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개업하는가? 사이버범죄 특화 로펌의 탄생
<좌충우돌 로펌개업기>
이제 변호사 3만명 시대를 맞이하고 있고 개업 변호사 1인당 월평균 사건 수임 건수는 겨우 1건 정도라고 한다. 굳이 이런 통계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인터넷을 찾아보면 너무나 많은 법무법인, 법률사무소들이 존재한다. 그 안에서 내가 설 자리가 있을까? 하고 기가 팍 죽게 마련이다. 이렇듯 야생과 같은 개업 시장에 뛰어든 이상 나도 그저 이상과 낭만을 쫒을 수는 없었다. 결혼도 했고 가장으로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할 수 있는 형사사건 범위에서 다양한 사건을 들어오는 대로 맡았다. 많은 개업 변호사들이 공감할 것이다. 지금 사건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하고 싶은 사건만 가려받는다는 것은 사치였다. 그렇게 이런저런 사건들을 그래도 맡은 바 열심히 하다보니 감사하게도 사건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예전 로펌을 다닐 때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이 통장에 들어오게 됐고, 사건이 늘어나다보니까 혼자서는 감당이 안돼 직원도 뽑게 되고 어쏘 변호사님까지 구하게 됐다. 상대적으로 빠른 시기에 개업을 한 것 치고는 대박까진 아니지만 나름 성공한 개업 성과였다.
그런데 생존의 문제를 넘어서니 이제 새로운 고민이 들어섰다. 내가 개업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속했던 큰 로펌의 시스템과는 맞지 않아서? 그냥 내 멋대로 자유롭게 일하고 싶어서? 가진 건 변호사 자격증 하나 뿐인데 그냥 그걸로 먹고 살려고?
머릿 속엔 온갖 생각들이 떠올랐다. 옆길로 새자면 나는 내 인생을 하나의 스토리로 본다. 그리고 그 스토리가 화려하진 않더라도 80억 세계 인구 중 나만이 쓸 수 있는 독특한 이야기이고 싶다(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도 그런 역사화 과정의 일환이다). 그러려면 내 행위에, 아니 스토리가 그렇게 전개되는 마땅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이런 게 심리학자 매슬로우가 말하는 상위의 자아실현의 욕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던 중 일본의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의 <왜 사업하는가?>란 책을 읽게 되었다. 요지는 경영자는 사업을 하는 이유와 철학을 확고하게 갖고 있어야 하고 그래야 사업이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변호사 개업도 당연히 사업에 속했다. 개인적 욕구뿐만 아니라 사업의 운명을 위해서도 개업한 목적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책을 읽으면서 고민한 결과, 아래 두 가지 기준을 참고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기로 했다. 첫째는 '그 일을 할 때 내 마음이 동하는지, 나아가 내 혼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 둘째는 '내가 속한 필드, 나아가 세상에 어떤 유산을 남기고 싶은지' 였다. 있어보이게 표현했지만 결국 나도 재밌고 남들에게도 도움되는 방향이란 말이다.
로펌을 키워서 내가 있던 율촌, 김앤장과 같은 대형로펌을 만들고 싶은가?(생각은 자유니까) 내게 물어봤지만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큰 조직을 이끌어나갈 깜냥도 못 될 뿐더러 이미 쟁쟁한 대형로펌들 사이에서 내가 굳이 남길 유산은 없을 것 같았다. 아니면 YK처럼 전국에 지사를 세우며 공격적으로 확장하는 네트워크 로펌을 만들고 싶은가?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서는 대단한 성공일테지만 남들 따라하기를 자처해 아류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고 세상에 도움도 안 될 것이다.
그런 로펌들 보다는 작지만 전문가들로 똘똘 뭉친, 모든 분야를 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특정 분야 만큼은 독보적인 전문성을 가진 그런 부티크 로펌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관심있는 분야의 사건만 수행하면서 나도 자긍심을 갖고 몰입할 수 있고 전문적인 사건 수행으로 고객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그리고 공간적으로도 특이하게 재택근무 시스템을 활용하여, 서울 강남 빌딩에 사무소를 하나만 두거나, 네트워크 로펌처럼 지방에 지사를 확장할 필요 없이, 전국에 소속변호사들이 자연스럽게 퍼져 있는 그런 형태. 그래서 그 지역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지역에 재택근무를 하는 변호사가 신속하게 사건을 도와줄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나는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로펌을 감히 '3세대 로펌'이라고 명명하며 업계에 새로운 유산으로 남기고 싶다는 포부를 품었다.
