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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an 15. 2024

그저 라면땅이 먹고 싶었을 뿐인데

인스타그램을 하긴 하지만 프로페셔널 집순이의 삶에 딱히 엄청 좋은 곳, 캡 멋진 풍경, 무진장 맛있는 음식 같은 건 없다. 독신시절엔 한창 업데이트에 열중하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제도 오늘 같고, 오늘도 내일 같아서 간혹 가다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 생존을 보고하는 툴 정도의 느낌으로 사용하고 있다.


뭘 올리는 건 잘하지 않게 되었지만 뭘 보는 건 잘한다. 주로 동물, 요리 피드를 보는데 어느 날 거기서 '전자레인지로 라면땅 만들기' 레시피를 보았다. 라면 양면에 마요네즈와 설탕을 고루 바르고, 앞면 2분 30초, 뒷면 2분 30초 전자레인지에 돌려 뿌셔뿌셔 하면 라면땅이 된다던가. 백종원 비법이랬다. 그건 그럼 꼭 해봐야죠.


어제저녁의 일이다.

  




이미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한국행이 남긴 대량의 빨래와 겨우 이별을 고한 날이었다. 겨울은 빨래가 빨리 마르지 않는 데다 매일 새로운 빨랫감이 쌓여 이틀에 한 번씩, 며칠에 걸쳐 나누어 빨아야 했다. 그동안 우리 집 거실에, 탈의실에 삐뚜름하게 쌓여있던 빨래에 마음 불편해하던 나날과 겨우 안녕이다.


또 그 전날에는 어쩌면 불편한 속내를 내비쳐야 할 이벤트도 있었다. 다행히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어쩌면 울부짖는 나를 뜯어말리려 본의 아니게 참전을 해야 했을 평화주의자 남편 역시 본인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일이 해결된 것에 대해 안심한 눈치였다. 둘은 제각각의 이유로 홀가분한 마음에 레몬사와로 단비를 뿌렸다. 땅이 굳을만하면 다시 소주를 내렸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마시다 보니 안주가 똑 떨어졌고, 배 부르지 않고 심심한 입만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해졌다.


그때 전두엽이 말했다. '라면땅 해보시지?'


노릇노릇


프라이팬에 기름을 부어 노릇노릇 튀긴 라면에 설탕 솔솔 뿌려먹는 라면땅. 일본에도 베이비스타라는 라면땅 비슷한 과자가 있지만 이 쪽은 짭짤한 맛 베이스다. 새로운 경험이 과거를 잊을 수 있을 만큼의 혁신을 보여주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아쉽게도 베이비스타는 라면땅을 이기지 못했다.


찬장 안에서 오늘 막 남편이 사 온 일본 라면을 꺼냈다. 5 봉지에 179엔이라는 놀라운 가격. 스프만 따로 서랍에 챙겨두고 면을 꺼내 마요네즈와 설탕을 발랐다. 한국 라면보다 면발이 가늘고 약하니 원 레시피보다 30초 줄여 돌려보았다. 2분 뒤, 위아래를 뒤집어 보니 오, 이거 진짜 라면땅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 좀 허여니까 이번엔 역시 배운 대로 2분 30초. 삑삑삐빅 눌러놓고 화장실에 갔다. 거실에 돌아가면 딱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곧이어 남편이 따라 나와 화장실 문 밖에서 내게 말을 걸었다.


"요보"


아이, 그 새를 못 참고 따라와서 장난이야.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왜?"

"저거, 깨졌는데"


처음엔 라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낮에 구워 먹은 곱창도 프라이팬 위에서 열을 받아 튀고 튀었다. 마요네즈 바른 라면이라고 별 수 있나. 전자레인지 안에서 열을 받으면 그 애도 튀고 깨지고 할 수 있겠지. 게다가 우리 집에는 전자레인지에 넣어 깨질 그릇은 없다. 그날 넣은 그릇은 이미 해동 등 다양한 상황에서 활약해 온 베테랑 정예멤버였고.


"그릇이 깨졌어."






내가 아직 국민학생이던 무렵, 엄마 아빠가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자동차가 반 전복되는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다행히 큰 피해로 이어지지 않고 어디 다치거나 한 것도 아니라 어린 내가 충격받지 않게 쉬쉬 하다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때 엄마는 순간적으로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만약 이렇게 우리가 가버리면 그 애 혼자 어쩌지, 하는 생각. 차가 중심을 잃고 기우뚱하는데 눈을 질끈 감고 '우리 이람이 어떻게 하지!'라고 외쳤다 한다. 부모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깨진 것이 라면이 아니라 그릇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외쳤다.


"전자레인지는? 전자레인지는 무사해?"


내 죽음을 다른 그릇에게 알리지 말라


사고 현장인 전자레인지 안에서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전자레인지 안의 회전판을 꺼냈다. 회전판 위에는 정확히 3개의 조각으로 깨끗하게 터진 접시와 다 죽어가는 라면이 푸쉬식 탄내를 풍기고 있었다. 전자레인지도 말짱했다. 내 자식도 아닌 전자레인지가 말짱하다는 사실, 이미 10년도 더 넘게 쓰고 있지만 앞으로 10년도 거뜬했으면 좋겠는 우리 집 전자레인지가 쓸린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하다는 것이 마냥 기뻤다.


사건 직전, 첫 번째 2분간


하지만 그 마음도 잠시 뿐, 불과 몇 분 전까지는 설탕 냄새를 풍기며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었던 라면과 조각난 그릇을 비닐봉지에 담아 버리고 나자 갑자기 기운이 쪽 빠졌다. 아아, 나는 그저 라면땅이 먹고 싶었을 뿐인데 이게 뭔 일이라니. 이 즐거운 술자리를 그저 더 즐겁고 맛있게, 조금만 더 늘려나가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기대했던 바삭하고 달콤한 라면땅은 사라지고 쓰레기만 남았다. 그릇은 백엔샵에서 산 거고 라면도 먹었다 치면 그만이지만, 마음이 아주 복잡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고, 룰루랄라 라면을 굽던 건 나인데 라면땅은 평행우주의 내가 가져가 버린 것이 억울하기도 하고, 열심히 해도 기대만큼 되지 않는 일이 태반인데, 열심히 하지 않아도 기대대로 될 일조차 그렇게 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걸 마주할 때의 섭섭함, 그런 마음도 있었다.


그래도 프로페셔널 집순이의 잔잔한 일상에 약간의 너울이 일었으니, 아아 그릇은 갔습니다, 하지만 나와 우리 집 전자레인지는 무사하다는 내용으로 오랜만에 인스타그램을 갱신해 볼 수 있다는 것이나 고민고민하지 않아도 글감 하나 더 생긴 것에 위안을 해야 하는 걸까. 당분간은 라면을 보기만 해도 이 일을 떠올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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