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안: ‘질투’ 그 너머의 ‘무언가’
시호도 같이 가자고 했다. 까딱 잘 못하다가는 또 재희에게 제 속마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런 원우의 제안에 흔쾌히 그러자고 하는 재희는 잠깐 기쁜 얼굴이 되었다. 그것은 원우의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과 제 또래의 친구를 사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이 동반된 복합적인 것이었다.
“아, 안녕..., 하세요?!”
“안녕하세요.”
“뭐야. 둘이 동갑이야. 말 놔.”
“그, 그래도 될..., 까?”
원우랑 나란히 서 있던 시호가 멀리서 걸어오는 재희를 보고 먼저 손을 흔들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나누자 원우는 낯선 시호의 모습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를 쳤다. 3년 가까이 봐 왔지만,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영 적응되지 않는 행동과 말투였다. 재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긍정의 대답을 하자, 활짝 웃는 시호의 얼굴은 더더욱.
“이거 다른 색깔로 보여줄 수 있나요?”
저녁 연습이 있는 날, 셋은 낮에 백화점이 있는 도심의 번화가 한가운데서 만났다. 백화점 쇼핑이 능숙한 자신과 달리 휘황찬란한 조명과 건물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남자 애 둘이서 쭈삣거리기만 하는 모습이 재희는 웃겼다. 익숙한 듯 다양한 스카프 종류를 살피고 신중하게 고르는 재희를 보며 원우와 시호는 최선을 다해 의견을 내보았지만, 결국 그냥 재희가 선택하기로 했다.
“너희는 색감을 너무 읽을 줄 몰라.”
“미안하네.”
“어차피 네 마음대로 고를 거였잖아.”
“맞아, 사실 기대도 안 했어.”
자신의 의견들이 모두 묵살당하자 시호와 원우는 약속이라도 한 듯 팔짱을 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두 사람의 행동이 또 재희를 웃게 만들었다.
뭔가 오랫동안 만난 친구 사이의 자연스러운 대화 같았다. 한 번도 그런 대화를 한 적은 없었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니 자신의 삶에서 이런 순간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먹먹해지기도 하는 재희였다.
쇼핑을 마치고 향한 곳은 결국 두 소년에게 가장 익숙한 햄버거 가게였다. 이번에는 셋이서 버거를 먹고 있으니 여느 한국의 또래와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 같았다. 타인의 눈에 세 사람은 정말 그렇게 보일까?
“연습은 많이 힘들지 않아?”
“아니, 좋아하는 거 하는 거니까. 아, 얘는 좀 힘들어해. 좀 많이 비실거리잖아.”
“뭐래, 어이없네. 지난번에 실수한 건 너였잖아.”
“춤은 내가 더 잘 춰.”
“가사는 내가 더 잘 써.”
“유치하게 잘 쓰지.”
“넌 더 하잖아.”
시호가 원우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짐짓 형님 흉내를 내자 원우가 금세 어이없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맞은편에 앉아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는 둘을 보고 있으니 재희는 한국에 오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있을 때는 볼 수 없는 다양한 표정의 원우를 보고 있자니 곧 떠나야 한다는 사실도 잊게 된다.
시호와 함께 있으니 자연스럽게 웃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원우와 그런 원우에게 더 많이 웃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 순간 뭔가 기분이 묘해지는 재희였다.
자신이 한국에 온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쉴 때 주로 뭐하고 놀아?”
“우리 둘이? 얘랑은 별로 안 친해.”
“야! 서운하게 또 이러네.”
“너 게임도 못하잖아.”
“야,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또....”
“그럼 피시방 가자.”
“아니, 그래도 재희랑 피시방은 좀.
“왜? 좋아, 가자. 나도 궁금해.”
“뭐, 나, 나도 좋아. 가자, 그럼.”
남자애들 특유의 허세라는 것은 국가별로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만 있다는 피시방 문화도 그렇게 경험해보니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원우가 하는 게임은 너무 어렵고 낯설었다. 결국 혼자서 게임에 푹 빠진 원우의 뒤에서 장난스럽게 손가락질을 하는 시호와 함께 소리 없이 웃던 재희는 단순한 레이싱 게임으로 바꾸고 나니 시간이 금방 갔다. 재미있냐고 종종 묻는 시호의 질문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해 봤는데, 재밌다.”
