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꿈’과 ‘현실’
게으르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휴일의 오후는 원우와의 통화로 시작되었다. 어제 뒤풀이 겸 회식이 늦게 끝났는데, 혜숙과 현우가 연습생들의 다른 부모님들과 친해져서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우의 말투 끝에 남는 웃음은 그가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만들었다. 재희는 뒹굴거리며 원우와의 통화를 즐겼다.
어제는 왠지 걷고만 싶어서 결국 오피스텔에 한참 만에 돌아왔고, 원우는 그 사이 두 번의 전화를 했었다.
-“너 아직 밥도 안 먹고 있지?”
“혜숙 씨랑 현우 씨는?”
-“엄마는 가게에 나가셨고, 아빠는 오늘부터 지방 출장이야.”
“넌?”
-“난 오늘까지는 쉬어.”
“아....”
-“밥 안 먹었으면 와서 같이 먹어.”
“.......”
-“왜 대답이 없어?”
“알았어.”
원우의 초대에 재희는 반사적으로 몸이 뻣뻣해졌다. 그 따뜻한 집에 지금 원우 밖에 없다는 뜻이니까. 차라리 밖에서 점심을 먹자고 할 것을 그랬다. 다시 전화하려다가 그냥 대충 외출 채비를 시작했다. 이제 밖은 완연한 겨울이었다. 곧 있으면 재희의 생일이기도 했다.
긴 니트를 입고 혜숙이 만들어준 재킷을 걸치고 나니 목이 좀 휑했다. 아직 대충 풀어둔 캐리어 속을 뒤져봤지만, 목도리 따위는 없었다. 원우와 시호가 같이 가서 샀던 혜숙의 머플러는 아직 쇼핑백 채로 재희의 공간에 있었다. 자꾸만 선물할 타이밍을 놓친다.
사실은 누군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주는 것 또한 어색하고 낯설기만 해서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돌아가기 전에는..., 줄 수 있겠지....”
돌아가기 전,
언젠간 돌아가야 한다는 그 사실을 떠올리다가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지만 그 날이 될 때까지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재희는 그전에 현우의 선물도 준비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어릴 때 한국에 온 가장 처음의 이유는 현우 때문이었는데. 자꾸만 그는 잊게 된다. 아니, 사실은.... 그저 그렇게 적당한 사이를 두고 지금처럼 친하지도 서먹하지도 않게 지내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왠지 현우와 깊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꺼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듣게 될 것 같아서. 무의식 중에 피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제인은, 그를 재희의 ‘아빠’라고 했다. 이제는 그럴 리가 절대로 없다는 것을 재희도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어릴 때의 기억은 자꾸만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밀어내고자 노력 중이었다.
어릴 때는 원우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서 그가 반응할만한 이야기를 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재희는 원우에게 ‘너의 엄마와 아빠를 빼앗겠다’는 말을 진지하게 했었다. 그 당시에 웃음기 없이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재희가 원우는 무서웠을 것이다.
세상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가족을 빼앗겠다고 말하는 아이와 함께 지내는 것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불완전하게 지탱하던 자신의 세상을 금방이라도 깨트릴 것처럼 흔들어대는 자신이 얼마나 미웠을까.
재희에게는 그저 원우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몇 안 되는 말이었고, 원우에게는 자신만의 자그마한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아 위태롭기만 한, 그래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 왔어.”
“딱 맞춰 왔네.”
식탁에 차려진 혜숙의 음식을 먹으며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란말이와 북엇국, 감자조림과 오징어채 볶음, 천천히 식탁 위의 음식을 음미하듯 먹었다. 거실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은 밖의 차가운 공기와 달리 따사로웠고, 주방은 혜숙이 준비한 온기로 가득했다.
재희는 밥을 먹으며 창 밖의 햇살이 들어오는 휴일의 집안 풍경을 보다가, 문득 이 모든 것이 꿈이라도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면 자신의 앞에는 함께 밥을 먹고 있는 원우가 앉아 있었다. 이후에 뭔가가 벌어지더라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놀랍도록 평화롭고, 또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설거지는 몰아주기.”
“난 손님이잖아.”
“이럴 때만?”
“치이..., 알았어. 그런데 나 설거지 잘 못해.”
“일단 가위바위보 해.”
기어이 가위바위보를 세 번이나 했다. 재희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싱크대 앞에 섰다. 두리번거리며 세제와 수세미를 찾아서 어설픈 자세로 작은 접시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맨손으로 미끌거리는 접시를 닦다가 결국 놓쳤다. 다행히 큰소리와는 다르게 깨지지는 않았지만, 뒤편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원우가 결국은 수세미를 빼앗다시피 했다.