처음 어떤 분야를 전문분야로 삼아야겠다 생각하고 시작한 분야는 사이버 명예훼손과 모욕, 흔히 말하는 악플을 당해 고소를 원하거나 반대로 그런 고소를 당한 사건들이었다. 자잘한 문의가 많고 수요층도 젊은 세대가 많아 수임 전환이 잘 되지 않는 외면받기 쉬운 분야였다. 그러나 특유의 반골기질? 덕분에 일부러 이 척박한 분야에 뛰어들었고 온라인상담 게시판에 답변을 달고 판례 공부도 하며 점차 전문성을 쌓아나갔다. 이제는 한 사건의 양 당사자들이 앞다투어 연락이 올 정도로 명예훼손 분야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명예훼손은 입으로 소문이 전파되는 경우 말고는 주로 사이버상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벌어진다. 예를 들어 인스타그램 스토리글로 저격을 하는 경우, 단톡방에서 폭로를 하는 경우, 가장 악의적인 것은 디시인사이드 등 커뮤니티에 신상을 감추고 저격글을 올리는 경우 등 실로 다양하다. 또한 단지 명예훼손 사건 말고도 나아가 사이버상에서 벌어진 일로 문의가 오는 사건들의 종류는 더욱더 다양하다. 예를 들어 게임상에서 싸우다 그만 성적인 패드립을 날려 고소당한 경우(통신매체이용음란),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 보복을 하기 위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린다고 카톡, 인스타DM 등으로 협박을 하거나 계속적으로 연락을 하는 경우(협박, 스토킹), 인스타 마켓 등 이커머스에서 다른 상품을 교묘하게 카피하여 판매하는 경우(저작권, 지식재산권), 최근에 심각해지는 마약범죄에서도 다이어트용으로 처방받은 향정신성의약품 디에타민을 트위터에 올려 돈을 받고 판매하는 경우(마약 향정) 등등.
사이버범죄라는 일률적인 정의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이버상에서' 일어나고 '사이버상의 증거'가 문제되는 사건들(내 기준상 사이버범죄의 개념)이 현대 사회에서 굉장히 많이, 또 다양한 양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을 다루려면 단순히 관련 법조문과 판례만 잘 알면 되는 것이 아니라 관련 사이버공간에 대한 이해(해당 사이트의 아이피 정보 보관기간, 글이 삭제되면 정보가 바로 폐기되는지 등등), 실무적 기준(예를 들어 명예훼손, 모욕의 경우 인스타, 트위터 등 해외 사이트에서는 국내 영장 집행이 거부된다), 그리고 관련 법리를 구체적 사실관계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도 필요했다.
이러한 사이버범죄 분야는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고 내 흥미를 끌었다. 나는 예전부터 추리소설을 좋아해왔는데 전통적인 추리소설도 좋지만 현대 사이버 기술을 가미한, 예를 들어 할런 코벤 류의 추리소설을 가장 좋아했던 것처럼 이러한 분야를 파는 것이 재밌었다. 또한 이러한 사이버공간과 그 속에 벌어지는 사이버범죄의 생리를 잘 알고 이 분야를 제대로 하는 전문 로펌이 아직 없는 것 같았다. 악플, 사이버불링, 사이버스토킹 , 인터넷 마약거래 등 날로 심각해지는 사이버범죄의 피해를 생각해보았을 때 이 분야를 제대로 한다면 법조계에도, 관련 사건으로 절실한 도움이 필요한 의뢰인들에게도 자랑할 만한 유산이 될 터였다.
그렇게 하여 사이버범죄 특화 로펌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로펌은 '사이버범죄'만 수행하더니 급기야 '사이버로펌'이 되기로 하는데..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