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코사무이
요즘 나는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이다. 기리와 헤어진 지 5개월, 격렬했던 감정 기복은 수그러든 지 좀 되었고 나름대로 기운을 차려보겠다고 여기저기 기웃대지만 얼마 못 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체념하기를 반복하며 은은하게 불행한 상태로 하루하루 산다. 일회성 만남 이상의 무언가로 발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능성을 점쳐본 상대는 몇 명 있었으나, 이 나이까지 각자 살아온 사람들이 만났을 때 응당 생길 수밖에 없는 잘 안 맞는 부분과 맞닥뜨렸을 때, 별로 애쓰고 싶지가 않았다. 12년 동안 보폭을 맞추며 가꾼 관계도 하루아침에 끝나버릴 수 있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그 과정을 되풀이할 비위 내지는 용기가 도저히 없었다.
그 와중에 방콕에서 보낼 일주일은 요즘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긍정적인 이벤트랄까. 잠시라도 발붙일 곳은 여전히 필요했기에. 다다음 달이면 방콕 가니까,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고 지내던 게 다음 달이 되고 다음 주가 되고 다음 날이 되어 방콕으로 떠날 땐 아직 다녀오지도 않았는데 헛헛할 정도였다.
왜 하필 방콕이었냐면, 누군가 게이가 놀기엔 방콕이 좋다고 언급했을 때 솔깃했고, 내가 좋아하는 김병운 작가의 ≪아무튼, 방콕≫ 때문에 안 그래도 관심이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8월 15일에 머물 곳이 필요했는데 방콕 정도가 딱 적당했다. 5성급 호텔에 하루 종일 안에만 처박혀 있어도 괜찮은 수준의 방이면서 여차하면 룸서비스 같은 사치를 부려도 감당 가능한 곳. 기억에 힘들 때 익명의 형태로 나를 지켜줄 곳.
토요일에 도착해서 그다음 주 금요일에 떠나는 일정인데 주말 게이 클럽은 한 번 가주는 게 사회 규범인 것 같아서, 첫날부터 아는 형과 DJ Station에 갔다. 최근에 인스타로 DM을 주고받았던 로컬 게이도 합류했다.
한국에서 못 누리고 살다가 방콕에 와서 해방감을 느끼는 게이들이 많다고 하는데, 나는 한국에서도 가릴 것 없이 노는 터라(잘 논다는 게 아니라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건 별로 없었고, 다만 좋은 시간을 보내고 말겠다는 퀴어들의 집합적인 결의 같은 것이 느껴져서 흐뭇하긴 했다. 이날도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이 드문드문하다. 방콕 가면 모르는 사람이 주는 술 함부로 마시지 말라는 주의가 무색하게 아무도 술을 권하지 않았고, 내 돈 주고 산 술을 내가 마시는데 주변에서 적당히 마시라고 말리기만 했다.
DJ Station 영업이 끝나고 새벽 3시쯤 GOD라는 클럽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여기는 또 남자들이 다 웃통을 벗고 있어서 나도 호기롭게 옷을 벗은 다음... 구석에 가서 잤다. 1시간은 넘게 잔 것 같다. 아는 형은 날 버리고 갔지만 로컬 게이가 옆을 지켜주었고, GOD마저 영업이 끝났을 때는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
진정 감동한 건 클럽이 아니라 마사지였다. 한국에서도 꽤 자주 마사지를 받는데 방콕의 그것은 가히 차원이 달랐다. 이름난 곳은 이름값을 했고 시간을 때우러 간 곳도 다 수준급이어서, 과연 원조는 이길 수가 없구나, 그런데 가격은 한국의 절반이니 이게 복지네, 감탄하며 1일 1마사지를 실현하였다.