“저리 비켜. 뭘 시켜먹지도 못하겠네.”
“내 손은 그림 그리는 것만 잘해.”
“알았어, 위험하니까...., 아니, 걸리적거리지 말고 저리로 가 있어.”
“헹구는 건 도와줄게.”
“저리 가라니까.”
말과 달리 원우는 재희가 움직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싱크대 앞에서 두 사람의 팔과 어깨가 부딪쳤다. 그릇을 위험하게 두 번이나 더 놓치고 나서야 재희는 결국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난 후 설거지를 마무리하는 원우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어릴 땐 그저 약해 보이기만 했는데, 이제는 제법 큰 키에 어깨도 넓어져 있었다. 재희는 무슨 생각이 나서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그의 뒤편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원우.”
“응? 왜? 냉장고에 주스 있어. 꺼내 마셔. 아니면, 엄마가 홍차....”
“얍!”
돌아보지 않고 대답하던 원우의 허리를 재희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어릴 적 치던 장난이 떠올랐다. 원우가 방심하고 있으면 재희가 뒤에서 원우의 허리를 끌어안거나 목에 매달려 업히고는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안아주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재희는 여전히 또래와의 공감과 소통이 부족했다. 앞에서는 얼굴을 마주하니 어색했고, 그래서 택한 방법이 고작 장난처럼 뒤에서 몰래 달려드는 일이었다.
어릴 때는 원우가 자주 방심하는 덕분에 심심치 않게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예전보다 커진 키만큼이나 원우는 변했고, 그때와는 달라졌으니까.
그런데 지금 문득 원우가 그때처럼 방심하고 있으니 갑자기 ‘안아주고 싶다’라는 단순한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의 무모한 재희’가 나타났다.
“.......”
“.... 바, 방해되니까, 그만해.”
당황한 원우가 말을 더듬었다. 누군가의 심장이 크게 뛰고 있었다. 재희는 그 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원우의 허리를 끌어안 채 조금 더 등에 붙어서 귀를 대고 들어 보았다.
쿵, 쿵... 쿵, 쿵....
자신의 것인가, 아니면 원우의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의 마음인가.
잠시 뻣뻣하게 굳어있던 원우는 긴 숨을 내쉬더니 포기한 듯 다시 남은 설거지를 했다. 물소리와 함께 계속해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귀를 대고 그렇게 새끼 코알라처럼 꼭 붙어서 잠시 있으니..., 졸렸다. 건조대에 그릇이 차곡차곡 쌓이고,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소리도 멈췄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원우....”
“떨어져, 이제.”
“너 추위도 많이 타는데, 여전히 몸은 차갑구나.”
“.......”
“난 겨울에 태어나서 따뜻한데....”
이게 무슨 대화냐 싶을 정도로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있었다. 선채로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재희는 결국 천천히 원우의 등에서 몸을 뗐다. 그러자 원우가 긴 숨을 다시 천천히 내쉬었다.
“이상하게 졸려.”
“밥 먹으면 원래 졸려.”
“그런 건가....”
재희가 원우에게 한 걸음 떨어지며 졸린 눈을 꿈벅거리다가 돌아서는데, 원우의 오른손이 재빠르게 재희의 목 뒤로 갔다.
“아, 차가워!”
“잠이 확 깨지?”
“야!”
재희의 목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자 원우는 피식거리면서 웃었다. 사계절 내내 늘 서늘한 원우의 손은 겨울이면 더 차가워졌다.
“갈 때 엄마 목도리라도 하나 두르고 가. 올 때 보니까 목이 너무 휑하더라.”
“혜숙 씨처럼 말하네.”
“과일 먹을래? 아니면 차?”
“여기서 조금만 자다가 가도 되지? 이상하게..., 너무 많이 졸려.”
소파에 가서 누웠다. 재희는 이마 위로 자신의 손을 올리고 한껏 주말의 오후 햇살을 게으른 고양이처럼 즐겼다. 원우는 작은 컵에 뭔가를 가져와서 소파 앞의 바닥에 앉았다. 재희의 낮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텔레비전 음량을 조금 낮추고 가만히 화면을 응시하는 뒷모습은 또 방심하고 있었지만, 재희는 가물거리던 눈을 결국 감았다.
이제 이곳이 아주 편안한 장소가 된 것 같았다.
곤히 잠이 든 재희를 돌아보던 원우는 얕은 숨을 조용히 내쉬다가 재희의 이마 위에 올린 손 위로 자신의 손 끝을 가져갔다. 그때 미지근하던 재희의 손은 이제 제법 따뜻했다. 살그머니 손목을 끌어내려 편안하게 놓아주었다.
