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 아무도 모른다

14화-우리 동네

by 해금이


어린 시절 살던 동네는 서울 동대문구였다. 주택가도, 그렇다고 상업지구도 아닌 애매한 곳이었는데, 지금 기준으로 보면 더욱 그렇다. 크고 작은 빌딩, 공장, 한옥, 다세대 주택이 뒤섞여 있어 매 골목마다 다른 세상으로 순간 이동하는 것도 같았다.


제기동 청계천에서 신설동 방향으로 이어진 대로를 따라 걷다 보면 내가 살던 집이 나온다. 그 일대는 미싱공장, 원단공장, 금속 파이프 공장이 빽빽이 들어서 있어 하루 종일 귀가 먹먹할 만큼 시끄러웠다.


낮에는 미싱 돌아가는 소리, 철판이 기계에 잘리는 굉음, 무거운 물건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밤이면 텅 빈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와 땅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렸는데, 혹여 누군가 차에 치이는 건 아닐까 싶어 늘 불안했다.


상가 건물에 세 들어 살던 나는 아침마다 경적 소리에 눈을 뜨며 서바이벌 같은 하루를 시작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소음에 예민했던 나는 아침밥조차 제대로 먹기 힘들었다. 등굣길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차들이 코앞까지 붙어 지나갔고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차를 피해 늘 건물 벽에 바짝 붙어 걸었다. 언제 사고가 나도 이상할 게 없는 환경이었지만, 생계에 바쁜 부모님께 학교에 데려다 달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남녀노소 모두가 각자도생해야 했던 살벌한 80년대. 나 또한 국민학교 1학년씩이나 되었으니 도보로 15분쯤 되는 등교길은 혼자 갈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 성인도 아닌, 그렇다고 힘으로 버틸 수 있는 남자아이도 아닌 어린 여자아이로서 거친 세상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바삐 걷던 어른들에게 떠밀리거나, 심지어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 누군가 이유 없이 손등에 담뱃불을 지지고 가는 일도 감내해야 했다.


학년이 오를수록 그런 환경도 점점 무뎌졌지만, 끝내, 그 동네에 정은 붙지 않았다. 집 근처엔 놀이터 하나 없었고, 밤이면 술 취한 아저씨들이 길거리를 배회했다. 그럼에도 부모님께 이사 가자는 말 한마디 꺼낼 수 없었다.


집이 너무 없이 살면 아이는 눈치가 빤해진다. 갖고 싶은 것을 사달라고 조를 수 없다. 심지어, 하고 싶은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 나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스스로 원하는 것을 남에게 당당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행동의 기저에는 유년시절 내내 지속된 더부살이 탓도 있었다.


내 더부살이의 기원을 말하려면 부모님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빠와 엄마는 경상남도 통영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통영이 고향인 엄마와 달리 포항이 고향인 아빠는 지긋지긋한 촌구석을 벗어나기 위해 몰래 고향의 논 마지기를 팔아 통영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원대한 꿈을 꾸며 통영에서 사업을 시작한 아빠는 제대로 꿈을 펼치기도 전에 사업을 말아먹었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알거지가 되고 나서 한 동안 방황하던 아빠를 일으켜 세운 건 그 당시 태어나지도 않은 나였다. 통영이 고향인 엄마는 사업성공을 장담하며 장미빛 미래를 약속하는 허세 가득한 20대의 아빠와 사랑에 빠졌다. 사랑에 빠진 것 까지는 좋았는데 내가 덜컥 생겨버린 것이다. 인생을 포기하려 했던 아빠는 자신의 아이가 생긴 것을 알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사기로 인해 무일푼 빈털터리가 된 아빠와 결혼도 하기전에 애부터 가져버린 엄마. 현재도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편견을 견뎌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하물며, 1980년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필, 만나도 그지같은 놈을 만나서 인생을 망치냐며 이모에게 등짝을 후드려 맞은 엄마는 위뚜루마뚜루 결혼식을 올렸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이 이 꼴을 보지 않아 천만 다행이라고 이모는 결혼식 내내 한탄을 하셨다고 한다.


막상, 식을 올리긴 했지만, 두 사람은 막막했다. 난 엄마의 뱃속에서 몸피를 키워가며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아빠는 백수였다. 신혼집 마련할 돈도 없어 이모에게 얹혀 살 때도 아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이후에도 한 군데 진득하게 일할 성격이 못되어 이일 저일 기웃거리다 다시금 백수로 돌아간 아빠.


