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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l 11. 2023

단돈 300엔으로도 행복할 수 있어요

단, 모 아니면 도


도쿄 JR신바시역 히비야구치 개찰 근처에는 한쪽 벽면 일부가 캡슐토이 뽑기 기계, 가챠 머신으로 가득한 가챠샵이 있다. 회사가 밀집해 있어 샐러리맨의 왕래가 많은 지역에 이런 거로 장사가 되려나, 매일 출퇴근길에 눈길을 주던 것이 화근이었다.


가챠 머신에는 바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마력이 있는지, 그 앞에는 늘 누군가가 서 있었다. 이번에야 말로 내가 원하는 장난감을 뽑아보겠다는 듯 사뭇 비장하기까지 한 뒷모습은, 지켜보는 내 마음까지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오며 가며 남의 조마조마를 빌려 쓰던 나는, 이윽고 나만의 조마조마를 사기 위해 지갑에서 백 엔짜리 동전 세 개를 꺼내 들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발을 들여놓은 가챠의 세계.

원하던 것이 나오면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이 기쁘지만, 같은 시리즈를 뽑으면 뽑을수록 아까 나온 그것이 또 나올 수 있다는 리스크 또한 올라가게 된다. 무언가를 강렬하게 원함과 동시에 격렬하게 거부하는 마음. 닮은 듯 닮지 않은 염원을 엄지와 검지에 담아 레버를 돌린다.


끼릭 끼릭 철컥.

같은 장난감은 같은 색깔의 캡슐에 담겨 있기 때문에, 먼저 색깔을 확인한다.

이제까지 뽑았던 것과 다른 색이면 일단 안심, 다음은 캡슐을 열어 내용물을 꺼낸다.


아, 제일 안 귀여운 애 나왔어........






어릴 때부터 뽑기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모 아니면 도, 원하는 것이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가 노력이 아닌 운에 의해 좌우된다는 감각이 어린 마음에도 께름칙하게 느껴졌다. 원치 않은 것이 나왔을 때, 내 소유욕은 아직 불길이 사그라들지 않았는데, 내 손에는 원치 않은 결과물만 그 나름의 '성과'가 되어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도 영 찝찝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원하는 그것을 한 번에 나오게 하는 것은 운이 맞지만, 나올 때까지 동전을 집어넣는 것도 노력이다. 결국 운은 노력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때론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새로 문을 연 우리 동네 가챠샵


동네에 새로운 가챠샵이 오픈했다.

우리 동네라 해도 차로 15분 거리라, 도쿄에서처럼 오다가다 들릴 수 있는 거리는 아니지만 새로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지지난주도, 그리고 지난주에도 다녀왔다.


내게는 목표가 있었다.


판다를 갖고 싶었다


실은 지지난 주, 내가 좋아하는 '마치보우케 (*待ちぼうけ, 오지 않는 사람을 간절히 기다림)' 시리즈 1탄이 재발매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은 10탄까지 나왔는데 나는 8탄이 되어서야 이 시리즈의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꼭 이 초기작, 그중에서도 요즘 우리 집의 아이돌, 판다가 꼭 갖고 싶었다.

(이 자리를 빌려 아이바오의 출산을 축하합니다)


그래서 그 길로 남편을 꼬드겨 뽑으러 갔는데,


목표였던 판다는 스치지도 못했다


고양이, 시바견, 비둘기(마치보우케10)까지 뽑고, 가챠머신 옆 틈으로 안쪽을 들여다보니 아마도 판다일 것으로 예상되는 연두색 캡슐이 출구 근처까지 내려와 있는 것이 보였다. 3개나 뽑았으니 이제 집에 가자는 남편에게 '다음은 절대로 판다다!' 라며 300엔을 강탈했다.


또 시바견이 나왔다.


"판다라면서요"

"... 개가 많으면 다복하고 좋지 뭐"


우겨서 한번 더 했는데 개가 나와서 더 하자고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은 조용히 그러나 명확하게 점점 더 커져갔고, 일주일 후, 결심을 끝낸 나는 남편에게 고했다.


"오늘이야말로 판다를 뽑을 수 있을 것 같아"

"............"




그리하여 다시 온 가챠샵.


지난주와 라인업은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아까까지는 판다를 뽑을 수 있을 거라던 나의 자신감은 온 데 간 데 없어졌다는 것.