제1회 거스상 올해의 마사지 부문 수상자는 실롬에 있는 The Prime Massage. 아로마도 훌륭했으나 나는 좀 꺾고 비틀어줘야 살아있다고 느끼는 편인지 타이 마사지 쪽이 훨씬 만족도가 높았다. 외관은 약간 허름하지만 청결하지 않은 건 아니고, 직원들은 날쌔게 움직이며 딱 할 말만 했다. 감정노동 없이 기계적인 게 오히려 취향에 맞았고, 덕분에 신체가 재조립되는 과정을 죄책감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코사무이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이 섬에서 <화이트 로터스> 시즌3를 찍었기 때문이다. '화이트 로터스'라는 가상의 호텔 체인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데 누가 죽였는지는 물론 누가 죽었는지도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는, 시즌마다 나라가 바뀌고 주인공도 (대부분) 바뀌는 앤솔로지 드라마다. 시즌1과 시즌2를 워낙 좋아하는데 마침 새 시즌을 태국에서 찍었다고 하니, 방콕에 가는 김에 잠깐 코사무이에도 들러서 드라마 촬영 장소에서 하루 묵고 오면 완벽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을 접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8월의 포시즌스 코사무이를 검색해보니 오 마이 갓 (무교임) 1박에 250만 원을 달라는 것이다. 이건 내가 누릴 수 있는 사치가 아니다, 백인들만 나오는 이유가 있었네, 납득 완료하고 없던 일로 했다. 어차피 가봤자 살인을 당할 수도 있고...
그런데 꼭 포시즌스가 아니어도 코사무이는 경험할 수 있는 거잖아? 이 생각이 왜 떠나기 5일 전에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적당한 가격의 괜찮은 숙소도 공실이 많이 남아있어서, 포시즌스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지만 가격은 10분의 1도 안 되는 리조트를 예약했다.
Mai Samui Beach Resort & Spa는 객실의 테라스와 연결된 커다란 풀이 리조트 한가운데에 있고, 풀을 가로지르면(수영을 못해서 힘들게 물속을 걸었는데 알고 보니 뒤편에 통로가 있었다.) 풀 안에서 술을 마실 수 있는 바가 있고, 바를 지나쳐 Laem Yai Beach 모래사장에 발을 디디면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하나로 이어진 것 같은 푸른 하늘과 바다, 선선한 바람에 기분 좋게 흔들리는 야자나무 소리를 감상하며 선베드에 누워 있으니, 모처럼 생각을 비울 수가 있어서, 실로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느껴본 것 같다. 이게 얼마나 귀한 건지 알기 때문에 만끽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고, 그날 밤에는 모처럼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2024년 8월 14일 수요일 날씨 맑음
코사무이에서 방콕으로 돌아가는 국내선 PG104편, 내 옆자리 프랑스 여자와 그 앞자리 이탈리아 여자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이탈리아 여자가 좌석을 뒤로 끝까지 젖혔는데 프랑스 여자가 등받이를 발로 차버렸고 이탈리아 여자가 따지고 들었고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번지며 이탈리아 대가족이 합세하였고... 탑승할 때 보고 잘생겼다고 좋아했던 남자 승무원이 말려 보았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승무원 외모 보고 뽑는 관행을 뿌리 뽑읍시다) 이들의 싸움은 기내식을 나눠주자 그제야 일단락됐다. 나는 기가 빨려서 안 먹기로 했으나 이 유럽인들은 기내식을 잘도 먹었다.
실롬 호텔로 돌아와(취소가 안 되는 걸 예약하는 바람에 코사무이에 다녀오는 동안 1박을 그대로 날렸다.) 체크아웃하기 전 호텔 사우나에 들렀는데 라커 번호가 14번이었다. 게이들이 많이 찾기로 유명한 호텔답게 크루징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어쩐지 얼굴이 익숙한 미얀마 남자가 고추를 빨아줬다.
마지막 숙소인 Millennium Hilton Bangkok에 체크인을 했다. 객실 번호 1224.
방콕에 머무는 동안 영화를 한 편 보기로 했는데 마침 한국에서 개봉을 안 한 <롱레그스>가 상영 중이어서 수쿰빗에 있는 Quartier CineArt에 갔다. 얼핏 봐도 보통 영화가 아닌데 어째서인지 키즈관에서 틀고 있었고, 상영관 안에는 미끄럼틀이 있었다.
<롱레그스> 줄거리. 아버지가 일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하는 사건이 십수 년에 걸쳐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현장에는 암호문이 Longlegs라는 서명과 함께 남아있을 뿐 외부인의 침입 흔적은 없다. 이 가족들의 공통점은 모두 14일에 태어난 아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인 줄 알고 일부러 14일에 본 게 아닌데...
극장을 나와 그랩을 호출했는데 오늘따라 차가 안 잡혔다. 공항 - 실롬 - 아리 - 실롬 - 수쿰빗 - 실롬 - 공항 - (코사무이) - 공항 - 실롬 - 크롱 - 수쿰빗이라는 레전드급으로 비효율적인 동선을 소화하는 동안 나를 책임졌던 그랩에게 배신을 당하다니... 아무리 기다려도 안 잡혀서 오토바이로 설정을 바꿔봤더니 몇 초 만에 바로 잡혔다. 택시 안에서 볼 때마다 저래도 되나 싶긴 했는데, 설마 죽기야 하겠나.