마무리는 떡볶이 집이었다. 원우는 매운 것을 좋아했다. 그런 점은 처음 알았다. 하지만 잘 먹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잘 못 먹지만 좋아하는 것은 어떤 것 일까. 피하고 싶지만 결국 좋아지고 마는 그런 기분일까.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서 가방에 가지고 있던 카메라를 잊고 있다가 마지막에야 꺼내 들고 음식 사진을 찍어보았다. 빨간 색감이 좋았다. 카메라를 응시하며 나란히 앉아있는 시호와 원우의 모습도 좋았다. 사진 속의 떨떠름하게 웃는 두 사람은 형제 같아 보이기도 했고, 친구로 보이기도 했다.
화면 속, 긴 눈매를 한 원우와 비슷하게 시호는 쌍꺼풀이 없었고 웃을 때마다 10대 소년 특유의 묘한 매력을 풍겼다.
“미국에서는 뭐 공부해?”
“미술. 그리고 사진도 조금.”
“와, 멋지다. 예술가네?”
“아니야. 그냥 공부 중이지.”
“우리도 곧 유명한 가수가 될 거야.”
시호의 말에 원우가 그만하라는 뜻으로 팔을 툭 쳤지만, 시호는 전혀 쑥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재희는 그런 시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신이 꿈꾸고 바라고 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는 그 마음이 재희에게까지 전달되어 마치 다가온 미래를 미리 본 기분이었다.
“나중에 해외 투어 콘서트 할 때 미국에도 와줘. 그러면 나도 보러 갈 수 있을 테니까.”
“에이, 그때는 우리 콘서트 표 구하기 정말 힘들지도 몰라. 그러니까 우리가 널 초대할게. 진짜 꼭 보러 와야 해. 알았지?”
“응, 그럴게. 꼭 그렇게 되면 좋겠다.”
시호와 재희의 대화에 원우는 계속 끼어들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떡볶이를 뒤적거릴 뿐이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약속하는 두 사람의 바보 같은 대화에 끼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고작 하루 만에 절친처럼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두 사람의 사이에 끼고 싶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재희는 그의 불안 아닌 불안을 조금은 읽을 수 있었다.
시호와 헤어질 때 재희는 그가 당연히 연락처를 묻지 않을까 했지만, 재미있었다는 말과 다음에 다시 꼭 보자는 말만 한 채 그는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연락처 물어볼 줄 알았는데.”
“아쉬워? 내가 알려줘?”
재희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리자 원우가 대뜸 그런다. 순간 튀어나온 말에 당황한 것은 재희가 아니라 당사자 원우였다. 곧 고개를 돌리더니 데려다줄 테니 가자며 걸음을 옮긴다.
“왜 화를 내?”
“누가 화를 내.”
“방금.”
“화낸 거 아니야.”
“시호한테 내 연락처 알려줘도 돼.”
“......”
“너, 안 알려줄 거지?”
“당연하지. 내가 왜?”
직구로 물어오는 재희의 질문에 원우는 순간 다시 울컥해서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흐응.”
“.......”
“에이, 네 친구잖아. 알려줘도 돼. 혹시 시호가 나중에라도 물어보면 알려줘.”
갑자기 재희의 눈이 원우만큼이나 길고 가늘게 변했다. 원우의 팔을 툭툭 치며 장난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그러는 재희의 행동에 원우는 차분해지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저건 분명 저를 도발하고 약 올리려는 수작이다. 어릴 때는 많이 당했지만 다시 만난 요즘은 그래도 재희에게 많이 휩쓸리지 않았다.
장난스러운 예쁜 소녀의 얼굴 앞에서 차분해지려고 애쓰고 또 애써본다. 손 끝으로 자신의 소매를 천천히 당기며 원우는 걸음을 다시 옮기려고 했지만, 결국 대답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난 절대로..., 안 알려줄 거야.”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리듯이 대답하고 말았다. 그 모습에 재희는 멍한 표정으로 잠시 있다가 결국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런 재희의 반응에 원우는 어릴 때와 달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한 참을 웃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눈물까지 보이는 재희의 모습에 결국 같이 웃어버리는 원우였다.