여기에 도착하자 우리가 판다를 뽑으려고 이미 900엔이나 써버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중 2/3는 시바견에 쏟아부었다)


'계속 동전을 밀어 넣는 노력'은 냉엄한 현실주의 앞에 무너져 버렸다.

이제까지 쓴 돈 900엔이면 내가 좋아하는 참이슬을 3병 마실 수 있었다.

지금 한번 더 레버를 돌리면 추가로 참이슬이 1병 더 사라진다.


그냥 드라이브했다 치고 집에 가자는 내게, 어차피 온 거 뽑아는 봐야지 않냐며, 남편은 기계에 동전을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게 공적을 넘기려는 듯 레버를 가리켰지만, 지난주의 트라우마로 또 개가 나올 것 같은 두려움에 채 레버를 잡지 못했다. 나 대신 남편이 레버를 돌렸다.


끼릭 끼릭 철컥.


끼야아아아아악


판다가 나왔다.

설마 정말 판다가 나올 줄이야.

참이슬 운운은 순식간에 지워지고, 판다가 든 캡슐을 손에 쥔 채, 부부는 마주 보고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얼쑤절쑤


판다를 손에 넣고 잠깐 넋이 나가 있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남편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 장하다 폭풍 칭찬을 하고는 그 자리에서 판다를 꺼내 배경 부스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가챠샵 중에는 가챠카츠*를 위해 이렇게 작은 공간을 꾸며두고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 둔 곳이 있다. (*가챠카츠 (ガチャ活, 가챠활동): 모은 캡슐토이를 예쁘게 디스플레이하거나 사진을 찍는 것)

지난주도 찍었지만 이번 주는 그 신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이들을 데려온 젊은 부부가 두 팀 정도 가게 안에 있었는데, 그 부모랑 비슷한 연배인 내가 어린아이들까지 제치고 그 장소에서 제일 신나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창피해서 오래는 놀지 못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차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백밀러 위에 앉혀보고
데리고 간 고양이랑 드라이브도 시켜주고
공원에 데려가 연잎에도 올려주고
푸르른 잔디밭에서 야생을 느끼게도 해주고 (풀 알레르기도 잊어버렸다)
사람들이 하도 만져 맨질맨질해진 강아지 머리에도 아슬아슬 앉혀보고
벤치에 올려놓고 카메라 필터 걸어서 분위기도 살려보고
우연히 발견한 예쁜 토끼풀이랑 사진도 찍어주고
오리에 태워 난데없는 동화 세계를 연출해 보고
집에 와서는 환영회도 열어 주었다


아, 판다.

2주간의 기다림과 우여곡절 끝에 맞이하게 된 판다.

때문에 더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는 조금만 걸어도 덥고 다리 아프던 내가, 더위고 뭐고 다 잊고 공원 여기저기를 누비며 사진을 찍는 동안에는 땀 한 방울 나지 않았다. 판다와 고양이를 손에 쥐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것도 없었으면 손까지 써서 뛰어다닐 것처럼 아주 즐겁고 기뻐 오랜만에 마스크를 하지 않은 얼굴에도 웃음이 떠나갈 줄을 몰랐다.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은, 방금 내 손안에 들어온 판다와 사진을 찍을 소재가 되어주었고, 찍으면 찍는 족족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이 환희와 희열이 단돈 300엔, 한국 돈으로 환전하면 2700원 남짓이다. 

이 모든 것이 300엔의 작은 날갯짓이 불러일으킨 폭풍이라니.

물론 300엔의 날갯짓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지난주)에서 900엔이란 노력, 운이라는 불확실 요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꺾이지 않는 마음까지 전부 그러모았지만,


어쨌거나 오늘의 판다는 300엔이었다.  

리즈너블 하고 누구나 쉽게 지갑을 열 수 있는 가격.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남편이 말했다.


"이제까지 해줬던 그 무엇보다도 300엔짜리 가챠를 제일 좋아하는 것 같아 복잡한 기분이야"


역시 행복의 가치는 돈과 비례하지 않고,

쉬운 행복이란 없다.

나의 행복도, 당신이 나를 행복하게 하여 얻는 행복도 말이야.



그리고 지금 그 판다는, 환영회를 너무 거하게 한 나머지 숙취로 고생하고 있다고 한다.


이 재미를 한번 알아버리면 가챠를 그만둘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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