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회사 입사동기 커플이다. 우리의 첫 직장은 직원 2천여 명 규모의 제법 큰 회사였다. 그 해 회사는 유래 없이 많은 직원을 뽑았고, 우리는 백여 명가량의 입사동기 중 하나였다. 사회초년생인 우리는 입사하자마자 각 팀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한 달여간의 입사 교육을 받아야 했다. 며칠 동안 강당에서 졸음이 쏟아지는 입사 교육을 듣고 또 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모두 경기도 어딘가의 연수원에 들어갔다. 우리는 눈이 쏟아지는 어느 산골 연수원에 갇혀 매일을 함께 보냈다. 사실 주말엔 나갈 수도 있었는데, 눈 때문에 그게 쉽지 않았다. 내가 입사한 2010년은 유달리 눈이 많이 온 해였기 때문이다. 100년 만의 폭설이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2010년. 버스기사님도 운전을 기피하고, 택시는 더더욱 오지 않았다. 우리는 누구 하나 나가지 못하고 연수원에서 꼬박 2주를 보냈다.
남편과 나는 이 입사 교육에서 “반장”과 “부반장”이었다. 백여 명이 한 번에 교육을 받긴 어려워서, 우리는 3개 반으로 나뉘었다. 남편과 나는 2반이었는데, 과정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각각 반장과 부반장이 되었다. 이때 남편에 대한 기억은 사실 별로 없다. 몇 안 되는 에피소드밖에 남지 않았다. 그중 하나는 아이라인 사건이다. 나는 대부분 아침에 힘겹게 일어나서 쌩얼로 밥을 먹으러 갔는데, 이런 나를 보고 남편이 “아이라인 안 그렸네~”라고 했다. 나는 그때 생각 없이 “네!”라고 대답했는데, 나중에 주변에 있던 언니들이 숙소로 돌아와서 엄청나게 남편 욕을 했다. (사실 나는 그제야 남의 외모를 보고 뭐라고 한, 그리고 화장에 대해 왈가왈부한 남편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시작으로, 남편은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사건들의 주인공이었다. 훗날 모든 것을 잘 기억하는 기억력 대장인 절친 J에게서 들었는데, 나는 연수원에서 돌아와서 엄청 남편 흉을 보았다고 한다. 그 오빠는 정말 별로라면서.
첫인상이 무색하게 입사한 지 3달 만에 나는 남편과 사귀게 되었다. 나중에 보니 우리 말고도 동기 커플이 여럿 있었는데, 우리가 제일 먼저 사귄 1호 커플이 되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사실 초반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남편은 나와 쿵짝이 잘 맞는 사람이었고, 홀린 듯이 몇 번을 만난 끝에 남편과 사귀게 되었다. 절친 J는 혀를 끌끌 찼다. 야, 너 반장 오빠 별로라며. 근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어. 지금 다시 생각해도 정말 잘 모르겠다. 어쩌다가 오빠랑 사귀게 된 거지?
이유야 어찌 되었건 남편과 나는 정말 잘 맞았다. 일단은 들은 건 있어서, 우린 조심스럽게 사내 비밀연애부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를 감추느라 가명마저 가지고 있었다. 내 가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남편의 가명은 ‘서인준’이었다. 그럴싸하면서 남편의 본명이 떠오르지 않을 그런 가명. 24살의 나와 28살인 남편은 이 비밀연애의 모든 부분이 재미있었다. 사회 초년생도 재미있었고, 사회인이 되어서 하는 연애는 더 재미있었다. 재미있는 연애를 지원해줄 월급이 매달 통장에 들어왔다. 남편은 엄마 차를 자기 차인양 주말마다 차를 끌고 나와 데이트를 했다.
