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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쌓인 마음은 굳건하기 마련이지

쌓여가는 마음

by 김단한

수많은 보드게임 중에서도 '젠가(jenga)'는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게임 방식을 지녔다. 3개씩 가로, 세로 방향으로 쌓인 나무 블록을 순서에 따라 하나씩 빼는 이 게임은 빠져나간 블록으로 인해 쌓였던 블록 탑을 무너지게 하는 사람이 지는 형식이다. 어떠한 속임수도 없을뿐더러, 온전히 자신이 선택한 블록을 제거함으로 인해 일어나는 결과로 승패가 갈리기 때문에 끝이 깔끔하기도 하다.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해 나는 '젠가'를 즐겼다. 여럿이 둘러앉아서 자신의 카드를 쥐고, 서로를 속이고, 또 들켜가며 논쟁을 벌이는 게임은 나에게 무척 어려웠다. 어렵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해서, 나는 되도록이면 깔끔한 게임을 선호했다. 그런 나에게 '젠가'는 단순하고 쉬웠기에 참 고마운 게임이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좋은 인상만 심어줄 수 있었으면 참 좋으련만. 나는 곧, '젠가'의 진가를 알게 되고 주춤하게 된다. '젠가'가 결코 쉽고 간단한 게임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저 쌓인 나무 블록을 제거하고 탑을 무너지지 않게 하면 되는 게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젠가'에도 꼭 행해야 하는 룰은 존재했다.


모든 게임이 그렇지만, '젠가' 역시 과정이 무척 중요한 게임이었다. 첫 시작은 나무 블록을 쌓아 올리는 것이다. 중간에 탑이 그냥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평평한 바닥에서 나무 블록을 잘 쌓아 올리는 과정부터가 시작이다. 나무 블록의 탑이 완성되면 게임을 시작할 수 있는데, 여기서도 분명한 룰은 존재한다. 가장 위에 있는 블록을 뺄 수는 없다. 고로, 중간이나 탑의 아래층에서 블록을 빼 위로 쌓아 올려야 한다. 게임을 하는 이들에 따라 룰이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내가 했던 '젠가'에서는 한번 건드린 나무 블록은 무조건 끝까지 사용해야 했다. '아, 이거 말고 다른 거!'라는 말을 외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두 손을 사용해서는 안되고, 오로지 한 손을 사용해 내가 빼내리라 마음먹은 블록을 제거해야 했다.


쉽다고 느꼈던 게임이 어렵게 느껴진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한 일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어느 순간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보드게임 하나에 뭐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접목시키냐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겠으나, 감히 반박하자면 기본적으로 '불안'이라는 것이 나를 구성하는 큰 요소로 자리 잡은 이상, 정말이지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참 비통하다. 그러나, 사실이다. 정말 어쩔 수 없다. 나는 정말 정말 어쩔 수 없이 세상 모든 것들의 틈에 '불안'을 끼워 넣는다. 불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지길 반복하는 삶이라는 것을 인정한 지 오래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젠가'가 어려워졌다. 어떤 나무 블록은 그새 꽉 물려 잘 빠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 나무 블록을 선택했다면? 탑이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빼내려 노력해야 한다. 탑이 휘청거린다. 불안하다. 무너질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나무 블록이니 끝까지 빼내야 한다. 탑이 휘청거리다 곧 와르르 무너진다. 무너진 탑을 보고, 우습게도 나는 다음 또 불안을 느낀다. '내가 다음에도 탑을 무너지게 만들면 어쩌지?'


누군가는 마음이라는 곳을 아늑한 다락방처럼 여기고, 누군가는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마구 쌓아두는 창고처럼 여긴다. 각자의 마음이, 그 마음이 담긴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지만, 우린 결코 서로의 마음을 볼 수 없으며, 자기 자신조차도 내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쉽게 알기 어렵다. 나는 어떨 때는 마음을 굳게 잠긴 캐리어처럼 여긴다. 비밀번호를 까먹거나, 지퍼가 고장 나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지 못하는 그런 캐리어. 또 어떨 때는, 문이 여러 개 달린 건물 하나를 상상하기도 한다. 자주 들어가는 방은 그나마 불이 켜져 있고, 어떤 마음이 들어있는지 안다. 그러나, 내가 숨기고 싶고, 별로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은 불안이라는 비닐에 담겨 잘 열리지 않은 방의 구석에 있다. 마음의 방을 잘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아무렇게나 뒹구는 마음을 한쪽으로 잘 치워야 내가 쉴 곳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뜻 움직이지 못한다.


책임감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무거울 수 있는 단어다. 그러나, 나는, 책임감에 있어 기분 좋은 부담감을 느낀 것이 아니라 불안을 느끼고 말았다. 불안이 오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선택한 나무 블록이 탑을 무너지게 할까 봐. 그거 하나였다. 달리 말할 수 있겠다. 내가 선택한 마음이 나를 무너지게 할까 봐.


앞선 글에서 나는 여러 마음 중에서 어떤 마음을 선택할 것인지를 잘 생각하고 쓰는 것을 권했다. 그게 나에게도, 쉽게 불안을 느끼는 이들에게도 필요하다고 여겨서 쓴 것이었다. 당장에 쓰지 못하는 마음은 쌓이게 마련이다. 마음이 잘 쌓일 수 있게 정리하는 것은 내 몫이다. 그 탑이 온전히 서 있을 수 있게 평평한 마음의 바닥을 만드는 것도 내 몫이다. 당장 써야 하는 마음, 감정을 고르는 것도 내 몫이다. 나는 이불 안에서, 이 불안에서 내가 마음 하나를 골라내는 것을 그려보았다. 그 마음은 탑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불안이 조금씩 옅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군데군데 블록이 빠진 탑은 다시 위로 쌓아 올려진다고 하더라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그게 그렇게 큰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필요가 있다. 무책임한 말투로, '무너지면 다시 세우면 되지.', '원래 무너질 거였어. 진짜 몰랐어?'라고 나를 책망할 필요는 없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내가 정했다. 불안은 어디에서든 오고, 스며들고, 흐르고, 불어오고, 풍기니까. 그것을 막으려고 대차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에 힘쓰지 말고, 조금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블록을 하나하나 쌓듯이, 불안도 하나하나씩 잠재울 수 있다. '탑이 무너졌어, 나 때문이야. 역시 불안했어.' 보다는 '어차피 무너질 거였네, 알고 있었잖아. 역시 내 생각이 맞았네, 불안할 필요가 없었어.'가 될 수 있도록, 그때그때 오는 불안을 툭툭 받아치면 된다. 우리는 그럴 수 있다. 분명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불안을 인정하고 난 다음에는, 흩어진 나무 블록(마음, 감정)을 잘 정리하자. 꼭 탑을 쌓지 않아도 된다. 그저 한쪽으로 잘 치워두자. 그러면 그게 거기 있다는 걸 안 이상, 그걸 밟고 아파할 일은 없을 테니까! (나무 블록이든 레고든 밟으면 너무 아프다는 거, 다들 아실 테니! 오늘도 이 불안에서 잘 살아남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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