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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연 Oct 12. 2021

15만 5천 원

 아직도 용돈 받는 서른세 살 손녀

나는 세 살 때도 안나에게 용돈을 받았다. 열셋, 스물셋에도 용돈을 받았다. 서른셋인 지금도 용돈을 받고 있다. 드린 적은 거의 없고, 받은 적은 거의다. 


안나는 나를 볼 때마다 무언가를 챙겨주고 싶어 한다. 내가 직접 사들고 간 떡도 예외는 아니다. 하나 맛보시곤 이거 정말 맛있으니 다시 집으로 들고 가서 너 먹어라는 식이다. 나란히 앉아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안나는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향한다. 행선지는 두 곳으로 정해져 있다. 부엌과 자신의 방. 


부엌에서는 먹을 수 있는 온갖 것들을 꺼내 봉지에 담는다. 안나의 집에서 나는 봉지의 부스럭 소리는 출발선에서 쏘아 올려지는 신호탄의 역할을 한다. 부스럭 소리가 시작되면, 나의 목소리가 따라붙는다. 아무것도 안 가져갈 거야! 아무것도 안 가져갈 거라고! 의미 없는 외침이다. 아랑곳하지 않고 안나는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담는다. 윗집 아주머니가 주셨다는 파전, 누군가가 직접 김장한 김치, 먹어보니 맛있었다는 바나나, 간편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찌개 키트까지. 


지연 : 할머니, 이런 건 나도 사 먹을 수 있어. 여기 있는 건 제발 할머니 드쇼. 

안나 : 안 묵는다. 안 묵는 거라서 주는 거다. 

지연 : 왜 안 먹노, 챙겨 먹어야지! 아니, 그건 넣지 마!

안나 : 해물쭐도 모른다. 가져가라. 니나 많이 무라. 많이 먹고 좀 건강해져라. 


안나의 눈에 나는 여리고, 힘없고, 착하고, 순하고, 바보 같다. 먹을 것을 제때 챙기지 못하고 자주 굶으며, 어쩌다 음식을 먹더라도 깨작거리며 남기기 일쑤라 볼품없다. 자주 아프고, 자주 체하고,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얼굴이 하얗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그러니, 자신이 더 많이 챙겨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보니 많이 먹는 것이 좋더라, 좋은 것 많이 먹고, 좋은 거 많이 보고, 좋은 거 많이 듣고 말하면서 사는 것이 좋더라, 하면서. 자꾸만 나를 먹이려 한다. 나를 먹이고, 건강하게 만들어서 남은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들고 싶어 한다.


빈 손으로 왔어도 금세 한가득 보따리가 채워진다. 안나가 보따리를 묶는 솜씨는 상당하다. 어떻게 이렇게 보자기를 잘 다루냐 물으면 굽이굽이 세월을 거슬러 온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어렸을 적, 스무 살 차이가 나는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행상 일을 했을 때부터 단련된 솜씨라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이런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잊어버려야 할 것은 안 잊어버리고, 잊지 않아야 할 것들만 잊어버린다고. 그런데, 이미 잊어버린 터라 잊지 않아야 했던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고. 늙으니까 그런 거라고. 늙는 건 그런 거라고.


부엌에서의 실랑이(매번 내가 진다)가 끝나면, 방에서의 실랑이가 계속된다. 안나는 연기에 능하다. 아니, 능하지 않다. 안나는 독백에 능한 연기자다. 아니다, 방백에 능한 연기자다. 어쩌면 두 가지에 모두 능한 연기자다. 안나는 관객들이 있는 곳에서 관객이 몰라야 할 연기를 한다. 그러고는, 아무도 자신의 연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바로 앞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안나의 연극은, 관객이 배우의 연기를 모른 척해주어야 하는 신개념 연극이다.


안나의 연기는 이모와 엄마가 관객으로 있을 때 빛을 발한다. 일단은 모두가 있는 앞에서 나에게 용돈을 주는 것이다. 용돈을 주는 이유는 그때그때마다 다르지만, 결국엔 단 하나다. 어디서든 기죽지 말라는 것.


안나 : 지갑에 현금이 있어야 한다. 요즘에 뭐, 다들 카드 그 쪼매난 거 쓰고 그카지만, 어쨌든 만원 짜리 몇 개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니 밥 사 주는 친구들, 니 친구들한테 니도 밥 사고 커피도 한 잔쓱 사고 그래라.