응 죽을 듯. 그 비좁고 막히는 도로를 어떻게 이렇게까지 달릴 수 있는지 대단하면서도 역주행까지 하는 순간에는 그래도 헬멧도 안 쓴 사람을 태우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위험해도 되는 건가 싶고... 체감상 거의 100kph로 달리는 거 같은데 나를 지탱하는 건 오토바이 뒤꽁무니를 꼭 쥐고 있는 내 두 손뿐이어서, 이 손을 놓아버리면 진짜 쉽게 죽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하지만 놓지 않았고, 죽지도 않았고, 목적지에 도착하여 시간을 확인해보니 11시 44분이었다.
참고로 나의 생일은 1월 4일이다.
오늘의 뇌절 끝.
8월 15일, 그러니까 전애인의 생일이자 그동안 열두 번을 함께 기념했으나 이제는 혼자 보내게 된 '기리절' 아침은 방콕의 다른 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찍 일어나 호텔 조식을 먹었고, 쇼핑몰에 가 회사 사람들 줄 선물을 샀고, 김병운 작가가 극찬했던 Doctor Feet에 가 위와 소장이 안 좋다는 진단을 받았고, 드럭스토어에 가 한국에서 못 본 물건들을 주워 담았다. 그럴수록, 우울감에 취하지 않으려고 의식할수록, 내 안의 무언가가 꺼져가는 걸 느꼈다.
암 이럴 줄 알고 있었지, 마지막에 제일 비싼 호텔을 예약하길 잘했지, 역시 나는 나를 잘 알아, 자찬하며 가장 안온하기 때문에 가장 자유롭게 불행할 수 있는 공간인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점심은 룸서비스로 먹으면 그만이니까. 술은 미니바에도 있으니까.
술기운을 빌려 기리에게 생일 축하 카톡을 보냈다. 그 사람은 그 사람답게 나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견딜 수가 없어서, 여전히 다정한 그 사람을 보는 게 너무 힘들어서, 갑자기 만근이 된 몸을 이끌고 침대에 기어올랐다.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약을 먹었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이미 16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한다. 맞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다지 위로는 되지 않는데, 첫째는 어차피 그 시간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그 사람을 떠올렸을 때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무뎌진다고 생각하면 그건 그것대로 슬프기 때문이다. 우리를 묶는 건 사회 제도도 공동 재산도 아닌 그저 서로를 염려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다는 증거가 먼 기억 속 데이터로 존재하는 것보다는 이따금 우는 지금이 덜 공허할 것 같으니까.
자다 깨다 반복하다 새벽 4시 정도였나, 더는 못 자겠다 싶었을 때 일어나 이 글을 적기 시작했다. 이 글은 안 쓰면 괴로워서 쓰는 글이다. 외로워서 관심을 받으려고 쓰는 글이다. 혹여 그 사람이 읽게 된다면 내가 아직도 힘들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면서 쓰는, 치사한 글이다.
다 소용없을 테고, 그렇게 된들 기분이 나아지지도 않겠지만, 적어도 브런치가 글 좀 쓰라고 알림을 울릴 때마다 느꼈던 비합리적인 죄책감은 조금 덜겠지. 돈 주고 타국까지 와 있는 대로 청승을 떨고 돌아가면서, 그 와중에 글감 하나는 벌었다는 생각을 하고야 마는 것이다.
1. 지난 여행기에서 니콜 키드먼이 홍콩에서 찍은 드라마를 언급했는데, 니콜 키드먼은 방콕에서도 작품을 한 적이 있다. 1989년에 나온 <방콕 힐튼>이라는 드라마로, 생면부지의 아버지를 찾으러 방콕에 갔다가 마약상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서 탈옥하는 호주인을 연기했다. 작품은 낡았지만 니콜 키드먼이 신인 시절부터 (그러니까 할리우드가 이상한 역할만 주면서 연기 못한다고 낙인찍기 전에도) 연기를 잘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나저나 니콜 키드먼은 <베트남>이라는 드라마도 찍었는데...
2. 이하 방콕 및 코사무이에서 찍은 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