우리는 서로의 생활을 존중하면서도 뜨겁게 연애했다. 서로의 구글 캘린더를 구독했고, 각자의 약속은 자유로웠다. 둘 다 약속이 없는 날엔 어김없이 데이트를 했다. 평일엔 퇴근길에 지하철 안에서 서로 모른척하며 서있다가, 회사에서 멀어지면 데이트를 했다. 통금이 있던 나는 10시면 남편과 헤어졌다. 남편은 금요일이나 주말이 되면 나와 데이트 후 친구들에게로 갔다. 남편은 11시 무렵부터 친구들 무리에 합류해서 피씨방에서, 혹은 당구장에서 모여 밤새 놀았다. 나는 남편이 몇 시에 무엇을 하며 놀건 상관하지 않았다. 어쩌면 남편이 술을 싫어해서, 언제든 맨 정신에 나에게 연락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더더욱이나 나는 남편이 나 때문에 친구들과 멀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밤새 놀아도 구속하지 않고 자신을 믿어주는 나에게 고마워했다. 우린 서로의 원래 살아오던 방식을 인정할 줄 아는 성숙한 연애를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상대방이 걱정하지 않도록 배려할 줄 알았다. 우리의 연애는 달콤할 뿐만 아니라, 안정적이었다.
1000일 기념일이자, 크리스마스이브였던 날. 근사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눈이 내리는 한강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남편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 프러포즈를 했다. 내가 좋아하는 임즈 부부의 의자를 기억해내곤, 그 의자의 미니어처 세트를 선물했다. 남편은 뒷좌석에서 기타를 꺼내, 시인과 촌장의 “좋은 나라”를 불렀다. 이 노래는 내가 사랑하는 박정현이 콘서트에서 항상 앵콜곡으로 불러주는 노래다. 언젠가 내가 이 노래의 가사가 너무 좋다고, 특히 박정현이 부른 버전은 너무 사랑한다고 지나가듯 얘기했었다. 남편은 이걸 잊지 않고, 집에서 며칠간 이 노래를 연습했다. 문구가 쓰여 있는 예쁜 카드를 선물했지만, 달콤한 사랑의 말은 쓰여있지 않았다. 대신, 남편은 메일로 나에게 “행복한 결혼 생활 100년 개발 계획의 7가지 실천 약속”이라는 약속을 써서 보냈다. 원래도 결혼 생각은 없었던 나는, 프러포즈를 받아도 단번에 승낙할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의 프러포즈는 내 생각을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나는 고민할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프러포즈를 받은 후, 바로 결혼을 한 것도 아니었다. 프러포즈를 받던 그 해 나는 26살이었고, 부모님은 아직 내가 결혼하기엔 어리다고 여겼다. 남편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겠다 했지만, 엄마는 단칼에 거절했다. 사실 그냥 결혼이랑 상관없이 한번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엄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엄마는 나의 ‘남자 친구’는 누구든 만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다가 헤어지면 어떻게 하냐는 게 이유였다. 훗날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고 하면, 마음속에 절로 구남친과 비교가 될 것 같다고 했다. 결국 1년 하고도 조금 시간이 지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리는 일단 마음에 드는 식장부터 예약했다. 식장을 예약하고 나서야 남편은 우리 집에 인사를 올 수 있었다.
우리의 결혼은 남들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평범한 결혼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투닥거리고, 남들은 잘 하지 않는 특이한 절차도 거쳤다. (우리 부모님은 커다란 시루떡을 준비해서 사주단자를 받고, 사주단자 앞에서 절을 했다. 뿐만 아니라 택일단자를 써서 남편네 부모님께 보냈다.) 이게 뭔가 싶다가도, 어쩔 때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하는 놀이 같기도 했다. 남편은 매일같이 적절한 tv의 크기를 고민하는 평범한 예비남편이었고, 나는 삼겹살집에서도 샐러드만 먹는 독한 다이어터 예비신부였다. 남편은 매일같이 완벽한 위치의 아파트가 어디인지 고민했고, 나는 어떻게 하면 완벽한 물건을 사서 집에 채워 넣을지를 고민했다. 이럴 때 우린 영락없는 평범한 예비부부였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다른 예비부부였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지만, 우리는 결혼식장에서 우리가 직접 축무를 췄다. 노래는 결혼과는 도무지 상관이 없는 오렌지카라멜의 ‘까탈레나’였다. (그건 축무라기보다는... 재롱잔치에 가까웠다.) 엄마가 쓰고 아빠가 읽은 편지는 내 친구를 여럿 울렸다. 신혼여행지도 남달랐다. 꽃보다 청춘이 가기 전, 아무도 아이슬란드 여행을 가지 않던 때, 우리는 아이슬란드로 신혼여행을 갔다. 신혼여행지에서 우린 사람보다 야생동물을 더 많이 만난 사람들이 되었다.