나는 일단 용돈을 패스한다. 할머니, 나도 커피 사 먹을 돈은 있어. 돈 없으면 안 사 먹으면 되지. 안나에겐 아무런 말도 통하지 않는다. 안나가 주기로 했으면, 받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용돈을 받는다. 부끄럽기 그지없다. 찰나의 순간 오만가지의 생각이 다 든다. 내가 애초에 연극영화과 이런 거 들어가지 않고 빨리 돈을 버는 시장에 뛰어들었으면 달라졌을까, 그러면 할머니 아프실 때 4인실, 6인실이 아니라 번듯한 1인실 같은 곳에서 편히 치료받게 해 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 손에 쥐어지는 종이가 무겁게 느껴진다. 선풍기 바람에도 쉽게 날아갈 색색의 종이가 그저 무겁게 느껴져서 나는 얼른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온 마음이 물에 젖은 듯 축 늘어진다.


이모와 엄마가 보고 있는 가운데에서 안나가 나에게 용돈을 주는 이유는 보여주기 위해서다. 큰 소리로. 연기를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지연이에게 용돈을 주었다는 것을. 그리곤, 각자 다른 일을 할 때 슬쩍 방으로 나를 부른다. 나를 방으로 부른다는 것을 관객인 이모와 엄마는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한다. 안나는 이모와 엄마가 이 연극에 한 번도 빠짐없이 출연한 베테랑 앙상블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안나는 방에서 나에게 몇 번을 꼬깃꼬깃 접은 돈을 건넨다.


지연 : 이게, 뭔데! 아까 줬잖아, 됐다, 할머니. 됐다.

안나 : 넣어놔라, 넣어놔라. 이건 니만 써라, 알았제.

지연 : 거 참, 할머니. 아까 줬잖아.

안나 : 아까 준 거는 아까 준 기고, 이거는 니 주는 기고. 니만 쓰라고. 


안 그래도 무거운 주머니가 또 무거워진다. 안나는 퇴장 한다. 나는 가만히 방에 남아 주머니를 만지작거린다. 벽에 붙은 거울엔 활짝 웃는 아홉 살 지연이의 사진이 있다. 사진이 말을 건다. '야, 너 아직도 할머니한테 용돈 받냐!' 그러면 나는 답한다. 그래 뭐, 비웃는 건 아니길 바래. 나도 내가 서른셋까지 용돈을 받을 줄은 몰랐으니까. 그리고, 잊었나 본데, 어쨌든 너는 나고 나는 너야, 바보야. 이러는 게 우스워보이면 네가 어디 오디션이라도 가서 좀 붙어서 아역 배우 데뷔라도 하던가. 그래서 인생을 좀 바꿔보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조용해. 


필요 이상으로 불룩해진 주머니를 수습하기 위해 나는 방바닥에 앉아 안나가 우악스럽게 집어넣었던 뭉치를 꺼낸다. 오만 원이 한 장, 두장, 세장. 오천 원이 한 장. 십오만 오천 원. 웃음이 난다. 슬프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화도 난다. 방으로 매번 불러 주머니에 넣어주었던 돈의 금액은 늘 같았다. 이십만 원. 책도 사고, 글도 좀 많이 읽고, 사람들 많은 곳에 가서 커피도 좀 마시고, 빵도 먹고, 다 해라. 이야기하며 챙겨주셨던 돈은 매번 이십만 원이었다. 안나는 요즘 예전보다 더 많이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이십만 원을 챙겨주고 싶었겠지. 그랬겠지. 오천 원이 오만 원으로 보였을 것이다. 알고 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으니까. 술에 만취해 탄 택시에서 현금으로 결제를 할 때, 내리기 전부터 가방에서 돈을 꺼내 마치 위조지폐를 찾는 것처럼 휙휙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에 대고 이거 천 원 맞지, 이거 만원 아니지, 헐, 이거 만원이네, 냈으면 큰일 날 뻔했네 했던 적이 많았으니까. 그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그거랑 다르지. 지금 괜히 이 상황을 무겁게 만들지 않으려고 나름 웃긴 이야기를 꺼내보았는데, 하나도 웃기지 않다. 오히려 화난다.


4만 5천 원이 빠져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오만 원권 사이에 오만 원인 척하며 자리하고 있는 오천 원의 천연덕스러움이 너무 밉고 화나서 그런 것이다. 나는 잠시, 아주 찔끔 울었다. 


연극의 무대에 홀로 남은 나는 어떤 식으로 퇴장을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눈물을 닦고 발랄하게 퇴장할 것인가. 엉엉 울며 엎어져 조명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하지만, 어떻게 하여도 결국은 '엔딩'이다. 그것이 가까워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15만 5천 원. 오천 원은 뻔뻔하게 오만 원인 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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