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넷> 후기
아이가 죽었다. 어머니는 슬피 울었다.
아버지는 장례를 다 치를때까지 한번도 울지 않았다.
한 조문객이 물었다.
자식이 떠났는데 슬프지 않으시냐고.
아버지가 말을 하려 입을 벌리는 순간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자식을 잃은 죽음의 고통은 ‘단장(斷腸)’이라고 표현한다.
장이 끊어지는듯한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다.
햄넷(Hamnet)은 우리가 잘 알고있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에서 비롯된 제목이다.
실제로 셰익스피어에게는 햄넷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아이는 11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이 영화는 이러한 배경에서 출발한다.
아녜스는 마치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숲의 정령과도 같은 사람이다.
숲에서 살고, 풀과 흙을 만지고, 하늘을 나는 매와 교감하며 지낸다.
누군가의 손을 잡으면 그 사람의 미래나 생각, 능력이 보이는 능력도 지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하는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존재이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에 매료된 윌은
자신을 경계하는 아녜스에게 그리스 신화인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들려주며 다가간다.
그 둘은 사랑에 빠졌고, 정을 나눈 뒤 결혼한다.
첫째 딸 수재나가 태어나고 이어 둘째를 임신했다.
아들이 태어났지만 끝나지 않은 산통을 겪던 아녜스는 숨을 쉬지않는 셋째를 낳게 된다.
숨을 쉬지않는 셋째를 붙들고 자신의 숨을 불어넣으며 너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순간 셋째는 기적적으로 세상에서 첫 숨을 몰아쉬게 된다.
그렇게 윌과 아녜스는 세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윌은 라틴어 교사도, 가업을 잇는 장갑장인도 되지 못한다.
그에게는 꿈이 있다. 희곡을 쓰고 연극을 올리는 것.
그 대업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런던으로 향한다.
떠나기 전 자신과 닮은 아들이자 연극 배우가 꿈이라는 햄넷에게 칼싸움을 하는 연기를 하다가 말한다.
내가 없을때는 네가 가족을 지켜야 한다고.
영국 전역에 전염병이 돌고, 그 병마는 삼남매 중 병약하게 태어난 주디스에게 드리워진다.
햄넷은 병상에 누운 주디스의 옆에 누워 어릴때 했던 장난처럼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리고 속삭인다.
이렇게 있으면 죽음은 너랑 나를 헷갈려할테니, 나를 데려갈거라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되뇌면서 내 삶을 주디스에게 주겠다고 기도한다.
그리고 정말로 주디스는 병에서 낫고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킨 햄넷은 고통속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죽음과 삶이라는 빛과 그림자처럼,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함께 태어난 쌍둥이는 결국 서로를 엇갈려 지나간다.
이 모든 슬픔의 과정을 아녜스는 혼자 감당해야 했다.
햄넷이 죽고 나서야 런던에서 돌아온 윌은 아내를 위로하지만, 자식을 떠나보내는 순간에 함께있지 못했다는 사실이 윌에 대한 분노로 표출되었다.
그렇지만 윌은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야했다. 그의 작업은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녜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남편을 원망한다.
고향에 있던 아녜스는 남동생의 손에 이끌려 윌의 연극을 보러 간다.
‘햄릿’이라는 제목을 보고 아녜스는 분노한다.
그러나 연극무대에 죽은 왕의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난 남편 윌과
자신의 아들과 닮은 햄릿역의 배우를 보고 점점 연극에 몰입하게 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 역의 배우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있는 그 대사를 말하고 죽음을 연기한다.
이때 고통을 연기하는 배우에게 아녜스는 마치 자신의 아들에게 그랬던것처럼 눈물로 손을 내민다.
그 순간 그 연극을 보고있던 모든 관객들이 아녜스처럼 햄릿에게 손을 내민다.
마치 자신의 죽은 아들을 붙잡는듯한 아녜스의 손짓에 햄릿역의 배우는 당황하지만
자신에게 위로와 응원을 보내는 손을 내미는 관객들을 바라보며 엔딩씬 연기를 마친다.
자신의 대업을 이룬 윌은 비로소 무대 뒤에서
아들을 잃은 상실감과 아들에게 보낸 헌사와 같은 이별의 마무리 끝에, 미처 흘리지 못했던 눈물을 쏟으며 흐느낀다.
그리고 연극 배우가 꿈이라했던 햄넷이 무대 위에 환영처럼 등장하고 아녜스와 눈을 마주친후 서로 미소를 주고받으며 진정한 이별을 하게 된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는 햄넷의 죽음에서도 비슷한 느낌으로 등장한다.
햄넷이 죽은 순간 어느 연극 무대와 같은 곳, 검은 장막이 드리워진 곳에서 햄넷이 헤매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 검은 구멍은 아녜스와 윌이 함께 시간을 보냈던 숲의 나무 밑에도 등장한다.
이 구멍을 바라보던 윌의 얼굴은 어두워진다. 이 장면은 영화 후반부의 연극 무대 뒤로 가는 검은 공간과 이어진다.
깊이를 알수없는 검은 블랙홀과 같은 공간은 죽음 혹은 운명 너머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이 검은 장막 앞에서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웃는 햄넷의 얼굴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에 등장한, 절대 뒤를 돌아보지말라는 금기를 역전한 장면으로 보인다.
떠남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일지라도, 받아들이는 순간 완성된다.
이를 받아들이고 남은 사람과 떠나는 사람의 고결한 작별을 말하는 듯 했다.
또한 관객들이 모두 손을 내미는 경이로운 장면은 마치 그물과도 같았다.
상실이라는 심연에 빠진 인간에게 서로를 붙들고 담아주는 그물처럼, 위안을 건네는 듯했다.
인간은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의 손을 들어주기도 하지만, 잔인하게 모든걸 앗아가기도 하는 운명이라는 굴레 안에서 살아간다.
이 영화의 키워드는 바로 이것이다.
운명의 수레바퀴 위의 상실과 고통 속에서 진정한 이별이란 슬픔뿐이 아님을,
영원히 살아가게 하는 ‘예술’이라는 방법을 말한다.
예술로 치유하고 슬픔을 승화하는 방법을, 고통에서 구원하는 방법을 통해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을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햄넷은 마치 해저의 지각이 갈라진 틈에서 발생한 지진이 쿵-하고 바다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듯한 힘을 가진 영화이다.
요란하지 않고 묵직하게 서사를 진행하며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정적이지만 내면에 거대한 파동을 남긴다.
우리가 알고있는 세계적인 작가의 전기를 영웅담으로 담아내지도 않았다.
셰익스피어가 썼던 한편의 문학처럼 연극 피날레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작품이다.
햄넷은 상실을 영원으로 바꾸는 이야기이다.
죽은 햄넷은 햄릿이 되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남아 지금까지도 영원히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