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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Feb 15. 2024

처피뱅을 한 모순도토리

귀가한 남편의 시선이 이마 한가운데에 와닿는다. 이마 가운데에는 자른 짧은 앞머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남편은 말없이 그저 알듯 말듯한 미소만 지으며 신기한 앞머리를 응시했다. 


"처피뱅이라는 건데, 잘못 자른 거 아니고 원래 이런 거야."


뭔가 변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패 같아 보일 이것은 사실 실패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 성공이시라고.


"どんぐり" 


이윽고 남편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 동구리

한국어로 '도토리' 되시겠다.





이마와 눈썹 사이 짧은 길이의 앞머리. 

도토리 모자 같은 처피뱅을 한 것은 순전히 기분전환을 위해서였다. 


지난달, 몇몇 글들이 연속으로 다음 메인에 소개되면서 이제까지 없던 조회수, 구독자수의 급등을 맛보았다. 기뻤지만 괜히 설레발치다 나중에 머쓱해지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예상대로 알고리즘의 은총이 끝나자 조회수는 원래의 자리를 찾아갔고, 종종 찾아오던 알고리즘의 간택도 그 이후로는 뚝 끊겼다. 구독이 취소될 때는 방금 올린 내 글이 너무 구려 그런 것 같아 씁쓸했다. 올해 토정비결에서 '입조심하라' 했는데,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사람이 입조심할 일이 뭐가 있겠나 했건만 그게 이 이야기였구나 싶었다. 


한번 단맛을 봤으면 그걸로 동기부여가 되어야 할 텐데 시간이 갈수록 나의 글에 의문만 들었다. 평소대로 쓰면 알고리즘 없이는 안 되는 맛없는 글, 딱 내 깊이-얄팍-만큼의 글 밖에 나오지 않을 텐데 쓰면 쓸수록 내 그릇 크기만 들통날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읽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구독자 수가 늘어날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독자가 읽고 싶을 것을 쓰라던데 그게 뭐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 뭘 쓸 수가 없었다. 쓰려고 모아둔 글감들도 전처럼 반짝반짝해 보이지 않았고, 다시 브런치 앱 메인에 글이 올라갔어도 큰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정작 하고 싶은 말들은 가슴팍에 걸리기만 한 채, 숫자만 바라보다 일주일이 지나갔다. 괴로웠다. 즐거우려고 쓰는 글쓰기인데 도리어 괴로워지다니. 게다가 응원해 주시는 분들도 계신데. 배부른 소리다. 


그래서 앞머리를 자르기로 했다. 마음이 복잡할 머리를 괴롭히면 기분이 나아진다. 한동안 자르지 않아 눈 아래까지 자라있는 앞머리를 자르며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자. 그리고 숫자에 연연하지 말고 감사함에 감사하며 다시 즐겁게만 쓰는 거야. 


서랍에서 가위 두 개를 꺼내 들고 세면대 앞에 섰다. 중안부가 긴 얼굴이라 습관처럼 눈썹 조금 아래 사선으로 잘라오던 나의 앞머리. '이런 상황이니 이렇게'가 아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건 뭘까를 생각해 봤다. 처피뱅이 떠올랐다. 작고 동글동글 귀여운 사람만 해야 할 것 같아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해볼 수 없었던 처피뱅. 오늘은 그냥 하고 싶은 걸 하자.


앞머리에 깊게 가윗날을 들이밀었다.






이후, 나는 집에서 도토리로 불리게 되었다. 때때로 '동네 꼬마', '도토리계에서 제일 영리한 도토리', '지성도토리', 어제는 자기한텐 하지 말라 하면서 나는 한다고 '모순도토리', 아침 방송 가위바위보 코너에서 졌다고 '패배도토리' 소리도 들었다. (모순도토리는 왠지 필명으로 하고 싶다?)


그렇게 온갖 도토리 별명을 양산하고 있지만 나는 지금의 짤막한 앞머리가 꽤 마음에 든다. 눈썹 그리기만 잊지 않으면 얼핏 스타일리시해 보이기도 하고, 뭣보다 어울릴지 말지 생각 안 하고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한 거라 좋다. 알고리즘이 픽업하는 글이 아니더라도, 깊고 진한 삶의 향이 느껴지는 글이 아니더라도 뭐 어떤가. 이런 글도 이런 글 나름대로 좋은 점이 뭔가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그래도 이번 주는 글쓰기가 조금 편안해진 기분이다. 


역시 이 처피뱅은 실패가 아니라 실패의 어머니,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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