할 테고, 지금 내가 할 일은 그녀의 재산이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떠나요. 일단 제가 안 보여야 억측이 사라지고 사그라질 것 같아서요. 온갖 추측성 뉴스들은 저를 너무 힘들게 하고, 제인의 생사여부보다 그녀의 사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언론에 지칠 대로 지친 것도 사실이에요.
무엇보다 제인은 제가 언론에 자꾸 드러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언젠가 돌아온 제인에게 제가 할 말이 없으면 안 되니까, 지금은 이게 최선인 것 같아요.
물론 제가 이 곳을 떠나 아무 곳이나 가는 건 아니에요. 어릴 때 제인이 저를 한 동안 맡겼던 한국의 지인에게 다녀올 거예요.
그곳은, 정말 저에게 특별한 곳이에요.
아니, 특별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에요.
사라, 당신이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요.
가기 전에 이 편지를 쓰는 건 그래도 당신에 대한 나의 마음이 조금은 전달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줘요.
한국은 멀지만 연락은 가능할 테니, 곧 다시 편지 쓰도록 할게요.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안녕히.
- J 가
PS. 아, 제인의 작품이 곧 전시회를 한다는 건 알고 있으시죠? 유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아서 그런지 벌써부터 반응이 뜨겁다고 하더군요. 해리에게 초대장을 보내도록 말해 둘게요. 제인의 작품을 본다면 아마 저와 제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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