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설득 - #10 역생육고열전(역이기)

배짱도 실력이다

by 최종병기
사마천의 <사기열전> 속 인물들을 21세기 비즈니스 정글로 소환합니다. 현대 경영학 이론과 실제 비즈니스 현장의 생생한 에피소드를 버무려, 오늘 당신이 회사와 가정에서 마주할 문제들에 대해 '2,000년 전 꼰대'들이 날카로운 훈수를 둡니다.

사기(史記)로 삶의 통찰과 함께 나를 지키고 위로를 얻으세요.


파트#2 천하를 움직이는 말의 전략(Persuasion & Strategy)


"칼에 베인 상처는 아물지만, 말에 베인 상처는 평생을 간다. 반대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한다."


회의실에서의 말 한마디가 당신의 연봉을 결정하고, 무심코 던진 농담이 당신의 평판을 좌우합니다. 여기, 말 한마디로 적을 친구로 만들고, 유머 하나로 왕의 고집을 꺾은 언어의 마술사들이 있습니다. 단순히 말을 잘하는 기술(Skill)이 아니라, 상대의 심장을 꿰뚫는 '말의 전략(Strategy)'을 배울 시간입니다.




제10챕터. 역생육고열전(역이기) - 배짱도 실력이다

(부제: 가진 게 없을 수록 고개를 빳빳이 들어라)


Step 1. 공감: 너무 겸손해서 실패한 스타트업 대표


중견 IT 기업의 전략기획본부장이었던 A씨는 AI 기술을 가진 유망한 스타트업을 찾아 협업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10명 규모의 한 AI 스타트업 대표가 협력 제안을 위해 찾아왔습니다. 스타트업의 기술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대화가 깊어질수록 어딘가 이상한 기류가 흘렀습니다.


"도입 비용은 본부장님께서 제안해 주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필요한 기능이 있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무엇이든 맞춰 개발해 드리겠습니다."

"수익 배분은... 저희는 크게 욕심 없습니다. 불리해도 감수하겠습니다."


대표는 시종일관 지나칠 정도로 겸손했고, 저자세였습니다. 아마도 자금 사정이 급박했거나 여러 투자처에서 거절당해 위축된 상태였던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 간절함은 오히려 독이 되었습니다. A씨와 실무진들은 대표의 지나친 저자세에 그들이 가진 기술력마저도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 이 회사는 지금 벼랑 끝이구나. 그리고 자신들의 기술에 확신이 없구나.'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습니다.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뢰'가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즈니스 파트너는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지, 무조건 "네, 알겠습니다"를 외치는 하청업자가 아닙니다. 나중에 A씨는 그 대표에게 조심스럽게 조언했습니다.


"대표님, 기술은 훌륭합니다. 그러니 다음번엔 좀 더 자신감 있고 당당하게 테이블에 앉으세요. 너무 굽히면 오히려 의심을 삽니다."


반면, 미국의 목사 로버트 슐러는 정반대의 배짱으로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빈털터리였지만 당대 최고의 건축가 필립 존슨을 찾아가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유리 교회(수정교회)를 지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습니다. 돈이 없지 않냐는 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의 기획안이라면 사람들을 설득해 투자를 받을 수 있습니다. 돈 걱정은 말고, 당신은 그저 최고의 설계만 하시오!"


그의 압도적인 자신감에 매료된 필립 존슨은 설계를 수락했고, 결국 그 교회는 완공되어 전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배짱은 무일푼을 전설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Step 2. 사마천의 이야기: 배짱 하나로 천하를 움직인 노인


진나라 말기,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영웅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고양(高陽)이라는 시골 마을에 살던 예순 살의 노인 역이기(酈食其)는 가난에 찌들어 문지기 노릇이나 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고양의 미치광이 술꾼(고양주도, 高陽酒徒)'이라 놀림받고 있었다.

어느 날, 유방(패공)의 군대가 고양을 지나갔다. 역이기는 유방이 인물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병사를 만나 본인을 유방에게 소개해달라고 요청했다.


"우리 대장(유방)은 유학자(선비)를 싫어해서 갓을 쓴 사람만 보면 갓을 벗겨 오줌을 눌 정도오. 그래도 만나겠소?"


역이기는 상관없다고 답하며 본인이 왔음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역이기가 유방이 있는 막사에 들어서자, 유방은 침상에 걸터앉아 두 여인이 그의 발을 씻기고 있어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늙은 유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무례한 태도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유방의 권위에 겁을 먹거나 무례한 태도에 화를 내고 나갔겠지만, 역이기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긴 읍(인사)만 할 뿐 절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뜸 호통을 쳤다.


"족하(당신)께서는 난폭한 진나라를 치고 제후들을 도우려 하십니까, 아니면 진나라를 도와 천하를 적으로 돌리려 하십니까?"


유방이 어이가 없어 대꾸했다.

"진나라가 포악하여 진나라를 치기 위해 일어났는데 진나라를 도울 리가 없잖은가!"


