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
이야기의 힘은 대단하다. 어제는 휴무였고, 스티븐 킹의 아웃사이더를 200p 넘게 읽었다. 퇴근 후 쓰는 글이 조금씩 쌓인다. 글의 개수가 곧 나의 일당이다. 휴무날도 글을 쓴다면 약간 차이가 날 수는 있겠지만...
어디서 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도 많은 텍스트와 정보에 노출되는 요즘이니까, 언제 뇌 속에 자리 잡았는지도 모를 기억들이 문득문득 머릿속에서 팝업 된다. 글쓰기도 근육 운동 같다는 류의 문구. 매일 조금씩 꾸준히 해야 한다는. 뭐 틀린 얘기는 아니겠으나, 나는 이 블로그에서만 거의 10년 가까이 근육 운동을 한 셈인데, 내 근육들은 다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다.
아, 4시에 일어나는 건 역시 힘들다. 5시 정도면야 이거보단 조금 가뿐하겠지만, 4시는 새벽보다는 밤에 가깝다. 기합과 함께 이불을 박차고, 부엌 개수대로 가서 찬물 세수부터 한다. 입안을 찬물로 헹구는 것도 잊지 않고. 그럼 잠이 거의 완전히 달아난다. 입에서는 약간의 비명이 나오긴 하지만. 옥수수차를 데우고, 양말을 챙겨 신고, 사과 1/4조각, 바나나 반조각. 아직 기온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나는 틈새 노리기를 좋아한다. 가득 찬 쓰레기봉투를 가는 길에 버리려고 차에 싣는다. 오늘도 바흐. 클린 하우스의 문이 굳건하게 닫혀있다...
명월리로 진입하는 오르막에서 차선 하나를 차 후미로 가로막고, 중앙선과 수직으로 차를 대고 있는 트럭을 매일 피해 다녔는데, 오늘은 내가 늦었는지 그 트럭이 일렀는지, 트럭이 움직이고 있었다. 트럭의 냉동창고 뒷문에 삼다한라 우유라는 문구가 보였다. 우유차는 여전히 일찍 움직이는구나. 6학년 여름 방학 때, 신문 배달 알바를 해보려고 고민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우유와 신문은 새벽 배송이었다.
오늘 신택형은 오프. 단톡방이 만들어졌고, 나는 이제 동료들의 이름을 다 안다. 오늘부터 새 기계를 쓰기로 했는데, 기름이 채워져 있지 않아, 원래 쓰던 기계를 추레라에 싣고 그린으로 출발했다. 더 이상 지도를 보지 않아도, 어둠 속에서 길을 잘 찾아간다. 그린 위에는 이슬이 많지 않았지만, 그린 위 길도 이제는 잘 찾는다. 그래도 이슬이 많을 때보다 작업속도는 느리다. 2개 그린을 마무리했는데 벌써 날이 밝아온다. 춘분이 지나고, 본격적으로 낮이 길어지고 있다.
9번 그린의 1/5을 또 원근형이 도와준다. 일을 마무리하고, 주차장에 도착하니 성혁형(팀장)이 부른다. 카트 조수석에 타고, 연습 그린에 가서 새 기계를 직접 시험 운행해 본다. 처음에는 서툴다가 몇 번 왔다 갔다 잔디를 깎아보니 새 기계의 좀 더 편한 부분들이 느껴진다. 잔디를 깎는 느낌이 좀 더 부드럽고, 턴이 잘 된다. 여러 분야에서 기술은 점점 발달하고 있나 보다.
바가지에 쌓이는 잔디와 흙 부속물들을 예지물이라고 한다. 어디서 나온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고 앞으로 잔디는 더 잘 자라고, 바가지에 쌓이는 부속물들이 많아질 것이다. 오늘도 어제보다 바가지에 쌓이는 예지물이 많았다. 그걸 카트 뒤 짐칸에 수북이 쌓아 일이 다 끝나고, 공터에 내다 버린다. 한 명이 쉬고, 새 기계도 시험하고, 이슬도 적어서 작업 속도가 늦었는지 오늘은 일이 8시 반이 넘어서 끝났다. 이런 날도 있다.
밥은 변함없이 맛있다. 깍두기, 파프리카 고추 된장 무침, 콘참치 샐러드, 인스턴트 떡갈비, 콩나물 돼지 김치찌개. 아침을 매일 먹을 수 있다는 게 나에겐 큰 이점이다. 식판을 가져다 놓으면서 주방에 계신 분들께 잘 먹었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TV에서 무슨 장관이 통신 요금제를 발표하고 있다. 하나도 싸 보이지 않는.
골프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성혁형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바로 전화기를 꺼내 어딘가 전화를 한다. 아침 9시인데... 하긴 이른 시간이 아니다.
"아 형님, 귀농한 친구가 있는데.. " 이어지는 제주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 형들에게 육지에서 온 사람들은 귀농한 사람들과 같은 말인가? 그럼 나도 귀농한 게 되는데, 농사를 지어본 적 없는 귀농인.
성혁(팀장) : "그래 8년 동안 무슨 일 해봤니?"
나 : "소방서에서 일해봤고, 목수일, 카페에서 알바, 겨울엔 귤밭에서..."
성혁 : "귤밭은 어디 이 근처?"
나 : "네"
성혁 : "저 서귀포 큰 창고 가서 두 달 내내 옮겨야 돈 좀 벌지."
나 : "^^"
성혁 : "금능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나?"
한석 : "금능 좋잖아."
성혁 : "에이 냄새 안 나나?"
나 : "네, 금능은 냄새가 많이 안 납니다."
제주 곳곳에는 보이지 않게 축사가 엄청나게 많다. 정말 엄청나게 많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우리 집 마당에서도 가끔 냄새가 난다. 명월, 금악, 상명은 아마 수시로 날 것 같다. 제주에 가면 흑돼지는 거의 꼭 먹어야 하는 메뉴로 생각하고(아니면 백돼지라도), 안 그래도 많은 고깃집들이 더 새로 생기고 있는 걸 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퇴근길 어느 마을 보도 옆 울타리에 "암 유발 축산 폐기물 절대 금지. 돼지 실은 트럭 마을 진입 금지"같은 현수막이 보였다. 가축똥들이 언제 발암 물질이 되었는지... 돼지는 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