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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일이 나를 힘들게 하지 않도록

되짚는 마음

by 김단한

어제 먹은 점심이 기억나지 않거나,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을 사야지 사야지 했다가 까맣게 잊어버리는 일은 우리 삶에 있어 아주 빈번하게 일어난다. 분명 중요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의 초성조차 기억나지 않을 땐 심히 당황스럽다. 우울함과 불안감을 자주 겪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 현상은 우습게도 상황을 가려서 나타나는 듯하다. 이러한 건망증이 쉽게 해당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어제 먹은 점심이나 사야 하는 물건, 해야 할 말 같은 것은 쉽게 까먹으면서 나는 내가 겪었던 후회나 좌절, 허무함과 같은 감정은 아주 생생히 기억한다. 자괴감을 불러오는 지난 상황에 매몰되는 일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나를 조롱하듯 찾아오곤 하는데, 까맣게 잊은 줄 알았던 어떤 일이 떠오를 때마다 정말이지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괴로움을 느낀다. 그것도 아주 생생히. 맥락 없이 찾아오곤 하는 이 상황은 순식간에 나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조금만 더 뭔가를 알았다면, 조금만 더 용감했다면, 그런 생각에 휩쓸려 수만 가지의 다른 결말을 만들어내느라 시간을 허비한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더 나은 상황을 상상하는 힘은 아주 절실해서 내가 쉽게 이길 수 없다.


왜 그런 일은 까맣게 잊지 않고 마음에 숨어있는지. 그런 일은 내가 우울하거나 불안할 때를 노려 힘차게 등장한다. 우울과 불안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불을 지핀다. 활활 타오르는 불에 나는 까맣게 재가 되어버린다. 모든 것을 불태우고 나면, 새까맣게 타버린 마음과 매캐한 연기만 남는다. 그야말로 모두 불태워버리기 때문에, 남는 마음 또한 없다. 그렇게 태워버린 마음의 방이 몇 개나 된다.


되짚는 것도 정도껏 해야 하는데, 나는 그 정도껏이 어렵다. 우울함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불안감은 끊임없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떠올리게끔 하기에, '지나간 일'이 나에게 찾아들면 나는 겉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평온해 보이지만, 속에선 불이 난다. 그저 어느 노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면 참 좋으련만. 사람은 아주 우스운 존재라 내가 실제로 겪은 일로 인해 가지게 된 결말을 폄하하고 좀 더 나은 것을 떠올리게 하기에 생각을 도중에 멈추는 것도 아주 어렵다. 이런 생각은 또 기가 막히게 새벽에 찾아들곤 해서, 이불 안을 전쟁터로 만든다.


제발 그만 생각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하는 존재이므로, 이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그게 무엇이든지 적당한 것이 좋다는 생각 아래, 문득 떠올라 불안과 우울을 동반하는 생각들을 맞이하기로 했다.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 그대로를 떠올리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지나간 일이 떠오를 때, 내가 후회되는 상황이 있더라도, '내가 조금만 더 그렇게 했다면'이라는 가정을 아예 빼버리고, 온전히 그 상황만을 떠올려야 한다. 이때,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상황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물론, 내가 직접 겪은 일이라 1인칭 시점이겠지만, 가능하다면 3인칭 시점으로 그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이런 일이 있었지, 나는 그때 왜 그랬을까, 내가 조금만 달리 움직였다면 상황이 변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가 아니라, '그때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행동했다.'까지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때, 슬며시 내가 그 상황을 겪으면서 어떤 감정이 떠올랐는지 그래서 어떤 결말이 생겼는지 떠오르게 되는데, 나는 이 부분을 기어코 무시하려 노력한다. 무시하기가 힘들다면, '그땐 이런 감정이었고, 그 일은 이렇게 끝났다.'로 정리하는 것이 좋다. 자꾸 거기에 감정을 붙이면, 우울함과 불안이 더 생생해져서 나만 괴롭다. 지금 살아내면서도 충분히 괴롭고 힘든 일이 많은데, 이겨내야 할 것 투성인데, 지나간 일까지 나를 힘들게 만들진 말자. 그 정도는 내가 제어할 수 있다. 충분히.


사실, 이불 안에 꽁꽁 숨어있다가, 글을 쓰기 위해 이불 안에서 벗어나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나는 괴로웠다. 오늘은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불안이나 우울에 관해 더 할 말이 있을까? 하고. 그런데, 또 쓰게 됐다. 괴로이 견딘 시간들이 갈라진 마음의 틈을 메꾼 덕이다. 여러 겹 덧칠되어 볼품없을지언정, 나는 오늘도 그 마음을 딛고 일어서하고자 하는 말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경험이라고 했다. 의미 없는 시간도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후회로 점철된 일이라도 분명, 어떤 식으로든 내 안의 무언가를 메꿔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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