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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통 Mar 30. 2016

서러운 여름

에어컨 없는 여름


에어컨 없이 지내는 여름은 서럽다는 한마디로 정리된다.


작년 여름이었다.

오죽하면 출근길이 두근두근 설렜을까. 밤새 더위에 허덕이고 모기랑 씨름하면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아침이 되면, 에어컨이 있는 회사로 출근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하지만 회사를 안 가는 날이기라도 하면 맥이 쭉 빠지면서 오늘은 어디로 피서를 가나 고민부터 앞섰다. 이상한 것은, 그 전 여름도 이렇게 서러웠냐는 거다. 짜증이 나고 힘들어도 서러울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회사에 가지 않는 날이면 짐을 챙겨서 도서관에 가거나 동네 카페나 스타벅스에 간다.

도통 집에서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선풍기는 애처롭게 웅웅 울기만 할 뿐 뿜는 바람은 영 시원찮다.

스타벅스에 가는 날은 긴소매 카디건을 꼭 챙긴다. 나는 피서로 스타벅스에 가기 때문에 몇 시간은 뽕을 뽑는데, 1시간 정도 있으면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추워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도 한두 번이지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다. 하지만, 긴팔 카디건을 가방에 챙겨 넣을 때면 지난밤의 나에게 무척 미안해진다.


작년 봄부터 우리 동네에는 유난히 공사가 많았다. 드르륵드르륵, 동시에 세 집이 공사를 했다. 그 세 집이 모두 경리단 인기를 타고 새로 생기는 카페나 음식점이었다. 생각해보니 네다섯 곳 된다. 이렇게 주택가에 동시에 공사를 해도 되는 건지 깜짝 놀랐는데, 오전 8시도 되지 않은 토요일에도 공사를 해서 더 깜짝 놀랐다. 여름이 되고 공사를 마친 가게들이 하나 둘 씩 문을 열었다. 문제는, 그 가게들이 힘차게 가동하는 에어컨 덕분에 가게 외부에서는 뜨거운 바람이 훅훅 뿜어져 나오고, 안 그래도 뜨거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야말로 지옥의 길, '헬로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경리단 길은 많이 변했다. 변해도 정말 너무 변했다. 

개성 있고 정감 넘치는 적절한 가격대의 카페는 하나둘씩 사리지고, 으레 인기 있는 곳에 생기는 프랜차이즈나 힙스터 감각으로 무장하되 돈은 몇 천 원씩 더 받는,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 가게들이 점점 많이 빨리 생겨났다. 무슨 부동산에서 영혼을 바라냐고 따지자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혼자 선풍기 없이 사는 사람에겐 지푸라기, 아니 부동산 한 평 에서도 영혼을 찾고 싶은 법이다. 

 참치 볶음밥, 돌솥비빔밥에 마음을 담아주던 밥 집도, 초콜릿 타르트가 엄청 맛있는 민트색 카페도, 일 인분 꼬꼬뱅을 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내주던 씩씩한 카페도, 시원 깔끔한 팥빙수 집도 다 없어졌다. 트렌드를 알아채지 않으면, 남들 하는 거 다 하지 않으면 나도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닐까 서글펐다. 그렇게 무섭게 변하는 작년 여름의 경리단 길은 무서웠다.


 아마 이번 여름도 나는 에어컨이 있는 곳으로 피서 가기 바쁠 것이다. 그리고 집을 나서면서 가을 옷을 챙겨 가방에 쑤셔 넣겠지. 한 여름이면서 가을 옷을 입고, 바들바들 버티고 있겠지.


 여름을 견디는 일은, 내가 얼마나 작고 연약한 존재인지 실감하는 서러운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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