그런 아빠에게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일이 있었으니, 엄마가 또 임신을 한 것이다.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했던 시절, 아들. 그것도 쌍둥이로다가. 시간이 흘러 동생이 태어나자, 내 인생은 그야말로 풍전등화가 되었다.


도저히, 육아를 감당할 수 없었던 부모님은 나를 친척집에 맡겼고 그 때부터 나의 더부살이 인생은 시작되었다. 어린 딸을 친척집에 맡긴 아빠는 쌍둥이를 엄마와 이모에게 맡긴 후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보름달 빵과 우유로 허기를 채워가며 서울시내 중국집이란 중국집은 모두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숙식제공이 가능한 식당에 들어가 철가방부터 시작해 보조 요리사로 주방에 들어가기까지 엄청난 수모와 무시를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먹이고 입힐 가족이 있기에 참아 낸 인고의 세월 덕에 아빠는, 결국, 서울 동대문구 변두리에 자그마한 가게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아빠가 가게 한 자리, 방 한 칸을 마련하자 나의 지긋지긋한 더부살이도 끝이 났다. 상가가 뒤섞인 대로변 바로 옆에 위치한 빌딩 1층에 자리잡은 아빠의 식당은 ‘만리장성’.


빨강색 바탕에 노란 한자가 휘갈기듯 붙어있는 간판이 달려있는 중국집. 그곳이 아빠와 엄마가 운영하는 식당이자 우리집이었다. 알루미늄 프레임이 둘러진 유리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양쪽으로 3개, 총 6개의 테이블이 놓여있다.


세로로 긴 직사각형 구조의 가게 안을 테이블 사이로 가로질러 쭉 들어가면 신발을 벗고 들어갈 수 있는 방이 하나 나온다. 그 방 안에서 우리 식구 5명이 복잡 복잡 모여 살았다. 손님이 붐비는 낮에는 손님용 룸이 되었고, 밤이 되면 우리 식구들이 이부자리를 펼치고 등을 누이는 방이 되었다.


방 옆에는 엄마와 아빠가 음식을 조리하는 주방이 있었는데 좁아터진 부엌에서는 기름냄새가 하루 종일 새어 나왔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그 당시의 통념에 따라 나 또한 밥값을 해야 했는데 양파를 까면서 내 평생 흘릴 눈물을 그 때 제일 많이 흘렸다.


그렇게 양파껍질을 벗겨내면, 수고비조로 100원에서 200원의 용돈을 받았는데 대부분은 동네 슈퍼마켓에서 모조리 탕진되었다. 운이 좋아 200원의 용돈을 받은 날은 그야말로 축제였다. 집 앞 맞은편에는 영진빌딩이라는 큰 건물이 있었는데 대로변 쪽으로 영진슈퍼가 있었다.


고사리 손에 동전을 꽉 쥐고 슈퍼 입구로 들어서면 그곳은 천국이었다. 사탕, 젤리, 초콜릿, 과자, 비스켓 등등이 가게 입구에서 복도 끝까지 고운 자태를 자랑하며 쭉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과자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함에 빠지곤 했던 나는 마지막 순간 여지없이 고뇌에 빠지곤 했다.


부족한 돈으로 살 수 있는 과자는 한정되어 있었기에 결론은 늘 같았다. 50원 빅파이와 50원 깐돌이 아이스크림. 나머지 100원으로 기타 낱개 초콜릿과 과자들을 사고 나면 수중에 돈은 금세 바닥나 버렸다. 그렇게 돈을 탕진하고 나면 가는 곳이 영진빌딩의 주차장 입구였다.


우리집 식당 맞은편에 있는 영진 빌딩 옆으로는 지하 주차장 입구로 이어지는 램프가 하나 있었다. 어른들 눈에는 그저 평범해 보이는 내리막길이겠지만 아이들의 눈으로 보면 그곳은 모험과 신비의 장소였다.


주변에 마땅한 놀이터 하나 없는 동네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램프의 내리막길은 아이들의 호기심과 모험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내려갈수록 어두워지는 지하주차장 입구에서 아이들은 저마다의 용기와 담력을 시험했다.


“이번에는 네가 내려가!”

“내가?”

“왜? 못 내려가? 헤~, 무서워서 그러지?”