“그만 웃어, 뭐가 웃기냐.”
“네가, 네가 웃겨. 크큭....”
“그래..., 실컷 웃어라.”
분명 오늘은 두 사람의 기억에 아주 큰 변화의 날로 기억될 것 같았다. 점점 다가오는 불안한 무언가는 일단 미뤄두고, 그저 지금은 행복해지기 위해 한국으로 온 재희의 처음 다짐처럼.
“난 시호 마음에 들어.”
“걔도 너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더라.”
“사귈까?”
“그러든가.”
“진짜, 진짜?”
“아, 그만 해.”
성큼성큼 걷는 원우의 긴 그림자 옆으로 신나 있는 재희의 그림자가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그림자는 점점 길어지더니 어느 순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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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원우와 시호가 연습 평가를 받는다는 소극장을 알아냈다. 재희는 혜숙에게도 말할까 하다가 그랬다가는 정말 원우에게 미움받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위치만 알아내려다가 함께 알게 된 사실은 원우와 시호가 속해있는 소속사는 연습생 선발에 까다롭기 유명한 곳이고, 데뷔는 더더욱 어렵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따라서 몇 달에 한 번씩 공개적으로 소극장 무대에 설 수 있는 연습생 유닛도 많지 않았다.
재희는 원우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그저 몰래 팬들 사이에 섞여서 들어갔다가 구경만 하고 올 생각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자신이 오는 것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몸도 마음도 더 가까이 있는 지금을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원우의 모습들을 모두 제대로 보고 싶었다. 그의 꿈은 어떤 형태의 것인지도, 재희는 알고 싶었다.
“입장 시작하겠습니다.”
극장 밖에는 생각보다 많은 팬들이 모여 있어서 재희는 살짝 긴장했다. 소극장이라서 좌석이 얼마 되지 않았고, 급하게 표를 구하려다 보니 양도받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연습생 유닛이었지만, 팬카페가 다양했다. 재희는 그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활동 중인 곳을 골라서 가입했고 운이 좋게도 표를 양도받을 수 있었다.
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다양한 연령대, 간간히 외국 팬들도 있었지만 확실한 건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너..., 인기가 정말 많구나.”
작게 중얼거렸지만, 문득 재희는 그의 꿈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자신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공연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음악이 들렸다. 낯선 소년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시호였다. 저도 모르게 재희는 손을 흔들다가 화들짝 놀라며 다시 손을 내렸다. 다행스럽게도 시호는 자신을 못 본 모양이다. 며칠 전 봤던 그 소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시호는 거침없는 몸놀림과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었고, 제법 성량이 좋은 목소리로 노래를 했다.
특유의 비음 섞인 목소리와 날카로운 하이톤이 어울려 팬들은 그와 동료들의 무대가 끝나고 난 후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자, 다음 무대는요....”
무대를 진행하는 선배 가수의 소개에 맞춰 다른 유닛이 등장했다.
무대의 오른쪽부터 조명이 켜졌다. 세 명이 등장하고, 그들의 안무와 이동에 따라서 조명이 함께 움직였다. 이윽고 무대 중앙에 있는 세 사람과 합쳐졌다. 그 속에 원우가 있었다. 합쳐진 유닛은 같은 안무를 하다가 뭉치고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몸놀림은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니었다.
재희는 원우를 따라서 한 참 시선을 옮겼다. 다른 표정이다. 자신과 만날 때, 시호와 셋이서 만날 때, 혜숙과 현우와 있을 때. 그때 보았던 표정이 분명히 아니었다. 짧은 음악이 끝날 때까지 그의 감정이 동작과 노래로 재희에게 전해졌다.
한 걸음씩 무대 위를 빠르게 혹은 느리게 걷는 원우의 모습이 점점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그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내일의 그는 오늘의 그와 또 다르게 성장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재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법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 드디어 끝이 나고 재희는 낮은 숨을 내쉬며 두 손을 말아 쥐었다. 보지 말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공연이 끝나기 전에 조용히 빠져나오려 했던 계획은 실패했다.