언제까지나 손님처럼 긴장하며 지내던 공간이 이제 정말 편해졌다는 뜻일 것이다. 아니면, 불편했던 마음이 편해졌던가.
“... 좋은 꿈 꿔.”
자신의 말이 재희의 꿈속에 닿기를.
원우는 소파 쪽으로 몸을 조금 더 당겨 앉아 그 위로 조심스럽게 팔을 괴고 잠든 재희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여전히, 아니..., 대체로 무표정하기만 하던 어릴 때 보다 훨씬 다양한 표정을 짓는 지금이 예쁘다. 제 눈에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조금 신경이 쓰이고 불안하지만.... 어쨌든.
언젠가 이 소녀의 꿈속에 자신이 나온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알 수 없는 악몽 속에서 자신이 그 따뜻한 손을 잡아 구해줄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바라고 또 바라며.
원우도 겨울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조금씩 감기는 눈을 이기지 못하고 그렇게 잠이 들어버렸다.
-
원우가 잠이 들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햇살은 빠르게 저물어 노을이 졌다.
석양이 얼마 남지 않은 오후를 알리자 재희는 그때서야 눈을 뜨고 제 앞에 가까이 엎드려 잠든 원우의 얼굴을 보았다. 어릴 적의 귀여운 무언가가 남아있지만, 지금은 쌍꺼풀이 없는 긴 눈매와 높은 콧대, 제법 날카롭게 각진 턱이 더 눈에 들어온다. 재희는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해 이제는 소년의 티도 벗어나려고 하는 그 순간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노을을 남기며 떠나가는 오늘의 태양처럼, 모든 것은 떠나는 순간이 있다. 재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더 그 많은 순간들을 마주해야 할까. 아니, 그 많은 순간들을 곁에서 함께 마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까지 잘 거야.”
“.......”
“일어나라, 원우야.”
원우의 귓가에 일부러 속삭이듯이 말했다. 깨어나지 말라고.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 얼른 일어나 자신과 눈 맞춰주길 바라는 마음이 반이었다. 엎드린 채 원우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가져가 한 마디 더 하려는데, 긴 눈매가 어느새 자신을 바라봤다.
“잘 잤어?”
“넌?”
“노을 진다. 밖에 나갈래?”
“싫어.”
눈을 뜨자마자 재희의 얼굴이 보였고, 원우는 그 순간이 아직도 꿈인 줄 알았다. 속삭이듯 일어나라는 소리를 들어서 눈을 떴을 뿐인데, 너무 기분 좋은 꿈을 꾼 것 같다. 다시 눈을 감으며 원우는 재희의 머리 위로 제 손을 올렸다. 천천히 재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원우의 손은 이제 제법 컸다.
“추운 거 싫어.”
“게으른 고양이 같아.”
“고양이는 너지. 그러니까 내가 쓰담쓰담해 주고 있잖아.”
“원우, 너 정말 가수 할 거야?
“.......”
“정말 하고 싶은 거지? 안 하면..., 안 되는 거지”
“.......”
원우는 천천히 다시 눈을 뜬다. 재희의 눈이 커다랗고 동그랗게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 온전하게.
계속 이런 눈으로 자신만 바라봐준다면, 그렇다면 안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부모님 외에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소속감, 형제애, 누군가의 관심과 애정 따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정확하게 뭔지 몰라서 지금 가장 좋아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어차피 뚜렷하지 않은 앞날이라면 지금의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다. 유명한 가수가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지금 가장 좋아하고 즐거운 것, 그리고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계속하고 싶다.
꿈과 같은 늦은 오후, 재희의 그 질문이 원우의 마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응, 정말 하고 싶어.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렇구나.”
“.......”
“다행이다.”
재희가 빙긋 웃었다.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원우는 눈을 다시 감았다. 괜히 봤다. 너무 예뻐서, 지금 원우의 손이 떨릴지도 모르겠다. 꿈인 줄 알았을 때는 심장소리가 안 들렸는데, 지금은 다시 쿵쿵 거리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원우는 숨을 길게 들이쉬며 다시 눈을 떴다. 여전히 소파에 엎드린 채 자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재희가 꿈처럼 있었다.
“공원 가기에는 너무 추워.”
“너랑 아직 공원 못 가봤잖아.”
“넌 오늘 목도리도 없이 왔고.”
“넌 더 추워지면 안 갈 거잖아.”
“갈게. 나중에, 꼭. 그런데 오늘은 말고.”
“알았어. 그럼 오늘은 게으른 고양이 하자.”