그러자 역이기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그렇다면 의병을 일으켜 천하의 영웅들을 모으는 주제에, 어찌 늙은 어른을 이토록 오만하게 대접한단 말입니까! 이러고도 천하를 얻기를 바라십니까?"


그 기세에 눌린 유방은 즉시 발 씻기를 멈추고, 의관을 정제한 뒤 그를 상석에 앉혔다. 역이기는 그제야 술을 마시며 천하의 형세를 논했고, 유방은 그를 '광생(미치광이 선생)'이라 부르며 책사로 삼았다. 이후 한신이 대군을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역이기가 나섰다.


"제나라는 땅이 넓고 험해 10만 대군으로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제가 가서 말 한마디로 항복을 받아오겠습니다."


역이기는 단신으로 제나라 왕을 찾아가 담판을 벌였다.

"천하의 대세는 이미 한나라로 기울었습니다. 항복하면 왕의 자리를 보전하겠지만, 버티면 머리가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의 배짱과 논리에 설득당한 제나라 왕은 70여 개 성의 경계 태세를 풀고 항복했다. 역이기는 제나라 왕과 술을 마시며 평화를 즐겼다.

하지만 비극이 닥쳤다. 역이기가 병사들의 희생 없이 협상으로만 70여 개의 성을 얻는 공을 세우자 질투심에 눈이 먼 한신이 참모 괴철의 꼬드김에 넘어간 것이다.

"늙은이의 혓바닥 하나에 70개 성을 뺏기고 장군의 체면이 뭐가 됩니까? 지금 제나라가 방심한 틈을 타 공격하십시오."


한신이 제나라와의 약속을 깨고 기습 공격을 감행하자, 분노한 제나라 왕은 역이기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다. 왕은 역이기를 끓는 가마솥 앞에 세우고 협박했다.

"지금 당장 한나라 군대를 멈추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삶아 죽이겠다!"


절체절명의 순간, 역이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큰 일을 하는 사람은 자잘한 것을 돌보지 않고(대행불고세근, 大行不顧細謹), 큰 덕을 행하는 사람은 사양하지 않는 법이다. 내가 너를 위해 할 말은 없다. 어서 삶아라!"


결국 역이기는 끓는 가마솥에 던져져 팽형(烹刑)을 당해 죽었다. 세 치 혀로 70개 성을 얻은 천하의 변사다운, 참으로 뜨겁고 비장한 최후였다.




Step 3. 지혜의 재해석: 태도가 권력을 만든다


비즈니스 협상이나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 굽혀야 한다",

"상대가 갑(甲)이니 을(乙)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역이기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내가 당당해야 상대가 나를 존중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프레임(Frame)의 법칙'이라 부릅니다. 이는 내가 상황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상대의 반응이 결정된다는 원리입니다. 내가 나를 '도움을 구하는 약자'로 프레임 씌우면 상대는 나를 하대하지만, 내가 나를 '문제를 해결해 줄 파트너'로 규정하면 상대는 나를 동등하게 대우합니다.


역사 속에서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바로 고려의 외교관 서희(徐熙)입니다.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을 때, 고려 조정은 겁에 질려 항복하거나 땅을 떼어주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서희는 적진 한가운데로 홀로 들어가 당당하게 호통을 쳤습니다.


"너희가 침공한 명분이 무엇이냐? 우리가 송나라와 교류하는 게 불만이라면, 거란과의 교류길을 막고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우리에게 여진족의 땅(강동 6주)을 달라. 그러면 너희와 교류하겠다."


놀랍게도 서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적을 물러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영토를 확장해서 돌아왔습니다. 그가 '패전국의 사신'이 아니라 '동북아 정세의 설계자'라는 프레임을 스스로 씌웠기에 가능한 기적이었습니다.


세계적인 협상 전문가 허브 코헨(Herb Cohen)은 저서 《협상의 법칙》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힘(Power)은 실제로 당신이 가진 것이 아니라, 당신이 가지고 있다고 상대방이 믿게 만드는 것이다." (Power is based on perception—if you think you got it, you got it. Even if you don't have it, even if you have it, you don't have it.)


역이기와 서희, 그리고 로버트 슐러는 가진 것이 없었지만 상대가 자신을 '힘 있는 사람'으로 믿게 만들었습니다. 반면, 앞서 소개한 스타트업 대표는 스스로 '힘이 없다'고 믿었기에, 정말로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비굴함은 겸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는 선언일 뿐입니다.




Step 4. 마지막 한 수


가진 것이 없을수록 고개를 숙이지 말고 빳빳이 들어야 합니다. 2,200년 전, 가난한 문지기 노인 주제에 천하의 영웅 유방을 호통쳐서 무릎 꿇린 역이기(酈食其)처럼 말입니다.

지금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러 가십니까? 혹은 거대한 상대 앞에서 위축되어 있습니까? 그럴수록 어깨를 펴고, 목소리에 힘을 주십시오. 밑져야 본전입니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의 배짱만큼 무서운 무기는 없습니다.

역이기처럼 외치십시오. "나는 부탁하러 온 것이 아니라, 당신을 도우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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