다양한 음악과 공연으로 꾸며지는 그곳에 원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재희는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서도 모른 척 왔던 스스로가 이해는 되었지만, 공연이 끝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서 재희는 계속 움직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공연장 앞은 이미 연습생들을 따라 움직이는 팬들 마저도 없었다.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다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와버렸다. 낯선 버스정류장에서 재희는 떠나는 버스와 오는 버스를 계속 보고만 있었다. 천천히 걸어오는 사람들과 바쁘게 떠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자신이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는데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재희는 한 참을 그곳에 있었다.
문득 추워져서 시간을 살피러 휴대폰을 보니 시간은 어느새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부재중 전화가 18통. 모두 원우였다.
-“... 너 어디야? 왜 전화를 안 받아?!”
목소리에는 두 가지가 담겨 있었다. 화가 난 건지 걱정을 하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둘 중 무엇이라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미안해. 몰랐어. ”
-“넌 사람이 걱정... 아 됐고, 어디 있는 거야?”
“여기..., 어딘지 모르겠어.”
원우의 질문에 재희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밥을 먹었던가. 전화기 너머의 원우 목소리가 다시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야, 어딘데? 설명해 봐.”
“그게, 버스 정류장인데. 음..., 처음 온 동네라서.”
“후우..., 버스정류장 이름이 있을 거 아니야.”
재희가 띄엄띄엄 읽어준 버스정류장 이름을 듣더니 원우는 잠시만 있으라고 했다. 이윽고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이 가는 동안 다른 곳에 가면 안 된다고 말하며 그대로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안 와도 되는데....”
-“거짓말하지 말고. 길 잃은 건 너잖아.”
“택시 타면 되지.”
-“그럼, 지금이라도 그럴래?”
“... 아니.”
-“거 봐.”
확실히 원우는 어릴 때와 달라졌다. 이제 어지간해서는 이길 수 없다. 제인이 바라는 대로 재희가 온 힘을 다해서 모든 걸 빼앗으려고 들어도 원우는 제 가족과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은 단단해졌고, 정신은 강해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재희는 자신이 저도 모르게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 한국으로 온 걸까..., 왜 자신은 지금 이 낯선 곳에서 혼자 웃고 있을까.
“암튼, 사람 걱정..., 귀찮게 하는 데는 뭐 있지.”
왜 웃고 있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원우가 이렇게 좋을까. 왜 마냥 그저 기쁘기만 할까. 재희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원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앉아있던 자신을 당겨 일으켜 세우는 원우가 자연스럽게 손을 놓지 않았다.
“뭘 하다가 여기까지 온 거야.”
“그냥..., 걷다가.”
“아까 그대로 오피스텔에 간 줄 알았잖아.”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생각이 많아져서....”
문득 재희는 말을 멈추고, 원우를 바라봤다.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내가 공연 보러 간 거 알고 있었어?”
“거기 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매번 오는 분들이니까. 너처럼 촌스럽게 두리번거리면서 보는 사람은 없지.”
“아..., 아....”
말을 잇지 못하고 제 입을 틀어막는 당황한 재희를 보며 이번에는 원우가 웃었다.
사실 재희가 오지는 않았을까,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지만 진짜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무대에 오르자마자 뒤편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재희가 보였다. 정말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서 표현하듯 그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재희만 보였다. 그래서 그 자리에 앉아있는 재희가 진짜인지 아니면 자신의 바람이 만들어낸 헛것인지 구분해야 했다. 무대 위 자신을 따라서 고개가 움직이는 재희의 모습에 그제야 진짜임을 알게 되었다.
공연이 끝난 후 연습실에서 자신들의 무대 공연을 다시 보면서도 정신은 온통 혼자 돌아갈 재희에게 쏠려있었다. 문제점을 분석하고, 다음 연습에 대한 의논이 끝나자마자 원우는 얼른 재희에게 전화를 했지만 계속 받지 않았다. 문득, 어릴 때의 기억이 겹쳐지면서 얼마나 애가 타던지, 재희가 있는 오피스텔로 찾아가려고 택시를 잡으려는데 드디어 통화가 되었다.