누군가의 입술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났다. 추위를 싫어하는 원우가 과연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지 모르겠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꼭 함께 했으면 좋겠다. 제자리..., 다시 한번 그 단어가 마음에 걸린다. 겨울은 해가 짧고, 그래서 결국은 원우와 노을을 함께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소파를 덮고 있는 포근한 패브릭 커버에는 혜숙의 향이 났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향.
“너 어릴 때 같이 목욕탕 갔던 거 기억나? 너 그때 현우 씨 같이 안 가면 안 간다고 떼썼잖아.”
“기억 안 나.”
“나랑 같이 가기 싫었던 거지?”
“정확하게 말해. 여탕에 같이 들어가기 싫었던 거지. 그때는 어려도 알 건 아는 나이였으니까.”
“기억 안 난다며?”
“... 아, 몰라.”
“바나나 우유 먹고 싶다.”
포근함, 따뜻함, 부드러움의 감각들이 어릴 적의 기억을 깨웠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그냥 보통의 의미 없는 대화가 오히려 특별하다.
“바나나 우유는 없고, 이거라도 마셔.”
몸을 일으켜 느릿느릿 주방으로 향한 원우의 손에 어느새 핫초코가 들려 있었다. 따뜻한 잔을 두 손을 받아 들어 달디단 그것을 마셨다.
“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고 가.”
“아니, 가야지.”
“너..., 언제 이야기해줄 거야? 여기 온 이유 말이야.”
“음, 오늘은 아니야. 오늘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안 되겠어.”
재희는 애써 웃으며 원우에게 말했다. 이미 재희의 두 손 가득 따뜻함이 담겨있었다. 그것들을 차게 식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둘러싼 차갑고 날카로운 현실은 혜숙의 따뜻함이나 원우가 준 핫초코 한잔에 비할바가 아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입에 담고 원우와 나누기에는 오늘의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저 온전히 가장 소중한 ‘오늘’로 기억하고 싶었다.
“저녁 먹고 가. 데려다줄게.”
“배불러. 그냥 갈래.”
“데려다준다니까?”
“혼자 가고 싶어.”
“고집은, 진짜....”
재희가 나가려는 것을 붙잡더니, 분주하게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원우의 손에 목도리가 들려있었다.
“이거라도 하고 가.”
“따뜻하네. 고마워.”
원우와 함께 한 주말의 점심식사와 정말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들었던 시간과 별거 아닌 대화들, 혜숙이 만들어 준 재킷, 자신의 목에 있는 원우의 목도리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다. 불안할 정도로....
“도착하면 전화해. 딴 데 가지 말고, 바로 가. 진짜 안 데려다줘도 되는 거야?”
“어린애 아니야.”
“어린애면 차라리 낫겠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자 차가운 바람이 재희를 향해 불었다. 인도 위의 앙상한 나무들이 겨울의 도시임을 알렸다. 저녁의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재희의 가슴속에서 빛났다. 꼭 안고 가서 저만의 장소에 두고두고 보고 싶었다.
어쩌면 이렇게 빛나고 반짝이는 것을 하나둘 모아서 제 것으로 만든다면, 그렇다면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견딜 수 있고,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사실은.... 사실은 돌아가고 싶지 않다. 자신이 이곳에 남는다면 혜숙과 현우는, 그리고 원우는 어떨까. 그리고 제인은....
소중한 ‘오늘’을 꼭 끌어안고 혼자 걷는 시간은 망설임과 기대감, 불안함 같은 것들이 재희와 함께 했다.
재희는 차가운 바람이 불자 몸을 웅크리며, 원우가 준 목도리 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바람이 멎었다.
전화가 울렸다. 해리였다. 분명 이른 아침도 아닌, 새벽일 텐데 이 시간에 전화라니....
“해리, 무슨 일....”
“좋은 소식이 있어요. 제인이....”
“네?”
뒤이어 말하는 해리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결국 들리지 않았다.
오피스텔의 문을 열자, 익숙한 뒷모습이 먼저 보였다. 떠날 때 보다 마른듯한 뒷모습과 그새 달라진 머리 모양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희가 늘 원우와 함께 가고 싶어 했던 공원은 가로등 불빛만 그곳에 있음을 알리며 저 멀리 아주 작게 어슴푸레 빛나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재희를 향해 다가온 여자는 다정한 듯 하지만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거리 정도에서 가볍게 안아준다.
“오랜만이네, 아가.”
제인이..., 기분 좋을 때 짓는 특유의 표정으로 재희를 향해 웃었다.
완벽하게 소중했던 ‘오늘’이 끝나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