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
왜 쓰는가? 어떻게 이전에 왜를 묻는다. 이유를 묻고 찾는 건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단순히 샤워를 하고, 베개에 눕기 전에 머리를 말릴 시간을 벌려고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나는 드라이기를 쓰지 않는다) 쌓인다는 말을 좋아한다. 그보다 쌓이길 바란다. 축적. 내 안에 무언가가 차곡차곡, 그것이 실체를 갖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니면, 아예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믿는 수밖에 없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잘 믿는 편이다. 음악이 언제 보인 적이 있던가.
꿈을 꾼 것 같다. 기억이 나진 않는다. 어떤 꿈은 현실처럼 생생하게 어떤 꿈은 꿈처럼 사라진다. 새벽 4시. 점점 몸이 적응해 간다. 눈을 뜨는 게 그렇게 어렵지가 않다. 연한 결명자와 바나나 하나를 챙겨 먹고, 지급받은 검은색 작업복 바지를 입는다. 30 사이즈인데 딱 맞는다. 작게 나왔거나 내 배가 나왔거나.
오늘은 정수기 위에 신종 믹스커피가 있다. 맥널티 스테비아 믹스 커피(제로슈가). 포장이 고급스러운 짙은 녹색이다. 그러나 동서식품 믹스 커피가 이미 혀와 뇌를 지배한 상태다.
아침이라서 잠이 덜 깨서 그런지, 꼭 작은 실수 하나씩을 한다. 그리고, 곧 눈치채고 개선한다. 아주 단순한 일들인 것 같은데, 어떤 절차 하나를 빼먹으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시간에 나름 쫓기는 신세이고, 실수를 하게 되면 마무리 시간이 늦어진다. 그럼 좀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하고, 빠르게 움직이다 보면 실수가 다시 는다. 실수의 무한 연결고리.
여섯 시 반쯤 비가 제법 내린다.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잔디깎이기계를 운전한다. 낡은 플라스틱 카트 전면 창에 빗방울이 고인다. 장갑을 벗어 닦아내지만, 깨끗이 닦아지지 않고, 더 뿌예진 느낌이다. 그린 사이사이 곳곳에 벚꽃이 피었다. 안개와 같이 있으면 어딘가 신성한 느낌이 든다. 선녀가 내려올 것 같다. 그럼 카트 옆에 태우고 내가 잔디를 얼마나 잘 깎는지를 보여줄 텐데.
그래도 오늘은 온전히 내 몫을 다했다. 시간이 단축돼서, 연습 그린까지 깎는 걸 도왔다. 마음이 가벼웠다. 몸은 실제로 점점 가벼워지는 것 같다. 1킬로 정도는 살이 빠진 것 같다.
밥은 맛있었고, 메뉴는 생략한다. 뉴스에 떨어지는 대통령 지지율이 나왔다. 자유의 몸이 된 파렴치한 전 대통령 둘의 밝은 얼굴도 같이 보였다. 밥맛이 떨어질 뻔했으나, 그래도 밥은 밥이다.
사실, 뭔가 그럴듯하거나 특별한 적을 게 있는 건 아니다. 우리 생에 정말 기억에 남을 만하고, 특별한 날들이 대체 얼마나 될까. 그런 날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 보면, 며칠 안 되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중요도(?)라든가 소중함의 저울을 가지고 따지면, 역시 모든 날들이 내 기준에서는 평행선 상에 있다. 그 어떤 날도 무게가 더 나가고, 덜 나가지 않는다.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날들이므로. 인간에게 죽기 전까지는 동일한 시간이 주어져 있고, 그걸 어떻게 쓸 건지는 온전히 스스로의 선택에 달렸다. 당연히 신이 있더라도, 선택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선택이 곧, 신이다.
나의 낡고 귀여운 9번 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