“아니거든!”


특히, 내 또래 남자아이들이 지하주차장 앞에서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지기 싫어하는 특유의 경쟁심리를 드러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데다 대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어린 수컷들의 허세가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무모해 보이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싸움구경과 불구경이라고 아이들의 싸움을 방관하듯 지켜보았다.


수세에 몰린 까까머리 남자 아이 하나가 머뭇거리면서도 지하 램프로 천천히 내려갔다.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고,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아이들의 말에 따르면 지하 주차장에는 귀신이 산다고 했다. 밤이면 밤마다 머리를 산발한 여자 귀신이 노래를 부르는데, 만일, 박수를 쳐주지 않으면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괴담이 동네에 떠돌곤 했었다.


수십쌍의 어린 눈동자들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까까머리를 향해 있었다. 하필, 땅거미가 지며 사위도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이는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지하로 내려갔다. 발걸음이 내리막길 저 아래로 향할수록 어둠이 점점 아가리를 벌리고 아이를 집어삼켰다. 나 또한 숨을 죽이고 까까머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주변의 아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야, 진짜 들어갔어. 귀신한테 잡혀가는 거 아니야?”

“우씨, 귀신한테 잡혀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지하주차장 입구에 모여든 아이들을 압도하기 시작했을 때 갑작스러운 비명과 함께 조금 전 지하로 들어갔던 까까머리가 쫓기듯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아아악~.”


남자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리자, 주변의 아이들 또한 겁에 질려 순식간에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나 또한 도망가고 싶었지만, 막상 너무 겁에 질리자 아무것도 못한 채 얼음이 되어 버렸다.


드디어, 노래하는 여자 귀신을 보게 되는 건가 싶어 무서우면서도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남자아이가 혼비백산 뛰어나온 후, 땅을 울리는 진동이 발 밑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치고 올라왔다. 이후, 자동차 한 대가 큰 엔진 소리를 내며 지하주차장에서 질주하듯 튀어나왔다. 담력 시험을 하러 내려갔던 아이가 차를 피한 것은 간발의 차로 천운이었다.


마지막 순간, 입구에 다 달아서야 램프의 벽을 타고 뛰어넘은 까까머리가 내 옆으로 착지했다. 아이는 매연을 내뿜으며 저만치 멀어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한동안 넋 놓고 쳐다보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남자아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와 동시에 까까머리의 바지 아래로 노랗고 미지근한 물이 안쪽 허벅지를 타고 내려가 발목을 적셨다.


수치심과 당황스러움에 까까머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일그러졌다. 나 또한 이런 난처한 상황은 처음이라 아무 말도 못하고 남자아이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어색한 침묵이 우리 둘을 감쌌다. 아이가 흘려보낸 오줌이 내 발치 쪽으로 번지듯 흘렀다. 본능적으로 한발을 뒤로 뺀 순간, 목 언저리에 가해지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숨이 턱 막혔다.


“너, 이거 다른 애들한테 말하기만 해봐. 가만 안 둘 거야.”


까까머리가 내 멱살을 잡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노골적인 위협에 온 몸이 공벌레처럼 움츠러들었다. 녀석의 살벌한 눈동자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고작해야, 내 또래 남자아이일 뿐이었는데도 너무 무서웠다.


내가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보이자, 까까머리는 돌맹이 같이 단단한 주먹으로 내 명치를 세게 한 방 때리고는 도망가 버렸다. 부지불식간에 당한 봉변에 방어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너무 억울해서 ‘헉’ 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누군가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 주위를 둘러봤지만, 사위는 이미 어둑해졌고 주차장 램프 입구에는 나 홀로 남아있었다. 아직 통증이 가시지 않은 명치 부근으로 손을 가져 가려는 데 손바닥이 축축했다.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손으로 바닥에 짚을 때, 까까머리가 지린 오줌을 만져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엉덩이 부근까지 오줌에 닿아 마치 내가 소변을 지린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집에 들어간다면 엄마한테 혼날 것이 분명했다. 까까머리의 협박과 예상치 못한 폭력 그리고 오줌을 지렸다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혼날 생각을 하자 서러움이 폭발했다.


그 날, 엉망이 된 채로 울면서 집에 들어간 나는, 역시나 예상대로, 엄마에게 등짝을 맞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 인물, 단체, 지명 및 장소는 모두 허구이며 실제와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