“집도 혼자 못 찾아가는 바보 주제에. 다음부터는 그냥 말하고 보러 와.”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런데 자신의 무대를 본 재희는 뭔가 버림받아 외로운 길고양이 마냥 그렇게 또 낯선 동네의 버스정류장에 쓸쓸히 앉아있다. 계속 손 잡아주고, 보살펴주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말이다.
“그래서 공연 보니까 어땠어?”
“잘하더라. 난 잘 모르지만. 충분히.... 매력 있었어.”
“시호보다?”
“어? 아....”
태연하게 물어보는 원우와 달리 그 질문을 받자 재희는 뭔가 좋아하는 소년을 앞에 둔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내일의 너는 오늘의 너와 또 다르게 성장해 있을 것이고, 그런 너의 미래를 그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설레는 일이지만, 한 편으로는 그렇게 한 걸음씩 멀어져 다시는 나를 돌아보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된다는 말을 삼켰다. 그의 꿈에 성장을 막을 수도 없거니와 그럴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쯤은 재희도 알고 있었다.
“뭐, 둘 다 잘했어. 시호도 잘하고, 너도....”
“둘 중에 누가 더 나은데?”
“당연히....”
“.......”
“택시 안 잡아?”
대답을 하려다가 말을 돌렸다. 여전히 원우에게 붙잡혀 있는 손을 재희는 황급히 빼려고 했다. 하지만 더 단단히 움켜잡힌다. 차가워진 재희의 손은 원우의 손과 함께 그의 재킷 속으로 들어갔다. 제 손을 집어삼킨 원우의 재킷 주머니를 바라보다가 코끝이 빨개진 재희의 얼굴이 원우를 향했다.
“택시 안 잡혀. 지하철 타. 너네 오피스텔은 그게 더 빨라.”
시선을 마주하지는 않지만 원우의 귀 끝이 빨개지는 것이 보였다.
“오늘은 숙소 안 가도 되는 거야?”
“아니, 집에 들렀다가 다시 들어가야지.”
“원우가 나 데려다주는 거네? 우와...”
“그래. 너 데려다주는 거야.”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재잘거리려는 재희의 목소리에 이번에는 원우의 목소리가 낮게 덮였다.
“그러니까 이제 걱정 좀 그만하게 만들어.”
“.......”
“천천히 물어볼게. 너한테 무슨 일 있는 건지, 여기는 왜 온 건지.”
“..., 손님이라며”
“거짓말이었어.”
원우는 자신이 잡고 있지 않은 반대편 재희의 차가운 손을 손수 주머니 안에 넣어 주고서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잠깐 심술 나서, 그래 본거야. 넌 어릴 때 나한테 많이 그랬잖아. 그러니까....”
“......”
“말하고 싶을 때, 다 말해 줘. 이제 혼자 앓지 말고.”
한국으로 온 이유, 원우 앞에서는 웃음이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다만, 모른 척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알고 있는 원우는 이제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가 충분히 불편할 텐데 그럼에도 자신을 돌아봐주며, 한 번 더 바라봐주고, 내내 신경 써준다.
“그때까지는 여기 내 옆에..., 아니, 우리랑 있어.”
원우의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에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재희는 눈 끝이 빨개지려고 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차가운 길 위를 그냥 걷고 있을 뿐인데, 이 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 틈에 섞여 걸어가는 이 길이 끝나지 않는, 그저 그런 보통의 날로 계속 이어지길 자꾸만 바라게 된다. 결국은 덧없는 바람일지언정 기꺼이 그러겠노라, 대답하고 싶어 져서 자꾸만 목이 메어온다.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재희의 모습에 원우는 주머니 속의 얇은 손을 더 꼭 잡아보았다. 제 온 우주를 줘도 이 소녀에게만은 작고 작을 자신의 마음이 자꾸만 보이는 것 같아서...
지금의 자신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지만, 그런 답답하고 미안한 마음마저도 이 주머니 속의 손 끝으로 전해지길 바라고 또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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