결혼 후의 삶 역시 남들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결혼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았다. 새 집에 익숙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친정집이 어색해졌고, 부모님 앞에서도 신혼집을 ‘우리 집’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밥 먹고, 여가시간을 즐기는 똑같은 삶인데도 소꿉장난처럼 재미있었다. 물론, 모든 날이 재미있었던 건 아니다. 우리는 신혼 초 연애 때는 생각하지 못한 일로 다퉜다. 종종 집안일로 다투고, 명절이 되면 집안문제로 다퉜다. 나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해서, 룸메이트와 어느 정도 양보하며 사는 삶에 익숙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과의 삶에서는 어떤 부분에선 조금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평범한 신혼부부의 삶의 표본처럼, 우리는 서로 좋아하면서도 투닥거리면서 살았다.
남들과 다른 지점이 있다면, 우린 연애 때 몇몇 룰을 결혼하면서도 유지했다는 점이다. 우린 각자의 삶을 존중했다. 우린 여전히 서로의 구글 캘린더를 공유하며 상대방의 일정을 살폈다. 애초에 연락을 잘 신경 쓰지 않는 나는,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구글 캘린더를 보고 일정을 확인했다. 걸핏하면 여행을 떠나고 싶은 나는, 결혼하고도 자주 여행을 떠났다. 반면, 남편은 나처럼 자주 여행을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여행을 가고 싶으면 제일 먼저 남편에게 같이 갈지 물어보고, 남편이 싫다고 하면 혼자 가거나 친구를 찾아 함께 떠났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재정적으로도 각자를 존중했다. 우리는 서로의 연봉을 묻지 않았고, 지출내역 또한 묻지 않았다. 자기가 번 돈은 각자 자기가 관리했다. 부모님 용돈은 각자가 드리고 싶은 대로 자신의 통장에서 보내드렸다. 우리는 연애하던 때처럼 종종 정산의 날을 가졌다. 카드내역서를 뽑아서, 하나하나 체크하며 공공의 지출을 찾았다. 다 찾고 나면 1/2를 상대방에게 청구했다. 그럼 차액만큼을 지불하면 됐다.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한 이런 부분들은, 알고 보니 평범하지 않은 부분들이었다. 내가 이런 얘기를 회사 동료들에게 하면, 누구 하나 특이하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아이를 낳을지 말지, 고민으로 시작한 글타래이면서 지루하게 연애와 결혼 이야기만 한 것 같다.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는 이거다. 이 과정 중에, 우린 아이 문제를 한 번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제대로 다룬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 살면서 아이 얘기를 듣지 않은 부부는 찾기 힘들 것이다. 우리 또한 그랬다. 결혼하고 나니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자녀계획에 대한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결혼도 생각이 없던 내가 결혼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질문한다 한들 대답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각자가 노련한 사회생활 스킬로 질문을 요리조리 피해 갔다. 가끔 서로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언젠가는 각자 심리상담을 받기도 했다. 고민해보지 않았다고 하기엔 너무 많이 고민했고, 고민했다고 하기엔 각자 생각만 했다. 둘 사이의 협의는 사실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었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일단은 질문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렸으니까. 우린 우리가 충분히 어리다고 생각했다. 아직 시간은 많이 있어. 각자의 삶이 바쁘니까, 일단 각자의 삶을 살자.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6번째 결혼기념일이 지나고, 7년 차에 접어든 어느 날, 그 일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